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경 교수 미래교회포럼에서 발표

미래교회포럼(회장 오병욱 목사)이 주최하는 2019년 제3차 세미나가 “제4차 산업혁명의 빛과 그림자: 시민사회와 교회”라는 주제로 지난 20일 고려신학대학원 102호 강의실에서 열렸다. 권수경 교수는 “4차 산업혁명의 신학적 의미”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아래는 발표문 전문.

“4차 산업혁명의 신학적 의미”

발제: 권수경 (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피그말리온 세상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1) 키프로스 섬에 살던 조각가였는데 섬의 여자들이 신의 저주를 받아 창녀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자기는 아예 여자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다가 상아로 여인상을 하나 조각한 다음 그 조각상의 아름다움에 반해 상아로 된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기념하는 축제가 마을에서 열리자 피그말리온은 그 축제에 참가해 여신에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만든 조각이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 하고 대신 그 조각상과 꼭 닮은 아내를 구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습니다. 축제가 끝난 뒤 집에 돌아와 사랑하는 조각상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는데 조각상에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놀라서 다시 입을 맞추어 보니 단단하던 조각이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렇게 조각상은 조금씩 사람으로 변했고 소원을 이룬 피그말리온은 그 여인2)과 결혼해 딸을 하나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딸 이름이 파포스인데 성경에 나오는 구브로 섬의 도시 바보가 바로 이 딸의 이름을 딴 도시입니다.3)

피그말리온 신화는 현대 심리학에서 피그말리온 효과 (The Pygmalion Effect)라는 용어를 탄생시켰습니다.4) 내가 어떤 대상을 향해 갖는 기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대상이 일을 수행하는 결과도 그만큼 높아질 가능성이 많다는 이론입니다. 학교 교육을 비롯하여 현장에서 사실로 입증되는 매우 설득력 있는 이론입니다. 그렇지만 피그말리온 신화에는 그런 효과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성취도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전체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제는 카를로 콜로디 (Carlo Collodi, 1826-1890)의 동화 <피오키오의 모험>에도 등장하고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희곡 <피그말리온>과 그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 등에도 담겨 있습니다.

지난 6월에 한국 대법원이 중요한 판결을 하나 내렸습니다. 사람 모양을 한 실리콘 인형, 보통 ‘리얼돌 (Real Doll)’이라 부르는 상품의 수입을 제한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판결이었습니다. 리얼돌은 간단히 말해 실리콘 재질로 된, 마네킹과 비슷한 자위도구입니다. 남자 모양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자 모양의 인형입니다. 실제 사람 모양을 갖춘 데다가 입술과 가슴과 성기 부분을 강조하여 마치 여자와 성관계를 갖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의 판결로 앞으로는 그런 리얼돌을 수입해 판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이 있자마자 리얼돌의 수입을 금지해 달라는 국민청원이 청와대에 접수되어 현재 20만 명 이상이 동의를 한 상태입니다. 청원의 이유는 여성을 단순한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과 성범죄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리얼돌에 대해 찬반양론이 팽팽합니다. 그런데 한국 온라인상의 반응을 보면 수입을 막아야 된다는 주장보다는 개인의 사생활이니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훨씬 많습니다.

성(性)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원천적인 방식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의 성 관계를 통해 생겨나고 태어나 살아갑니다. 성을 나누는 부부의 관계와 그 결과 태어나는 자녀와 부모 사이의 관계는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을 이룹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랫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소 유치해 보이는 농담이지만 생각할수록 옳은 말입니다. 성이 사람됨의 시작이기 때문에 성과 관련된 윤리의 번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비롯하여 인간의 모든 윤리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성이 가벼워지면 인간관계 전반도 가벼워지겠지만 성을 통해 생겨나는 인간의 목숨 역시 가벼워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법원의 판결이나 리얼돌 관련 논쟁은 상당한 무게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런 중요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에 교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에너지를 전부 다른 영역에 써 버렸는지 아니면 리얼돌이 음란물이라 아예 관심을 끊어 버렸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조각품을 만든 다음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피노키오의 모험> 원작은 그렇지 않지만 디즈니사가 만든 만화영화 <피노키오>에서도 제페토 영감이 나무인형을 만든 다음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신화와 만화영화는 둘 다 신에게 빌어 소원을 이룬 경우입니다. 그런데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의 경우는 주인공 남자가 소녀 엘리자에게 직접 말과 교양을 가르쳐 자기가 바라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돌의 경우는 과거 신에게 빌었던 일을 이제는 사람이 직접 한다는 점에서 버나스 쇼의 희곡과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에게 언어와 교양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물건을 내 성적 욕구를 충족시킬 대상으로 바꾼다는 점에서는 고대 신화가 기묘하게 재현되고 있습니다.

