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웅 박사 신간, 간추린 신격화 교리

‘너무 뻔해 보이는 교회?’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에게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아니 한국교회 성도들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할까? 속속들이 너무 많이 보고 알아 신비하기는커녕 뻔해 보이지는 않을까? 스텔렌보쉬 대학교의 요한 실리에(Johan Cilliers) 교수는 설교의 오랜 숙적 가운데 하나가 “지루함(boring)”이라고 했다. 너무 뻔해서 지루하다. 설교도 뻔하고 예배도 뻔하고 새로울 게 없다고 착각한다. 

21세기 한국교회가 집중해야 할 중요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신비’이다. 사도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the mysteries of God)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린도전서 4:1)”라고 했지만, 우리는 비밀과 신비를 잃어버리고 너무 뻔한 존재가 되어 버린 듯하다. 이번 임대웅 박사의 신격화 교리 소개를 통해 하나님의 비밀과 신비를 회복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 편집장 김대진 박사

 

잃어버린 약속, 신격화: 열두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서론

임대웅 목사(서울서문교회 청년부 담당)

신격화(神格化, deification) 교리는 우리에게 생소하고, 어색하고, 이교적이고, 미신적인 용어이다. 이같이 신격화 교리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잘 수용되지 않는 주된 이유는 서구 기독교의 영향 하에 있는 한국 신학의 태생적 특징상 동방교회의 교리로 알려진 신격화라는 용어가 자리매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서방 신학으로부터 신학을 전수받아 지금도 북미에서 유행하는 신학 논쟁과 목회 모델의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 신학과 목회 풍토에서 동방교회는 천여 년 전 헤어진 형제가 아닌, 이단에 가까운 집단으로 여겨지는 현실이다 보니 동방교회에 대한 소개 자체가 미흡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용어 수용부터가 어려운 신격화 교리를 다루는 이유는 풍성한 은혜의 약속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1054년 동서방 교회가 분열된 이후 각각은 교류가 전혀 없이 천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에큐메니칼이라는 이름으로 동서방 교회 간의 대화가 시도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냉대와 오해, 견제가 존재한다. 동서방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선입견을 버릴 수 있다면 서로에게서만 발전된 풍성한 교리적 진술들은 상대 진영이 가지지 못한 신학적 식견을 가질 수 있게 해 주고, 결과적으로 동서방 교회와 신학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열 두 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신격화 교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시도해 보려 한다. 열 두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신격화 교리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 신격화는 동방교회의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구원 받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에 참여한다는 약속으로, 이 땅에서는 송영을 통한 예배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며 장차 종말에 가서 더 완전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1. 오해: 인간이 하나님이 되다?

신격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qeosij인데,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이 된다”는 의미로 인해 많은 이들은 신격화를 기독교적 용어가 아닌 이교도적 용어로 인식한다. 여기서 전제하는 신격화의 개념은 “동등됨”이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정확히 일치할 때까지 같아짐을 상정하는데, 그러한 전제는 필연 오해로 이어진다.

신격화 교리는 신인간의 동등됨을 주장하지 않는다. 동방교회는 본질과 활동의 구분을 통해 하나님과 신격화된 인간의 존재론적 구분을 확보한다. 이 구분의 주창자는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Gregorius Palamas, 1296-1359)로 이를 위시로 한 그의 신학은 팔라미즘으로 불리며, 팔라미즘의 수용 여부가 현대 동방신학의 큰 두 흐름을 결정하는 요인일 만큼 그의 사상은 현대 동방신학에서도 중요하고 영향력 있다. 가파토키안 교부들로 알려진 바실리우스(Basilius the Great, 330-379)와 두 명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of Nazianzus, 329-390 & Gregorius of Nyssa, 335/40-394) 역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없으며, 단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서만 그분을 알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신격화는 문자적 의미에서 “하나님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의 회원으로 통합됨이다. 하나님과 상관 없이 나 자신이 무엇이 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교제 자체가 우리에게 복락이다. 동방 신학자들은 신격화를 논할 때 사소한 범신론적 암시도 단호히 거부하였다. 인간의 신격화는 하나님의 거룩한 활동으로의 참여이지, 거룩한 본질로의 참여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신격화는 변화보다는 관계에 관한, 본질보다는 계시에 관한, 그리고 공유가 아닌 참여의 문제이다.

