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 연재 시리즈

III. 가르침

1. 하나님 나라의 윤리: 가치의 전도(顚倒)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산상설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영적 원리를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사회개혁을 위한 원리를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개혁의 원리는 오히려 영적인 가난함과 자기 비움에서 기인한다. 진정한 사회개혁이란 사회의 정의로운 개혁을 제도적으로 수행하는 자들의 정신 개혁에서 비롯된다. 마음이 가난하고 청결한 자들의 공동체에서 비로소 진정한 사회개혁은 이루어진다. 참 복의 8가지 선언은 예수의 설교를 듣는 제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그대로 알려준다. 제자들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애통하며, 미움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다(눅 6:20-23). 하나님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세상적인 기준은 뒤집힌다. 하나님의 가치 기준은 세상의 가치 기준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산상설교의 역설이다. 세속적으로 가난하고, 세상적으로 박해와 어려움 속에 있는 자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이다. 이들에게 천국의 복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종교적 능력이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베푸시는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노력의 결과로 그 하나님 날에 들어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자연적 능력(노력과 공로)을 초월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종교적 노력이나 관습의 결과로서 얻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마 19:30). 하나님의 정의와 주권으로 다스려지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경쟁이나 비교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 보상원리는 각자가 자기의 수고와 공로에 따른 몫을 주장하는 세상의 보상원리와 다른 가치의 전도(顚倒)가 야기하는 전적으로 다른 곳이다. 이 원리는 수고보다 훨씬 더 많은 보상을 해주시는 은혜의 원리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 세상의 원리와 다른 원리이다. 하나님의 가치 윤리는 인간의 공정함의 원리를 뛰어넘은 관대함과 은혜의 원리이다.

 

2. 사랑의 윤리: 율법의 성취로서의 새 계명

1)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의 내면화

예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의 윤리다. 사랑의 윤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것은 이미 모세의 율법이 가르친 것이다. 예수는 전적으로 새로운 계명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이미 모세와 선지자가 가르친 율법과 예언의 정신을 사랑의 새 계명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는 안식일 법이나 정결법 규례에서는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의 내면을 통찰하였고, 율법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바로 복음을 주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율법의 가르침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다음같이 가르치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 : 17-18).

구약의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이다. 율법의 계율에 외면적으로 강요되면 가기 싫은 오리(五里)는 가기가 어렵고, 겉옷을 달라면 주기가 어렵고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는 계명에 순종하여 미워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사랑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오리를 가라고 하면 십리(十里)를 갈 수 있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줄 수 있고,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 줄 수 있다. 사랑의 능력을 가지면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후히 빌려줄 수 있다. 사랑의 능력을 가지면 원수에 대하여도 단지 미워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원수를 사랑할 수도 있다. 예수의 사랑의 능력이 우리 마음속에 점화되면 그러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의 사랑 능력이 우리 속에 주어지면, 예수의 다음 말씀까지 이해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중생한 신자의 마음속에 성령의 은혜가 들어와 사랑의 능력이 주어지게 될 때 그는 율법의 규례를 넘어서서 성령의 인도를 쫓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율법의 준엄한 심판 때문에 두려워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즐겨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예수의 마음이 신자의 마음속에 부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은 성령으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새 사람의 성품을 가지게 된 것이다.

 