리얼돌은 아직은 인형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해 전에는 여성의 외모를 한 인공지능 로봇 ‘하모니’가 태어났습니다.5) 성행위 기능이 없는데도 처음부터 별명이 섹스로봇이 되었습니다. 머지 않아 리얼돌과 합쳐질 것으로 다들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계는 육체적 쾌락뿐 아니라 인간과 정서적 교감까지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로봇공학과 인공지능 이 두 가지의 결합으로 섹스로봇은 4차산업혁명의 대표적인 산물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이 리얼돌 내지 섹스로봇이 역시 4차 산업혁명의 산물인 가상현실 (VR, Virtual Reality) 기술까지 합쳐지게 되면 인간의 성 의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성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남자들에게 성적인 욕구를 해소할 기회를 준다며 긍정적으로 보려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성의식을 왜곡시키고 여성을 성적 쾌락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 우려합니다. 성폭력이 늘고 포르노 산업이 더욱 번창할 것이라고 합니다. 아이 모양을 한 인형까지 유통되고 있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6) 4차 산업혁명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복잡하고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동반한다는 점인데 그런 점에서도 섹스로봇은 4차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보기가 되는 셈입니다.

갖가지 윤리적 문제와 부작용을 언급하지만 깊이 파 들어가면 질문은 하나로 좁혀집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가지를 더 붙인다면 “사람과 신과 자연 가운데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상아나 나무나 실리콘 같은 ‘물건’이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사람도 본디 흙이었다는 성경 내용과 통하는지 아닌지 고민해야 할 주제입니다. 피그말리온 신화의 역사를 보면 처음 신에게 빌던 것을 사람이 직접 하는 쪽으로 점점 변해갑니다. 오늘날 리얼돌을 비롯한 첨단산업을 보면 마치 사람이 신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신이 필요없는 세상이 되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인간이 무척이나 위대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신화의 피그말리온은 창녀로 사는 여자들이 싫다는 이유를 대긴 했지만 세상에 있는 여자들은 다 마다하고 굳이 내가 만든 조각과 결혼하겠다 하여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피그말리온 이야기는 배우자를 동등하게 존중하며 사는 대신 내가 만든 여자, 내 눈에 가장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를 추구하는 남성의 타락한 심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화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므로 그렇게 사람이 된 여자와 행복하게 잘 살았다 하고 끝이 납니다. 그렇지만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가상이긴 하지만 현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내가 가르치고 키워도 내 의도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신화는 오늘 우리 마음에도 주제로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주제가 현실에 적용이 될 때는 개인의 성향과 인간 집단, 그리고 크고 작은 사회의 구조 및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리얼돌은 인간보편의 피그말리온 정서가 유달리 자기를 사랑하는 포스트모던 시대, 기술이 고도로 발단한 인공지능 시대에 맞게 구현된 보기입니다.7)

 

우리 시대 혁명의 특징

오늘 포럼의 주제는 ‘4차 산업혁명’입니다. 1차 산업혁명은 기계의 발전을 통한 대량생산이 일으켰고 2차는 전기가, 3차는 컴퓨터가 일으켰다고 합니다. 지금 논의하는 4차 산업혁명은 3차의 핵심인 컴퓨터 기술이 다른 분야의 각종 발전과 결합되어 삶의 모든 영역에 변화를 일으키는 혁명으로서 이전의 1, 2, 3차와 다를 뿐 아니라 지금까지 오래 이어져 온 인간의 삶 자체를 아예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이 혁명의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핀 다음 구체적인 영역으로 들어가서 그 특징이 현장에서 어떤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4차 산업혁명은 인간과 자연과 우주 전체를 망라하는 포괄적인 혁명입니다. 산업 분야가 주도하기는 하지만 삶의 전 영역을 변화시키는 일종의 존재혁명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신과 자연 그리고 동료 인간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재검토하게 만들어 결국 인간이 무엇인지 다시금 묻게 만듭니다.