 

2. 동방교회: 신격화의 고향

동방교회 혹은 동방정교회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로만 카톨릭, 개신교와 더불어 엄연히 기독교 3대 종파 중 하나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서울 마포구 아현동을 비롯해 전국에 8개의 동방교회 예배당이 있으며 약 3천 명의 신도들이 있다.

엄밀히 신격화 교리의 고향이 동방교회는 아니다. 동서방이 1054년에 갈라지기 전 고대교회부터 신격화를 말해왔다. 현재 서방교회는 이 교리를 거의 잊어버렸지만 동방교회는 여전히 이 교리의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표현할 뿐이다.

현대 동방신학은 신격화 교리에 접근하는 그 주요 관심에 따라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우주적 신격화에 관심을 갖는 그룹과 그리스도의 인격에 참여함에 신격화의 주요 초점을 두는 그룹이 그것이다. 전자는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 약580-662의 신학을 따라 전 우주의 신격화와 모든 피조물들이 거기에 참여하여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고전 15:28)는 우주적 신격화의 완성을 강조한다. 이 관점에서 신격화는 단지 타락의 해결책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전 인류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신학의 목적은 개인의 구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회복의 측면까지 나아간다. 성육신의 목적은 단지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또한 구원 받은 인간을 통한 전 우주의 신격화이다. 따라서 경륜의 온전한 범위는 보다 거대한 아치에 계시된다. 두 번째 그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성자와 그 성자를 통해 신성을 공유하고 그리스도화됨에 초점을 둔다.

이 두 그룹이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막시무스는 우주적 신격화를 강조하면서도 교회 생활을 통한 신격화의 현재화가 매우 구체적인 방식, 즉 기도와 교회의 예전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진술한다. 개인적 신격화를 주창하는 이들도 신학의 범주는 창조부터 신격화까지임에 동의하면서 신성으로의 개인적 참여 역시 강조한다. 동방신학의 우주적 그리고 개인적 신격화는 부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 준다.

 

3. 성육신: 신격화의 시작

신격화는 이신론과는 다르다. 이신론이 신의 불가지성에 의지해서 자연에 편만해지는 신을 말한다면, 신격화는 신이 가시화된 현장, 즉 성육신에서부터 시작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집중된다. 하나님의 성육신이 인간 신격화의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이를 성육신-신격화 공식이라 부를 수 있는데, 교부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방 신학에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온 사상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의 이 진술이다.

우리를 하나님 되게 하시려고 그가 인간이 되셨다 

(auvto.j ga.r evnhnqrw,phsen i[na h`mei/j qeopoihqw/men).

이 공식은 성육신과 신격화를 동등한 위치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아니다. 시리아 교부였던 에프렘(Ephrem of Nisibis, 306-373)은 “교환 공식”을 말하면서 “그는 우리에게 신성을 주셨고, 우리는 그에게 인성을 주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교환”이라는 단어가 대등한 조건 하에서의 공정한 거래를 뜻하므로, 우리는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인간의 측면에서 성육신-신격화 공식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성육신의 기획자이시며,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인간의 신격화를 완성하고 계신다.

이러한 성육신-신격화 공식은 이레나이우스(Irenaeus, 약140-202)와 상기한 아타나시우스의 글을 통해 가장 빈번히 인용되어 왔다. 하지만 동방교부들 뿐 아니라, 서방교부, 중세신학자들, 그리고 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같은 개념 심지어 정확히 같은 어구들이 성육신-신격화 공식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성자의 성육신과 인간의 신격화 간의 관계는 전 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서방 교부의 대표로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3-430)와, 종교개혁의 두 거장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신학에서 이 공식을 찾아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성부와 같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 우리의 죽을 수 밖에 없는 본성에 참여하여, 우리 역시 그분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또한 그는 불멸과 신성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시라고 하면서, 그분이 우리와 같은 상황 가운데 죽음과 저주의 존재로 놓여져 우리를 그와 같이 불멸과 신성의 존재로 이끄신다고 하였다. 그분의 죽음과 저주는 일시적인 것이지만, 그분은 영원한 불멸과 신성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이는 인간이 그분에게 참여함으로 이루어진다.

