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3명만 모여도 다수(majority)와 소수(minority)가 생긴다. 2명이 뭉치면 다수가 되고, 1명이 남으면 소수가 되는 것이다. 역사는 다수와 소수의 갈등 속에서 전개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소수는 다수에 의해서 동화되거나 흡수되거나 멸절되어 버린다. 실제로 살아남는 소수는 거의 없다. 그런데 역사상 살아남은 대표적인 소수가 둘 있다.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인이다. 이 두 그룹의 공통점은 스스로를 '거룩한 공동체'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거룩이 무엇인가?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 말 '카도쉬'는 구별되었다, 다르다는 뜻이다. 이들은 소수지만, 자신들의 특징을 세상과는 다름에서 찾았다.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식했다. 그것이 힘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파악한다. 돈이 얼마나 많은가? 무슨 차를 타나? 어떤 집에 사나? 무슨 브랜드의 옷을 입었나? 외부에서 자기 가치를 찾으니 완전 만족이 있을 리 없다. 끊임없는 불만족 속에 살아간다. 사라지지 않는 열등의식이 있다. 그래서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낀다. 항상 언젠가는 성공할 거야라는 말을 되풀이 하며 살아간다. 외부에서 자기 존재를 찾으려고 하면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다. 성취해도 성취해도 끝이 없다. 계속 목마르다. 나이 50세가 넘어서면 허무감이 밀려온다. 언제까지 이런 의미없는 싸움을 해야할 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다. 나는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자녀라는 의식이 있다. 나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외부의 변화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다. 굶어도, 고난이 와도 근본이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구별되었다는 거룩 의식이 모든 고난을 이기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온갖 고난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소명의식이 있었다. 이 구별되었다는 소명의식이 그를 모든 고난에서 이기게 만든 것이다. 구별된 소명의식이 지치지 않게 만들었다.

레위기 11장이나 신명기 14장을 보면, 구약의 음식법이 나온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나열한다. 이런 음식법을 주신 이유에 관해서 구구한 주장이 있다. 먹지 말라는 것은 먹어서 도움이 안되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콜레스테롤도 많고, 기생충도 많은 음식이라는 것이다. 또 먹지 말라는 음식은 스태미나식이라는 것이다. 성적 충동을 자극하는 인생을 살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나는 쉽게 생각한다. 그냥 먹는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한 것이다. 그래야 식사할 때도 거룩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아침은 집에서 먹는다. 그래서 문제 없다. 점심은 신경 쓰며 먹어야 한다. 음식 재료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편하다, 신경 쓰인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저녁은 불편하기에 거의 모두 집으로 와서 식사한다고 한다. 자연히 가정을 든든히 세우게 되는 것이다. 음식에 대한 거룩한 태도가 파생적인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준 것이다.

성도는 술, 담배가 불편하다. 사회 생활할 때에 불편함이 있다. 그래서 얻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저절로 성도임이 증명된다. 성도임을 알기에 전도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구별되었다는 거룩함은 불편함이 아니다. 그 안에 어떤 고난이라도 이기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 숨겨져 있다. 언제나 무너지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의식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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