물론 1차 산업혁명도 노동 착취를 통한 인간 소외의 문제를 일으켰고 2차, 3차 산업혁명도 에너지와 효율이 높아지면서 사람이 상대적으로 무시되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4차 산업혁명은 컴퓨터 기술의 발전이 낳은 다른 분야의 발전 그러니까 학문, 기술, 산업 등의 결과물이 다시금 컴퓨터 기술과 결합되는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컴퓨터 덕분에 여러 학문 분야가 소위 첨단 학문으로 발전하여 우리는 사람과 우주에 대해 너무나 많이 또 너무나 자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지식과 그 지식을 적용한 온갖 기계와 설비는 우리가 사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사람이 도대체 무엇인지, 성(性)은 무엇이고 나이나 인종은 무슨 뜻을 갖는지, 또 자연을 앞으로도 계속 개발하고 지배할 수 있는지, 다시금 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그 결과 지금까지 그런 모든 지침들의 원천이라 믿었던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다시금 물어야 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과격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진행되어 온 사상적 변화,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는 더 빨라지고, 더 좋아지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옳다 그르다 하던 개념 자체를 뒤집어엎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존의 모든 것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아니면 적어도 의심해 보는 분위기가 정착되었습니다. 착하다, 나쁘다, 또는 옳다, 그르다 등의 용어는 사라지고 이제는 좋다, 안 좋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등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만 있던 세상에 제삼, 제사의 성이 등장하고 이성교제, 이성관계라는 보편적인 용어조차 사용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극단적인 변화의 근저에는 4차 산업혁명이 이룩한 학문적 발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전자를 비교해 보니 사람이나 동물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의 신경을 연구해 보니 사람의 의식, 정신, 자유도 결국 물질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 번째 특징은 급속하다는 점입니다. 빠릅니다. 정말 빠릅니다. 서울대 전자과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학생이 학위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지도교수 및 다른 박사과정 학생들과 콜로퀴움을 갖는데 그 논문을 지도한 지도교수가 논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논문을 쓴 학생에게 자꾸 물어보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게 벌써 30년 전의 일입니다. 조금 뒤 다시 언급하겠습니다만 유전자 연구를 전공으로 하는 한 교수는 오늘날 유전자가위 기술이 얼마나 빨리 발전하는지 전문가인 자기도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라고 합니다.8) 어쩌면 너무 빠른 속도 때문에 많은 사람이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전거보다 자동차가 빠르고 자동차보다 KTX가 더 빠릅니다만 가장 빠르다 하는 빛은 빠른지 안 빠른지 느끼지도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네 번째 특징은 앞의 세 번째와 이어져 있는 것으로서 4차 산업혁명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전의 1, 2, 3차 산업혁명은 엄청난 변화화 더불어 많은 부작용을 불러왔기 때문에 그 혁명의 긍정적인 힘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나름대로 조정 국면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서 그 다음 차의 혁명도 가능했습니다. 또 1차의 바탕에서 2차가, 2차의 바탕에서 3차가, 그리고 3차를 토대로 하여 4차가 일어났다는 연속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4차 산업혁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격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극한을 향해 달리고 있기 때문에 ‘다음’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컴퓨터의 정보 처리 능력을 바이트로 표현하는데 처음 킬로바이트로 시작된 능력이 천 배씩 늘어 메가바이트, 기가바이트를 거쳐 테라바이트가 되었습니다. 테라바이트는 킬로바이트의 십억 배의 용량인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제 1조 배인 페타바이트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도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사실 이전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많지만 이제는 그 부작용을 부작용으로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우리 삶과 가치관 자체가 달라져 버렸습니다. 상대주의 중심의 포스트모던 시대인 만큼 부작용 자체도 문화의 일부가 된 셈입니다. 이제는 조정도 가능하지 않고 따라서 다음 단계라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변화의 앞날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형국입니다. 이제는 조정을 통해 그 다음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부작용을 구분할 것도 없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전방위로 우리 삶을 뒤엎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좋지 않다는 느낌이 있을 때 혁명이 조정 국면에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 시대는 좋고 안 좋음을 판단하는 일조차 포기한 그런 시대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인간이나 자연에 대한 연구도 이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많고 기존의 지식을 뒤집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그런 일이 워낙 자주 일어나 이제는 놀랍지도 않습니다.