비록 신격화-성육신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루터의 1514년 성탄절 설교는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설교에서 그는 말씀의 육화를 신격화 교리와 연관하여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마찬가지로 육신이 말씀이 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즉, 강함이 약함이 되어 약함이 강함이 되게 하셨습니다. 로고스가 우리의 형태와 방식, 우리의 형상과 모습을 입으셔서, 우리가 그분의 형태, 그분의 방식, 그리고 그분의 모습을 입도록 하셨습니다.

칼빈에게 있어 신격화의 원동력이신 그리스도 그분이 곧 성육신-신격화 공식을 나타내시는데, 즉 그분의 육체가 성령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는 거룩한 삶의 근간을 이룬다. 칼빈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성육신-신격화 공식의 언급 중 아래의 인용이 가장 선명하게 성육신을 통한 인간의 신격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인애로 말미암은 놀라운 교환이다. 즉, 우리와 함께 인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자신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길을 준비하셨으며, 우리의 죽을 운명을 가지심으로써 우리에게 그의 불멸을 주셨고, 우리의 무력함을 받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빈곤을 받으시고 그의 풍부하심을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또 우리를 억압하던 우리의 죄의 짐을 스스로 지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

 

4. 구원: 신격화의 의미

신격화를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하면, 구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동방교회는 이 구원을 우주적 차원의 구원과 개인의 구원으로 나누어 생각해 왔다. 서방교회, 특히 개혁주의에서 구원을 교리적인 진술을 통해 설명하고자 할 때 주로 취하는 방식은 구원의 서정이다. 구원의 서정 중에서도 칭의와 성화라는 두 개념이 서방신학의 구원론의 골격을 이루고, 칭의론을 다룸에 있어서는 법정적 선포가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서방과 동방의 구원론에 대한 다른 접근의 기원을 찾으면서 동서방신학이 태동될 당시 배경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있다. 로마의 몰락을 보면서 서방신학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고, 로마의 발달된 법체계 역시 법정적 의미로서의 구원론이 서방신학에서 발달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비잔틴 제국이 흥왕했던 시기에 신학적 기초를 다졌던 동방에서는 서방의 관심사였던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고민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법정적 의미를 굳이 구원론에 삽입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동방에서는 칭의와 성화보다 능동적 의미의 신격화가 구원론의 핵심에 들어설 수 있었다. 우리 양 진영 모두를 살펴 봄으로 구원론이 가지는 다양한 양상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루터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투오모 만네르마(Tuomo Mannermaa, 1937- )로 대표되는 헬싱키 학파 혹은 만네르마 학파는 그간 루터란들 사이에 팽배했던 해석, 즉 루터의 칭의론은 법정적 선포 중심이라는 전통에 반기를 든다. 그들은 루터의 저작들을 원전으로 다시 읽으면서 루터에게 칭의는 법정적 의미와 실효적 의미 두 가지가 공히 중요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와 선물은 동시에 신자들에게 효력을 발생시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신자를 지켜주는 은혜와(법정적 의미), 죄인을 새롭게 하여 의인으로 만드는 선물로서의 그리스도(실효적 의미)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네르마 학파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이처럼 신격화와 구원의 서정 중 칭의교리를 비교한다.

그런가 하면 성화와 신격화를 비교하는 연구도 많고, 한국에서 잘 알여진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 1964-) 에게 있어 신격화와 대비되는 것은 영화 교리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신격화가 순서상 칭의 다음에 오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특별히 호튼은 신격화를 철저히 미래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신격화 교리와 비교 연구 되어야 할 것은 구원의 서정 중 하나의 단계가 아닌 서정 그 자체이다.

