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의 충돌-2

기독교 세계관

정성호 목사(대구서교회 부목사)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성과 젠더의 문제는 각기 다른 세계관에 기인하였음을 살펴보았고 그로 말미암아 세계관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성과 젠더를 말하며, 그것을 주류의 담론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네오마르크스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더 포괄적인 관점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인권’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을 해서 세상에 내어놓았다.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자신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요, 시대적 요구에 적합한 사람들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은 다르다. 기독교 세계관은 인권에 근거하여 현대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창조-타락-구속-완성의 도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세계는 선했다. 각자의 가치는 충분했고,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세계에 충만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그 구조가 왜곡되고, 방향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원래 목적대로 세워지지 않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잘못된 방향을 다시 잡아주셨다. 왜곡된 구조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셨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다.

(출처: UBF 경희문교회 웹사이트)

이 도식에 따르면 죄로 인하여 이 세상은 왜곡되고 어그러졌으며 방향이 틀어져 있다. 그로 말미암아 바른 목적과 관계가 아닌 어그러진 목적과 관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대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갈등과 충돌은 너무나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왜곡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구속받은 백성들로, 바른 방향을 가진 자로 이 세상 속에서 삼위 하나님을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로 말미암아 회복된 것들이 세상 속에 나타나야 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체육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함으로 세상을 변혁시켜 나가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의 핵심은 ‘삼위 하나님’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회복시키시고, 완성시켜나갈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에 의해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 없는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반기독교적 성향을 띨 수밖에 없다. 결국 ‘인권’을 주장하는 자들이 말하는 ‘인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억압에서의 해방을 말하며, 성(性)의 자유를 주장하며, 기존 제도와 관점에 대한 전도(顚倒)를 말한다. 하지만 현재 나타나는 상황을 바라볼 때, 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고, 공적인 영역(정부기관, 공공기관, 학교 등)에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강제적으로 따르게 하는 또 다른 폭력을 야기하고 있으며, 이들의 행동은 반(反) 인권적임을 볼 수 있다.

 

성경적 인권

그렇다면 진정한 인권, 즉, 성경에서 말하는 ‘인권’은 무엇인가?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인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경에서는 ‘인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고, 인간의 역사에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존엄성이 있는 것이다. 이 존엄성은 하나님에 대하여, 피조세계를 대하여 가진 존엄성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 없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독립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없이 인간이 자기 권리를 주장한 사건(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사건)을 ‘죄’라고 규정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과 관계를 맺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과 제사와 법도와 규례를 허락하셨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인간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성경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하는 인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발견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존 스토트(John Stott, 1921. 4. 27.~2011. 7. 27.)는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는 책 ‘인권’ 챕터에서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 1881.10.15~1944.10.26.) 의 주장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 1881.10.15~1944.10.26.)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지 않으면 인간의 권리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면 또한 모든 사람이 그분의 자녀라면 바로 그것이 모든 사람 하나하나의 참된 가치다. 나의 가치는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가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것은 놀랄 만큼 엄청난 가치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덧붙여 말하자면 우리 각자에게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가치를 부여한다. 가장 중요한 것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위와 같은 내용을 인용한 이후에 한 가지 단서를 단다. 인권이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리가 아니며, 그 권리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 본연의 모습, 우리에게 의도하신 존재가 되는 것과 모순되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결국, 진정한 인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의 창조 의도에 맞게 이해되어야 함을 알 수 있고, 이에 근거해서 우리는 성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적 근거를 볼 때, 그들의 인권개념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세계관의 충돌이며, 범위를 조금 좁혀보자면 이데올로기의 충돌이다. 우리는 성경에 근거한 세계관을 가지고 인권을 말하며,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 없이 인권을 주장하는 그 어떤 목소리도 반대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세속적 인권개념의 덫에 빠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한 하나님 말씀 중심의 인권으로 무장하여야 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고 물었던 키르케고르(1813~1855)의 책 제목처럼, 우리도 반드시 세속적 인권개념과 성경적 인권개념 양자에서 선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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