이런 네 가지의 특징이 하나로 모여 다섯 번째의 특징이 됩니다. 곧 사람과 자연과 우주와 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근본적인 철학적, 신학적 도전을 안겨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관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위상이 점점 높아져 이제 사람과 거의 동등한 위치가 되었습니다. 동물의 권리에 대한 요구가 점차 높아져 앞으로는 고기를 먹는 육식에 대한 반대가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유전자를 공부한 다음 동물원에 가서 침팬지를 보면 ‘너하고 나는 염색체 하나밖에 차이가 없는데 너는 그렇게 갇혀 내 구경거리가 되고 있구나’ 싶어 죄책감마저 느껴집니다. 밤하늘의 별이 아름답게 느껴질수록 그 아래 서 있는 자신의 존재는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이 모든 변화가 우리에게 성경적, 신학적 성찰을 요구합니다. 이런 변화는 신앙의 유무를 떠나 사람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므로 우리 시대의 이 혁명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철학적 문제도 함께 제기하고 있습니다. 인식의 문제와 더불어 근본적인 윤리적, 실천적 적용까지 동반합니다.

 

기술의 발달

4차 산업혁명이 제기하는 신학적 문제 가운데 우선 외적으로 두드러지는 부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이전에 사람이 하던 일을 이제는 기계가 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물론 컴퓨터입니다. 현재의 학문이나 기술 분야 가운데 컴퓨터 없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병원에서도 공장에서도 심지어 오락실에서도 컴퓨터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 자체보다 그 컴퓨터 기술을 적용한 다른 기술이 발달하면서 전에는 사람이 하던 일을 이제는 기계가 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기계기술의 발달로 힘든 일을 기계가 대신 하면서 인간이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만 기계기술이 컴퓨터 기술과 결합되면서 이제 힘들지 않은 일마저 기계가 다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천하의 근본이라는 농업을 보면 손으로 하던 일을 호미나 괭이 같은 도구를 이용해 하다가 기계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앙기나 탈곡기 등 기계가 하는 일이 점점 많아져 왔습니다. 그런 기술의 꽃이 파종부터 수확까지 맡아 하는 콤바인(combine)이라는 기계인데 이 기계에 자율주행 시스템이 장착되면 아마 미국 중부의 드넓은 옥수수밭이나 콩밭에서 아예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마트의 계산대, 고속도로 요금소, 은행 창구 등 많은 직종의 사람들이 기계에 직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만 결국은 기계가 그 자리를 다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자동화 시스템을 갖추면 정말 편리하고 또 효율적입니다. 이미 자본주의가 장악하고 있는 세상에서 기계가 값싸게 또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비싼 임금을 주고 사람에게 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계가 사람 자리를 하나씩 둘씩 차지하면서 이제는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져도 먹고사는 문제, 생활하는 문제는 다 해결이 됩니다. 기계가 일을 더 잘 하기 때문에 재화의 양과 질은 이전보다 훨씬 풍요해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간다면 미래학자들의 예견처럼 어쩌면 앞으로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고 평생 정부에서 주는 월급 받아서 오락이나 문화를 즐기게 될 지도 모릅니다.9) 말하자면 출근은 하지 않고 평생 동안 휴가만 즐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일은 하지 않고 평생 놀기만 한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싶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의 존재이유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일을 시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상을 맡아 관리하는 일이었고10) 아담의 경우에는 에덴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일이었습니다.11) 인간이 죄로 타락한 이후에도 사람은 비록 이마에 땀을 흘려야 했지만 노동을 통해 사람의 본분을 지켜왔습니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 하신 말씀12)처럼 노동은 사람이 먹을 이유 곧 사람으로 생존하고 생활할 이유였습니다. 노동 없는 인간은 의미 없는 존재, 살아갈 이유가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4차 산업혁명은 지금까지 인간의 능력에 대해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한편으로는 위대하고 한편으로는 초라합니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인공지능 바둑기사인 알파고가 인간과의 바둑 대결에서 이겼습니다. 세계 최고이던 한국의 이세돌 기사는 알파고에게 한 번 이기고 나머지는 다 졌는데 그 한 번의 승리가 어쩌면 인간이 기계를 이긴 유일한 경기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이 컴퓨터를 이길 수 있었느냐며 이 한 번의 승리를 놀라워할 것입니다.