2) 성령 안에서 옛 계명의 내면적 역동화

(1) 율법 폐기 아닌 율법의 역동적 완성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은혜의 새 계명을 주신 분이지만 그 자신이 율법의 폐지나 해체를 시도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고, 세상 끝까지 율법의 일점 일획도 폐하지 않고 폐하지 않고 다 이루리라(마 5:17-18)고 말씀하셨다. 역사적 예수는 율법이 그의 오심으로 폐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되었다고 가르치신다. 그는 율법이 그가 보내실 성령 안에서 전적인 자발적 드림을 통하여 역동적으로 성취됨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진리에 관하여 가르치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b-32).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 아래 거하고 그 계명을 지킬 때 진리가 그를 자유케 한다는 진리의 역설(逆說)을 가르치신다. 율법의 완성이란 율법의 요구에 얽매어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가 인격으로 그 속에 계시게 될 때 그 사람은 자발적으로 진리를 순종하게 되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성령의 사역으로 그를 인격적으로 믿는 신자의 마음속에서 역동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전처럼 오늘날에도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우리 인간들에게 불편한 계명은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물타기 기독교인들, 좌파 기독교인들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 이슈가 그것 중 하나다. 동성애는 단지 윤리적 부덕으로 “하나의 가시”라고 보면서 교회가 이에 대해 너무 강압적으로 반대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복음주의 지도자들도 있다: “그보다 조금 덜 부자연스러운 해결은 동성애를 바울 사도가 가졌던 ‘육체의 가시’(고후 12:7)와 비슷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필자가 기도하면서 성찰한 결론에 의하면 이는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성경을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동성애는 단지 가시 정도가 아니라 가증한 짓, 죄다.

필자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성경은 명백히 동성애를 “가증하다”(תועבה, 토에바, detestable, 레 18:22)고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성적 타락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로 말미암아 유황불 심판받은 것을 교훈해주고 있다(창세기 19장). 소돔과 고모라의 동성애자들이 성적 목적으로 나그네에 접근(“상관하리라”)(야다, יךע 창 19:5)하여 동성애 폭력을 저지르려고 했던 장면을 창 19:5-7은 우리에게 보고해주고 있다. 창세기 저자는 동성애를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은 하나님의 유황 심판을 받기에 이른다. 사사기 19장에서도 베냐민 땅 기브아에서 일어난 여행객에 대하여 일어난 그 땅 주민 동성애자들의 성폭력 사건 시에 주인인 노인은 말한다: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삿 19:23). 사사기 20장은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열한 지파가 일어나 동성애 및 집단 난행(亂行) 살인 사건 범행자들이 속한 베냐민 지파를 응징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레위기는 다음같이 동성애 금기를 명하고 같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신약시대에 들어와 사도 바울은 로마 시대에 유행한 동성애 행위에 대하여 엄중히 금기하고 있다. 그는 그 시대의 동성애자들이 “부끄러운 욕심”으로 행하며 “역리로”(παρὰ φύσιν, para phusin) 여자나 남자를 성행위 대상으로 쓴다고(롬1:26) 하면서 이들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경고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고전 5:9절)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고 쓰고 있다. 여기서 탐색하는 자(말라코이, malakoi)는 동성애 성관계에서 여자 역할 하는 자, “남색하는 자”(아르세노코이타이, arsenokoitai)는 남자 역할하는 자를 가르킨다. 이렇게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신약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대한 그의 입장을 천명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예수께서는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지극히 작다 함을 받을 것이며, 지극히 작은 것 한라도 지키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다고 가르치셨다. 그리하시면서 예수는 신자의 의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낮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가르치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신구약 성경에 의하면 동성애는 결단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주셔서 그를 겸손하게 하신 “하나의 가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의학자들의 새 연구에 의하면 동성애는 유전이 아니라 성중독으로 간주된다. 1993년에 동성애 의사인 해머(D. H. Hamer)가 동성애가 유전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염색체 Xq28이 남성동성애와 관련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1999년 라이스(G. Rice)는 염색체 Xq28이 남성 동성애와 관련없다고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하였다. 2005년 해머를 포함한 연구팀이 다시 Xq28이 동성애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B. S. Mustanski a. et., "A Genomewide Scan of Male Sexual Orientation." Human Genetics 116, 2005, 272). 동성애는 유전적인 요인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과를 획득한 것이다.(길원평, “동성애의 유발요인과 보건적 문제점,” in: 김영한 외 지음, 『동성애, 21세기 문화충돌』, 킹덤북스, 2018, 506-507) 구미사회 및 한국사회에서도 많은 수많은 탈동성애자들이 재커밍아웃(recoming out)하여 동성애 성중독에서 치료받았음을 간증하고 있다.