 

5. 삼위일체: 신격화의 모범

신격화가 하나님과 같아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의 소지를 공재라는 개념을 사용해 설명할 수 있다. 공재 개념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와 그의 영향을 받은 막시무스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 즉 어떻게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서로를 침투하면서도 동시에 각자의 성질을 잃지 않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뒤 6세기에는 키릴루스(Cyrillus of Alexandria, 370/80-444)에 의해 처음으로 삼위일체적 배경을 가지고 사용되었다.

세 위격은 각자의 본성을 유지하면서 함께 존재하신다. 그들은 하나이지만, 다른 위격과 융합되거나 섞이지 않는다.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 은 하나님의 일체성이 공재적 개념으로 이해될 때 아리안주의나 사벨리안주의가 삼위일체 교리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교부들은 삼위일체론 논쟁에서 양태론의 함정을 이겨낼 수 있었다. 신격화 교리를 다룸에 있어서도 공재 개념은 중요성을 가지는데, 즉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선언할 때, 우리의 인격을 잃는다거나 하나님의 신격이 상실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고 하나님도 하나님이신 채로 계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마치 두 본성이 한 분 예수님 안에서 공재하는 것처럼, 세 인격이 한 분 하나님 안에서 공재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가 공재적 연합을 취하는 것, 그것이 신격화 교리가 그려주는 또 하나의 그림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지만 하나님을 인간이라고 할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되지만 하나님이 아니다. 이처럼 공재개념을 통한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신격화를 설명할 때 범신론적 오해를 극복할 수 있다.

 

6. 신비: 신격화의 설명

서방은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긍정적인 접근방식을 취한다. 즉,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구원자이시다, 혹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을 묘사하고 설명하려 한다. 이와 달리 동방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언설을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아닌 것을 설명하는 식이다. 동방의 방법은 부정신학이라 하고, 서방의 그것은 긍정신학이라고 한다.

긍정신학이 전해 주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지만, 부정신학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완전한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동방신학자들은 주장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기에 부정신학은 우리를 완전한 무지로 이끈다. 그 무지를 인지한 상태만이 하나님의 신비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는 것이다.

부정신학 안에서 하나님은 신비일 수밖에 없다. 그분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비와 신기는 다르다. 신비는 단지 신기한 것을 볼 때 나오는 감탄을 넘어, 경이로 이어지고, 경이는 곧 숭상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신비는 송영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만나게 한다.

 

7. 연합: 신격화의 결과

신격화라는 어휘가 연상시키는 첫째 개념은 변화이다. 신격화가 우리를 어떠한 존재로 변화시켜주는 가에 대한 관심이다. 이 변화는 신격화의 원대상인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게 되고, 결국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것으로 이어져,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가 되어 버린다.

신격화에는 분명 변화라는 측면이 존재한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모습은 훗날 우리가 변화하게 될 육체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위도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관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신격화를 설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나님은 관계적이시다. 하나님은 교제를 원하시는 분이다. 하지만 이미 삼위 안에서 영원한 교제를 하고 계시니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우리와의 교제를 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관계적이시라는 말은 구원론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피조물을 향한 사랑으로 그들과의 관계에 직접 참여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분과 하나가 되게 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동방신학에서 신격화는 구원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분은 멀리찌서 우리를 구원했다고 선포하시는 신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를 맺어 우리를 그분처럼 만들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8. 참여: 신격화의 수단

동방신학에서 구원은 하나님에게 참여함이다. 인간의 신격화가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하지 않음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하나님의 신적 본성은 참여불가능하며 인지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성에 참여함은 인지가능하고 참여가능한 그분의 신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삼위하나님의 존재는 그분의 일하심과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역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분의 사역을 통해 계시되는 것은 그분 자신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활동도 그분을 계시하며, 실상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하나님을 계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처럼 거룩한 활동으로의 참여는 곧 삼위하나님께로의 참여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이란, 함께 계시며(내재적 삼위일체), 함께 일하시고(경륜적 삼위일체), 함께 관계를 맺으시는 것(우리의 삼위일체로의 참여)이다. 송영이 이러한 삼위하나님의 삶의 중심에 위치한다.

