최근에 일어난 촛불시위는 전자 정보의 위력을 여지없이 발휘하였다. 광고 한번 내지 않고 수천, 수만 명을 한자리에 모은 것은 인터넷과 이동전화의 정보 전달 능력 덕이다. 시위 참가자의 절대다수가 인터넷 세대란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찬·반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시위는 큰 효과를 거두었다. 쇠고기 추가 협상을 이끌어내고 청와대 비서진을 교체시켰으며, 그렇게 당당하던 대통령을 비굴할 정도로 사과하게 했다.

원로도, 언론도, 심지어 국회조차 그 정도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획기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고 시민사회의 모범 사례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성과를 보고 직접민주주의 가능성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원도 하지 않고 촛불시위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국회의원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날 만도 하다.

시위대는 돈 한푼 받지 않고도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정작 국회의원들은 큰 액수의 세비를 받으면서도 촛불 옆에서 '곁불이나 쬐고' 있으니 국회가 과연 꼭 필요한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직접민주주의가 비용도 적게 들고 효과는 더 클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과연 인터넷 여론을 믿을 수 있는가. 기독교 전통의 '죄의식의 문화'와는 달리 우리는 '부끄러움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나 원칙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의식하기 때문에 자기 얼굴이 드러나면 점잖지만 혼자 있거나 익명성이 보장되면 야비하고 부끄러운 짓을 쉽게 해버린다. 옛 선비들이 혼자 있을 때도 행동을 삼가는 덕(愼獨)을 가르쳤지만 체면과 외식을 강조하는 전통에선 효력이 별로 없었다.

이런 문화에선 컴퓨터 앞에 홀로 앉아 이름을 숨긴 채 즉흥적으로 써 올린 글이 무책임하고 감정적이 되기 매우 쉽다. 바로 그 때문에라도 우리나라에선 인터넷 실명제가 꼭 필요하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실명제는 수사를 통해서만 실명이 드러나므로 실제적인 효과가 별로 없다. 평시에도 실명을 노출해야 제시된 의견을 믿을 수 있다.

익명이라야 자유롭고 솔직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솔직하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더구나 감정의 표현은 솔직하든 말든 믿을 것이 못 된다. 감정은 행동하게 하는 힘은 있으나 쉽게 변하고, 감정적으로 본 세상은 객관적일 수 없다. 인터넷 여론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주로 젊은이들이 만들기 때문에 감정적이고 객관성과 합리성이 약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 가운데는 어린아이가 통치자가 되는 것이 있다. 감정적이고 미숙한 자가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큰 저주가 아닐 수 없다. 르호보암 왕은 노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젊은이들의 의견에 따라 다스리다가 나라를 둘로 쪼개고 말았다. 예술과 학문에는 젊은이의 감수성과 창조력이 필요하나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관리하는 데는 노인들의 경험과 지혜가 필요하다.

인터넷 낙관론자들은 주관적이고 왜곡된 의견이라도 인터넷에 올라오면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토론하기 때문에 충분히 견제되고 보완된다고 말한다. 이론적으로 그럴 듯하나 증명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누리꾼은 어떤 의견이 옳기 때문에 동의하고 옳지 않기 때문에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면 칭찬하고 들지 않으면 욕하고 비판한다.

이런 상황에선 잘못된 생각이 수정되긴커녕 비슷하게 잘못된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더욱 강화되어 독선으로 고착된다. 그래서 지금 인터넷에는 정제되지 않은 무수한 감정 폭발이 수정도, 견제도 되지 않은 채 거룩한 확신으로 무장되어 활보하고 있다. 인터넷 덕으로 사회가 통합되고 건강한 의견이 형성되긴커녕 오히려 더 분열되고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믿을 수 있는 여론은 사실을 중시하는 성숙한 전문가가 비판을 의식하며 심사숙고하여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진지한 토론을 거쳐야 만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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