원래 사람과 기계는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 일자리를 기계에게 빼앗기고 나니 비교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을 잘하는 기계를 바라보며 자신은 ‘기계보다 못한 인간’ 내지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인간의 본성과 자연질서에 담겨 있습니다. 동양에서 ‘무항산이면 무항심’13)이라 가르쳐 온 것 역시 자연의 빛 아래에서 노동과 사람됨의 깊은 관련성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인 이상 인간과 노동의 분리가 주는 이 괴리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혹 내가 그 기계를 통제, 관리하는 일을 맡는다면 더 큰 보람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기술이 발달하는 속도를 보면 기계를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인원은 극소수로 제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인식은 낮아지고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기계 때문에 인간이 열등감과 소외감을 느끼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기계와 노동, 기계와 인간성의 문제는 1차 산업혁명 때부터 있었습니다. 그 때는 노동자가 생산한 재화를 자본가가 착취함으로써 노동자에게는 노동의 소외와 그로 인한 인간성의 소외가 일어났습니다. 이 부작용에서도 사람들은 노동과 인간의 깊은 관련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는 빼앗긴 생산품을 되찾아오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공산혁명 같은 운동으로 이어졌을 뿐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파고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노동의 산물이 아닌 노동 그 자체를 빼앗겼기 때문에 노동과 무관한 인간의 존재의미를 처음부터 다시 천착해야 하는 상황이 된것입니다.

인간의 존재의미는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람 이외의 동물과 식물은 사람이 볼 때 그냥 놀기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과 가까운 개도 늘 놀기만 하니까 개팔자 상팔자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저 같이 어울려 똑같이 놀기만 하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고 또 인간만이 갖는 존엄성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세상이라면 사람에게 피조물 관리를 맡기신 하나님의 명령이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그 명령을 담고 있는 성경 자체의 권위에 대한 의문도 제기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명령을 주셨다 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곧장 이어질 것입니다.

백 년 이상 사람이 직접 해 오던 운전도 머지 않아 기계가 맡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벌게 된 그 시간에 사람은 무엇을 할까 궁금해합니다. 과거 전기밥솥이나 세탁기 덕분에 생긴 여유 시간에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평생 오락만 즐기는 인생은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펴 보아도 자연과 어울려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성경과 경험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는 세상도 언뜻 보면 낭만적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직 노동을 주업으로 하는 우리가 볼 때 그럴 뿐입니다. 열심히 일한 다음의 쉼, 그러니까 일상과 어우러진 축제일 때 즐거움도 낭만도 있습니다. 일 없는 쉼, 일상 없는 축제는 쉽게 말해 인간의 존재의미 자체를 허물어뜨리는 무서운 양태입니다. 머지 않은 장래 우리가 만나게 될 모습입니다. 일하지 않는 인간, 할 일조차 없는 인간은 어쩌면 왜 사는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런 질문조차 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우주와 지구의 역사

4차 산업혁명은 전방위의 혁명입니다. 실제 현장에서 사용되는 기술도 인간의 존재의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보다 위험한 도전은 인간의 삶의 기초를 이루는 여러 원리에 대한 연구입니다. 컴퓨터를 비롯한 첨단 기술의 발전은 안으로는 인간에 대해 또 밖으로는 우주에 대해 깊이 관찰하고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룬 발전도 놀랍지만 앞으로 어떤 발전이 더 이루어질 것인지 생각할 때는 기대보다 두려움이 앞섭니다. 이 모든 결과가 지금 논의하는 4차 산업혁명의 중심을 이룹니다.