송영은 반응이라는 수동적 의미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삼위하나님의 일하심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그분의 일하심은 구원하심이니, 송영은 우리가 그분의 구원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최고의 능동적 행위이다. 그리고 창세기 1:26-28의 문화명령에서 나타나듯,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로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들 창조의 상태로 보전하는 다스림으로의 참여가 우리에게 명령되었다(딤후 2:11-12 참고).

 

9. 약속: 성경 속의 신격화

신격화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그분의 약속인 신격화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음을 의미한다. 신격화에 대한 성경적 증거로 많은 본문들이 사용되나, 여기서는 가장 대표적인 본문들을 소개함으로 대신한다.

1) 창 1:26 – 신격화의 기원

인간의 재료는 흙이다. 그러나 흙은 짐승의 재료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의 독특한 재료는 생령, 곧 성령하나님이시다.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 최초의 근거는 그 재료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2) 시 82:6-7 – 깨어진 신격화의 가능성

본문에서 말하는 신들(엘로힘, gods)은 누구인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타락한 천사, 2)타락한 이 세상의 재판관들, 3)이스라엘 백성. 신격화 교리에서는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1절에서 사용된 “모임”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부르던 흔한 용어였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역시 구원받은 백성들은 “신들”로 불릴 수 있다고 하였고, 이레나이우스도 성부, 성자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입양을 받은 교회를 신들로 해석하였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0:34-36에서 구약의 이 본문을 인용하시면서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실 때에도 주님 앞에 앉아 있던 보통의 사람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었다.

3) 벧후 1:4 - 신격화의 길

어떤 주석가들은 ‘신의 성품에 참여함’이라는 표현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긴다. 물질세계와 영적세계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했다는 이유이다. 하지만 본문에서 베드로가 구분하는 것은 타락한 우리의 본성과 우리가 원래 지향했었어야 하는 성품, 곧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가 벗어나야 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으로 인해 더럽혀진 죄이다. 그렇게 방향을 바꾸고자 한다면 갈 곳은 하나이니, 하나님 그분이시다.

 

10. 송영: 신격화의 다른 이름

하나님의 영광은 정지된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전혀 다른 존재들을 연합시키고 묶어 줌으로 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세 위격은 서로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이 송영이 삼위의 관계, 즉 일체를 가능하게 한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드리는 송영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게 해 준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된다. 송영에 의해 삼위는 일체가 되고 그것을 유지하신다.

송영은 일차적으로 삼위하나님의 내부 행위이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부적 삶을 단순하게는 예배라 부를 수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예배하신다. 그분은 삼위 안에서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신을 예배하신다. 모든 관계적 필요와 교제는 이 내적 송영을 통해 해소된다. 따라서 우리의 송영과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필수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삶의 자리를 교회의 찬송과 예배 안에 두셨다. 그분은 삼위의 내적 활동으로서의 예배와 송영을 교회라는 외적 활동으로 확장하신다. 이처럼 송영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감의 결과이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곧 신격화된 존재들에게만 허락된 복락이다.

 

11. 예배: 신격화의 자리

신격화 교리는 실천적이다. 특별히, 예전적이다. 신격화는 그 근원 및 지향점을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적 예전에 두고 있다.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주일 예배의 정기적 참여를 통해 가시화된다.

성경신학자 빌(Gregory K Beale, 1949- )은 구약의 우상숭배에 대해 주로 다룬 그의 책 제목을 “우리는 우리 예배의 대상으로 변한다”라고 붙였다. 이는 부버(Martin Buber, 1878년~1965)의 진술인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를 형성한다”와도 상통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는 표현은 예전의 어원이 사람들의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되거나 스스로 우상이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함은 영적인 혹은 사변적인 측면에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신자는 예전에 참여함으로 이 땅에서 신격화를 경험한다. 우리의 몸을 가지고 참여한다. 그렇지 않다면,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몸을 가지고 하는 예배가 곧 영적 예배이며(롬 12:1), 영적 예배는 반드시 육체적 행위를 수반해야 한다.

