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의 충돌-1

정성호 목사(대구서교회 부목사)

세계관의 충돌

미국의 정치학자인 새뮤얼 헌팅턴은 1996년에 ‘문명의 충돌’이라는 유명한 책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그 책의 골자는 냉전 이후의 세계가 문명에 의해 재편될 것인데, 서로 다른 문병을 가진 집단 간의 갈등이 21세기 정치에 새로운 변수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런 예측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 빌딩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지금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세계관의 충돌을 경험하고 있다.

세계관이라는 것은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영어로는 world-view 혹은 life-view라고 할 수 있다. 세계관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관점이며, 그의 삶의 전체를 포괄적으로 구성하는 내적 체계이다. 또한,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하여 일관된 해석을 제공하는 체계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관은 본인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경험에 의해서 형성되지만 그러나 경험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다. 태어나면서 경험했던 개별적인 경험과 더불어 교육으로 형성되는 관점이며,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나 종교적 체험을 통해 형성되기도 하지만, 이런 경험이 다시 근원적인 질문과 대답에 영향을 미쳐서 세계관을 수정해 나가기도 한다. 이런 반복으로 말미암아 세계관은 형성 및 수정이 되는데, 한 개인이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는 삶 전체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급격한 이슈(사고, 질병, 회심 등)를 경험하지 않으면 대부분 큰 틀에서 고착화되며 세부적인 부분에서만 수정이 이루어진다.

한국 사회의 세계관 충돌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분석할 때 문명이 충돌이 아닌 세계관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 내에서는 아직 대립되는 문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념에 근거해 형성된 다양한 세계관이 부딪히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이슈를 꼽으라면 성 평등의 문제이다. 양성평등이 아니라 성 평등이라고 한 이유는 소위 말하는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를 주장하며, 자신들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달라고 요구하며, 또한 남성과 여성을 넘어 제3의 성을 인정하기를 원한다. 이런 주장들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양성평등의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문제이며, 따라서 양성평등을 폐기하고 성 평등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특히 현 정부는 UN 인권위원회의 권고를 따라 소수자들의 인권 존중이라는 명목하에 공적인 영역까지도 양성평등, 동성애, 동성혼, 난민 등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부의 이런 정책을 찬성하고 적극적으로 시행하려고 하는 공적인 영역(과 그 혜택을 받는 사람들)과 기독교적 가치(내지는 보수적 가치)로 무장한 사람들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폭염이 이어지는 7월 22, 23일 점심시간 국가인권위 앞에서 있었던 인권위 해체, 최영애 사퇴 촉구 일인 시위 현장/ 사진제공@주요셉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세계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주장 저변에는 세계관이 있다. ‘절대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이 있고, ‘노동과 인간을 넘어 억압된 성, 환경, 여성 등 사회 전반의 해방’을 모색한 네오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이 있다. 결국, 이러한 사상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 사건들을 해석하는 하나의 기준점이 되며, 모든 일들을 그런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게 된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바른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인권’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재로 잘 포장된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서 이에 쉽게 동조하게 된다.

세계관 충돌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

세계관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는 현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선은 인간 이성의 판단과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사회의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과거 미국 대선 때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면 ‘샤이 보수(shy tory)’이다. 이 단어의 뜻은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지 않은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투표를 통해 자신의 뜻을 드러낸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샤이 그리스도인(shy Christian)’처럼 보인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반(反)성경적인 행보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우리가 투표로 결정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계속해서 반기독교적 정책들이 입안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침묵만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마르틴 니묄러 목사(Martin Niemöller; 1892.1.14~1984.3.6.)의 시가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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