망원경 기술의 발전이나 빛에 대한 연구의 결과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우주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공간적으로는 관찰 가능한 우주의 폭이 930억 광년이나 되는 광대한 크기임이 밝혀졌습니다. 다윗이 맨눈으로 3천 개의 별을 본 반면 오늘 우리는 천억 내지 일조 개의 별을 가진 은하가 우주에 천억 내지 일조 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윗보다 수천 억 배나 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전에 하나님이 우주를 왜 이렇게 크게 만드셨는지 의문부터 생깁니다.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이 광대한 우주에서 한 톨 먼지조차 되지 않는데 이 지구에서 먼지 한 점밖에 못 되는 우리 인간이 어떤 점에서 특별한지 답을 얻기가 참 어렵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철학자 니체는 광대한 우주에서 인간의 존재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일찍이 강조한 철학자이기도 합니다.14)

시간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가 140억 년 전에 빅뱅이라는 대폭발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오늘날 과학계의 정설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장구한 세월 가운데 인간이 존재한 기간은 지극히 짧습니다. 우주의 역사를 1년 365일에 비긴다면 지구가 생겨난 것은 9월 6일쯤 되고 이 지구상에 초기 인류가 등장한 것은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오후 2시나 되어서입니다.15) 물론 우주의 역사가 수천 년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람도 아직 많긴 합니다만 일반 과학계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설 자리가 아예 없습니다. 길이도 길이지만 의미가 더 문제입니다. 공룡은 왜 나타났다가 사라졌을까요? 화석 자료에 따르면 공룡은 2억 년 이상 지구를 지배하다가 6천만 년 전 갑자기 멸종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그저 몇천 만 년 뒤에 아이들 장난감이나 하라고 그토록 거대한 동물을 그렇게 많이 만드셨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전통적으로는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생각의 주체가 우리 인간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도 인간을 우주라는 공간, 역사라는 시간의 중심에 두고 있고 동서양의 다른 종교도 언제나 사람이 중심이었습니다. 인간만이 이성을 갖고 자유와 책임이 있고 삼강오륜을 지킬 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 중심의 관점이 이제는 힘을 잃고 있습니다. 인간은 중심에서 밀려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 구석자리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인간에 눌렸던 동물이 점점 높아지고 있고 인간 아닌 자연 전체가 점점 위상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가장 위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가장 아래에는 피조물이 있고 그 중간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물 통치의 사명을 받은 인간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그 관점이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빅뱅 이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 과학자, 철학자들이 은근히 좋아했습니다. 일반 학계가 우주의 시작을 인정함으로써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다고 주장하던 무신론자들의 코가 납작해졌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빅뱅을 빛을 창조하신 순간과 같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16) 그렇지만 과학은 빅뱅을 모르던 시절이나 빅뱅을 주장하는 지금이나 똑같이 창조주의 존재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주에 대한 지식이 많이 는 지금 그 많은 것을 알아낸 인간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토록 광대하고 오랜 우주 가운데 인간은 무엇인지 의문이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공학의 발전