세례는 신자의 새 탄생이며 성찬은 우리가 먹음으로 성장하게 되는 영적 양식이다. 신자는 아드님을 통해 아들이 되는데, 그분은 우리를 삼위하나님의 삶으로 올려 주신다. 아들이 된 후에는 아드님의 몸과 피를 통해 양분을 공급받음으로 아들됨을 유지한다.

물론, 참여 자체에 성례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님은 부각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없이는 누구도 성례에 참여할 수 없다. 이것이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는 고전 11:29 말씀이 의미하는 바이다.

동방교회 신학자 웨어(Timothy Ware, 1934- )의 말을 인용한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교회에 출석하여, 성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계명을 지키라.

 

12. 종말: 신격화의 완성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오랜 산 부부도 서로가 맞지 않고, 서로 잘 몰라 싸우는 일이 다반사다. 만약 부부가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언제쯤이 지나면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알고, 서로 완벽하게 닮아져서 싸우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함은 시간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에 완전히 녹아드는 일은 없을 것고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 같이 되는 신격화도 없다. 다만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원히 사랑하는데, 그 완성도가 날마다 더 풍성해질 뿐이다.

신격화는 종말론적이다. 이 땅에서 신격화가 시작되지만, 천국에서라도 완전한 신격화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갈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이 되어갈 것이다.

 

맺음말: 신격화, So What?!

신격화 교리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서방 전통에 서 있는 우리는 이 약속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거기에 담겨있는 은혜는 너무도 크다. 무엇보다 구원이 무엇인지, 구원받은 백성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 단명하게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서정이 더 익숙하다. 하지만 때로 이것은 성화와 칭의의 관계에 대한 복잡하고 지루한 논쟁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기도 한다. 동방교회가 간직한 신격화는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과의 연합, 세상을 향한 그분의 활동으로의 참여라는 단순하고 분명한, 그러면서 능동적인 삶의 비전을 제시해 준다. 동시에 그들은 서방이 겪었던 펠라기우스 논쟁을 모르기에 굳이 성도의 능동적 참여가 공로사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에게 구원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일 뿐이다.

서방에서부터 큰 도움을 받아 한국교회 신학이 발전해 왔다면 좀 더 시야를 열어 동방교회, 그리고 더 나아가 고대교회의 풍성한 신학적 유산을 오늘의 성도들의 삶에 제공해 줄 때 한국교회 신학의 자립이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서소개
“우리를 하나님 되게 하시려고 그가 인간이 되셨다”라는 아타나시우스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 때부터 기독교 구원론으로서의 “신격화” 교리가 존재했고 교회 역사 가운데, 특히 동방교회를 중심으로 지속해서 발전되어 왔다. 저자는 한국교회에 다소 생소한 신격화 교리가 교부로부터 종교개혁자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이해됐는지를 충실하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본 교리가 성례로서의 성찬과 갖는 관계에도 주목한다. 본서는 기독교의 정통 구원론에 있어서 한국교회가 미쳐 관심을 두지 못했던 한 측면을 조명해 준다.

 

◇작가소개

임 대 웅

경희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남아공 스텔렌보스대학교에서 예전학으로 석사(Th.M.)와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과 한국성서대학대학원에서 예배학을 가르쳤다. 현재는 서울서문교회에서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다.
예배 외에는 다음 세대 특히 청년 세대에 대해 관심이 많다. 청년들이 그들의 삶에서 바른 선택을 해 나가도록 말씀으로 단단히 세워놓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기복신앙과 고지론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청년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10여 년 전부터 엄마들을 대상으로 자녀교육에 대해 했던 강의를 모아 출판한 <<삼위일체 자녀교육>>(소원나무)이 있고, 역서로는 <<깊은 예배>>, <<간추린 예배의 역사>>(CLC, 근간)가 있다.
앞으로도 풀타임으로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예배와 교육에 대한 강의, 그리고 틈나는 대로 번역과 저술 활동을 통해 작게나마 한국교회에 이바지하고자 소망한다.