 

(2)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율법 조문 지킴 아닌 하나님 뜻에 끊임없는 자기 복종

여기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구별해서 오늘날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는 인간의 유전과 계명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거나 왜곡하는 것이다.

예수는 당시 장로의 유전을 준행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본의를 왜곡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말씀 왜곡을 책망하셨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5절)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6절)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7절)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8절)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 7:5-9).

유대인들에게 전통(유전, 전승)이란 단어는 “구전”(oral tradition, 갈 1:14)을 가리킨다. 이는 에스라 시대 이후 성문(成文) 율법(written law)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 서기관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그 후에 그 중요성이 커져서 성문 율법과 같이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와 제자들의 행위를 문제 삼아 장로들의 유전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율법만을 준수할 것을 강요하는 이들의 위선을 지적한다. 예수는 이들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렸다고 강하게 책망하신다. 예수는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말씀하신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10절)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11절)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12절)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막 7:10-13).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고 부모에게 욕을 하는 자는 죽이라고 했는데, 이 계명에 대해 이들은 고르반(헌물)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이것이 면제 될 수 있다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너희가 전한 전통”(13절)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하나님의 말씀)과 대비시킨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명과 반대된 인간적인 기원과 전승에 근거한 유전이란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초기교회에서 유대인의 유전을 지속적으로 지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해 이를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따르고 있던 “장로들의 유전”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일상생활 속에서 지키기도 힘들었고 오히려 사람을 얽매는 족쇄가 되었다. 예수는 이러한 장로들의 종교적 유전에서 일반 대중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오늘날 동성애 이슈가 구미교회에 이어 한국교회와 사회에도 강력한 쟁점이 되고 있는 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 교회 진영에서는 이것이 오늘날의 세계적인 풍조요 구미(歐美)교회까지도 받아들였으니 우리도 받아들이자고 지지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진보교회 측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는 인간적인 전통을 만드는 것으로 동성애를 “토에바”로 규정한 신구약 전통을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이나 사람들이나 종교적 집단이 만든 전통을 따라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야 한다. 2015년 별세한 독일의 신학자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는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교회는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천명하였다. 필자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의 입장이야말로 역사적 예수의 산상설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에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도덕적 우월주의 태도를 버리고 말씀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 욕심 죽이기를 해야 한다.

동성애가 성경이 금하는 “죄”(성중독)이라고 냉정히 지적해주는 것과 동성애자들을 정죄한다거나 저들을 혐오하거니 차별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동성애를 성중독 그리고 죄라고 지적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니 그렇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자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복음주의자나 기독교인이나 그렇지 않은 자는 이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이들에 대해 소위 혐오자나 증오자의 범주에 속하는 언사나 행위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우리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거나 성다수자에 속해있다고 교만한 마음이나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자기 의를 뽐내는 위선에 자리에 서는 것임을 각성해야 한다.

예수는 오늘날 신자 된 우리들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태도를 가르치신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9절)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10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2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스스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면서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동성애 행위”도 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매주 주정 헌금과 십일조 드린다고 감사한다면 우리는 신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토색, 불의, 간음, 동성애”를 하지 않았다는 외형적인 율법 규례이행을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 속에 끊임없은 죄의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 대해서 겸허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면서 자기 죄 욕망 죽이기와 예수와 새로운 영적 연합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성경을 인용해서 동성애 관련 차별금지법의 입법 등에 반대하는 것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일처럼 아주 사소한 일이고, 오히려 교회가 긍휼과 정의를 상실하고 부패하는 것은 낙타를 삼키는 것과 같다는 주장에 대하여 필자는 예수의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다음같이 보완하고자 한다.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입법 반대에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공공선인 정의와 선행을 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율법을 성취하는 길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동성애 관련 차별금지법의 입법 등에 반대하고 저지하는 것은 성다수자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양심과 사회적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러한 반대 운동에 보완적으로 선행운동으로 신자와 교회는 사회적 소외자들, 이주민들, 탈북민들 돌봄 등 사회적 선행 아젠다를 실천하여 사회적으로 신자들 내면에서 사회를 향하여 우러나오는 긍휼과 정의를 적극적으로 펼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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