컴퓨터 기술이 일반 학문에 접목되어 눈부신 성과를 보인 또 하나의 분야가 유전학입니다. 유전학은 단순히 관찰하고 실험하는 단계를 넘어 변화를 주고 새로운 것까지 만들어내는 유전공학까지 포함하고 있어 4차 산업혁명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인간의 몸에 인간의 유전적 특성을 결정하는 어떤 요소가 있다는 막연한 추측이 19세기 멘델의 실험으로 확인되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는 그 요인이 바로 디엔에이 (DNA)라는 사실이 밝혀지더니 얼마지 않아 그 디엔에이의 자세한 구조까지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21세기 초반에는 그 디엔에이가 모여 이루고 있는 인간 유전자의 전체 모양, 곧 게놈지도까지 완벽하게 그렸고 그것을 동물이나 다른 유기체의 게놈과 비교하는 단계까지 도달했습니다. 유전학은 정말 4차 산업혁명의 꽃입니다. 컴퓨터 기술이 없었더라면 수십억에 이르는 유전자를 분석하기는커녕 읽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유전학의 발전은 철학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결과를 낳았습니다. 가장 먼저 진화론을 확고한 과학으로 정립시켰습니다. 진화론은 간단히 말하면 생명체가 수억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조금씩 발전해 왔고 모든 유기체가 결국은 공통의 조상을 갖는다는 이론입니다. 전에는 화석을 찾아내고 그것들의 연대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진화론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는데 유전학이 발달하면서 지금까지 만들어 온 진화론의 뼈대가 맞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 것입니다. 유전학의 뒷받침이 확인되면서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진화론을 수용하는 사람이 하나씩 둘씩 생겨나게 되었고17) 유신진화론 또는 진화적 창조론이 등장하면서 성경의 해석 문제나 인간의 존엄성 문제 등 신학적 논쟁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논쟁은 아마도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오래 지속될 논쟁입니다.

진화론 문제는 여기서 길게 다루기 어렵습니다. 인간과 관련된 것만 간단하게 소개하면 유인원에서 사람으로 진화가 되었다는 주장은 인간이 처음 순수한 상태로 창조되었다가 범죄로 타락하였고 그런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기독교 복음의 기본 구도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또 진화론 구도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독특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맹목적인 진화의 과정과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도 안고 있습니다.18)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 역시 자연계시의 바탕에서 가져 오던 사람의 독특성이나 유일성에 대한 관점의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컴퓨터 기술이 유전학을 낳았고 유전학은 성경적 가치관 및 인간의 보편적 인식을 바꾸려 하고 있으므로 4차 산업혁명은 어느 영역을 파든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만나게 됩니다.

일반계시의 영역에서도 철학적 도전이 있습니다. 우주에서 인간이 갖는 위치에 대한 논의입니다.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 및 식물과 공통 조상을 갖는다는 것이 사실로 판명되면 지금껏 인간만이 누리던 지위가 흔들릴 것입니다. 단순하던 생물에서 복잡한 생물로 진화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이 점전적이라면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는 질적인 차이가 아닌 양적인 차이로 그칠 것입니다. 동물보다 두뇌가 조금 더 크다, 지능지수가 더 높다, 다른 동물보다 조금 더 진화되었다, 도구를 더 잘 사용한다는 정도의 차이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게 됩니다. 7백만 년 전 인간과 공통 조상을 가졌다는 침팬지는 염색체의 구조나 배열이 인간과 매우 닯았습니다. 지금까지 사람과 동물 사이의 차이에 비중을 두었다면 앞으로는 사람과 동물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둘 사이의 유사성, 유대감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런 학문적 성과는 동물의 권익을 보호하고 동물을 인간의 벗으로 대우하자는 시대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삭막해진 세상에서 인간에게 배신 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 동물을 벗으로 삼아 위로를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교인들 가운데도 애완동물 내지 반려동물을 기르는 가정이 많고 가정에서 동물의 위상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변화는 동물의 복지 및 구원 문제 같은 신학적인 설명을 요구할 뿐 아니라 동물이 아프거나 죽을 경우 목회 현장에서 도전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온 인류가 채식을 강요당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습니다.

유전학의 연구 결과를 실제 생활에 활용하려는 학문이 유전공학입니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생산량을 늘이거나 새로운 종자를 만들고자 하는 이 학문은 유전학이 안고 있는 철학적 신학적 문제 외에 또다른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유전공학은 식물의 경우 대량수확이 가능한 종자나 질병에 강한 종자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유전자의 일부를 가위로 잘라내고 그 자리에 다른 요전자를 집어넣기도 하는 기술을 사용하는데 2011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 (CRISPR gene editing)의 개발로 눈부신 발전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결과만 볼 때는 가난한 나라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등 긍정적인 요소가 참 많습니다. 우리도 이미 유전공학에서 만들어 낸 유전자 변형 생물 (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을 어느 정도 먹고 있는데 이 식품이 장기적으로 인체에 무해한지 아직도 논란입니다. 또 당장은 농약 사용을 줄여 환경을 보호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 더 강한 해충이 등장하면 더 심각한 환경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도 있습니다.