◇목차


추천사 1
유 해 무 박사 /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김 재 윤 박사 /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우 병 훈 박사 /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저자 서문 8

서론 14

제1장 헬라 교부 33
1. 이레나이우스 33
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42
3. 오리게네스 49
4. 아타나시우스 57
5. 예루살렘의 키릴루스 67
6.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69
7. 대 바실리우스 78
8.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79
9.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85
10. 고백자 막시무스 89

제2장 라틴 교부 97
1. 테르툴리아누스 97
2. 암브로시우스 101
3. 히에로니무스 102
4. 아우구스티누스 103

제3장 중세 신학자 113
1. 신(新)신학자 시므온 113
2. 토마스 아퀴나스 117
3.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 127

제4장 종교개혁자 141
1. 마틴 루터 141
2. 존 칼빈 146

제5장 신격화에 대한 최근 연구 동향 165
1. 동방 신학 165
2. 서방 신학 179

제6장 결론 198
참고도서 206

 

◇추천사
개신교회가 제시하는 칭의와 성화 중심의 구원론은 삼위 하나님의 본질적 사역과 서로 분리될 위험을 늘 안고 있었다. 그러나 신격화는 이런 분리의 위험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이 점에서 저자는 삼위 하나님께서 자기를 수여하시는 교회의 예배 예전의 관점에서 이 주제를 다루어 한국교회가 신학적 눈을 폭넓게 뜰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한다.
유 해 무 박사 /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본서는 이런 전통 속에서 신격화를 수용하면서 범신론이나 신비주의적 이해를 경계하고 참여와 관계로 이를 재해석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신격화 안에서 구원을 이해한 흐름을 꿰뚫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본서는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김 재 윤 박사 /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신격화는 흔히 오해되었듯이 인간이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격화는 인간 본성이 신성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본서는 바로 예배가 신격화, 즉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가 실제로 경험되고 이루어지는 자리이며, 특히 성찬의 신비가 바로 거기에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신격화 교리의 실천적 의미를 잘 밝혀 주고 있다.
우 병 훈 박사 /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본문중에
신격화 교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첫 번째로 놀란 지점은, 생각보다 이 교리가 서방 신학에서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주제였다는 사실이다. 북미와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신격화를 비롯한 동방교회 교리에 대한 연구가 비판이 아닌 화해와 일치의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교회에 신격화 교리를 어설프게나마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p. 9.

본서의 목적은 신격화 교리의 발전과 최근의 연구 동향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초대교회부터 현재까지 이 교리가 동/서방 교부들과 그들을 계승한 신학자들에 의해 지지되어 왔음을 밝히고, 이 교리가 어떻게 오늘날 교회의 삶에 공헌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천적 적용을 제공함에 있다.
그래서 교부들과 동/서방 신학자들이 어떻게 그들만의 ‘다양한’ 방법으로 이 교리를 다루었는지보다는, 그들이 이 주제에 대해 어떤 ‘공통된’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이는 데에 주력할 것이다. 공통의 기반이 실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에 더 깊은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해 볼 수 있다. p. 23.

윌리엄스가 바로 지적했듯이 동방과 서방 사이의 상이점 또는 공통점은 둘 사이의 장벽을 발생시키는 전통 안에서 생성된 엄격한 신학적 기준이 아닌 역사 가운데 그들이 직접 작성했던 문서를 기반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라틴 교부들이 헬라 교부들에 비해 신격화 관련 언어를 더 적게 사용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신격화 교리에 대한 언급을 그들의 문서에 남겨 놓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p. 97.

가장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구원에 대하여 동방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이든 서방의 법정적 선언이든, 단면적인 설명만으로는 그 깊은 의미를 다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서방의 구원 교리를 대표하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과 동방을 대표하는 ‘신격화’는 각기 구원의 다양한 측면들을 강조하여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아름다움을 보다 풍성하게 누리게 해 준다. 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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