이 기술은 동물에게도 사용됩니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말라리아 모기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말라리아를 못 옮기게 만든 것으로서 지금 아프리카 세 나라에서 이 모기를 퍼뜨려 실험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활발합니다. 이 기술로 HIV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후천성면역결핍증을 치료하는 방법도 개발했습니다만 감염된 세포를 일일이 찾아내어 조작해야 하므로 사실상 적용에는 큰 한계가 있습니다.20) 그런데 혈우병이나 낭포성 섬유증처럼 유전을 통해 전해지는 질병의 경우는 수정란 상태나 수정 초기에 유전자 조작을 하면 질병을 막고 건강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치료법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실험을 거쳐야 하는데 초보 단계에서는 동물 수정란을 사용할 수 있지만 최종 단계에 가서는 실제 사람의 수정란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험이 끝난 다음에는 그 수정란을 폐기하게 되는데 많은 사람이 수정란을 생명의 시작으로 보므로 엄밀히 말하면 유전자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살인을 저지른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2015년 중국에서 실제 사람의 수정란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가위 실험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많은 나라에서 사람의 수정란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을 허가해 주고 있습니다. 실험은 물론 정부 허가와 무관하게 세계 곳곳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 나라는 황우석 사건 이후 법이 엄격해져 지금도 수정란을 사용하는 실험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유전자가위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 기독인 교수는 우리도 얼른 배아논쟁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21)

유전자가위 기술에는 배아논쟁 외에도 수많은 논쟁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는 반대가 없겠지만 굳이 질병이라 하기 어려운 특성을 제거하거나 강화시킬 경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가치관의 상대화가 주도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욱 논란이 될 문제입니다. 이런 논쟁이 우생학과 결합되면 인종간의 우열의식과 갈등이 재현될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조작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만약 옳을 경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처음 부정적이던 성형수술이 오늘날 널리 확산된 것을 보면 유전자가위 기술이 보편화될 경우 신체적인 조건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소박한 희망에서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구현될지 예측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의 영역으로 생각하던 생명의 발생 부분에 사람이 끼어들게 되면 결국 사람의 실수로 뜻밖의 불행한 사태가 얼마든지 올 수 있습니다. 또 이 모든 일의 배경에는 돈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실험이 돈을 버는 사업과 연결이 될 경우 인간 존엄성의 상실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유전자 변형 식물은 이미 시장의 한 멤버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자본이 유전자가위 실험을 후원하고 있고 그렇게 개발된 기술은 더 많은 돈을 버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큽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인간을 조작하고 변형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다시 한 번 돈보다 못한 존재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생명공학 역시 기계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위대함과 초라함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신경과학과 인간

두뇌과학은 또 다른 차원에서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두뇌과학은 쉽게 말해 의식, 이성, 양심, 자유 등 인간의 정신현상을 그 현상을 관장하는 두뇌의 신경을 바탕으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정신은 물질의 활동이라는 유물론적 전제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고 그 작업을 실제로 정신질환 치료 등 많은 분야에서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뇌과학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은 경우 유물론자가 됩니다.22) 하나님을 믿는 유물론자라는 기묘한 존재인데, 진화론이 힘을 얻으면서 이런 유물론도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신과 물질의 관계는 예로부터 신비 가운데서도 신비였고 근대 이후로는 데카르트가 그 문제를 깊이 연구한 이래로 오늘까지 논란이 되는 영역입니다. 인간의 정신과 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을 해 보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이론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대표적인 이론이 브라운 대학교 철학과의 김재권 (Jaegwon Kim) 교수가 주도한 수반 (隨伴, supervenience) 이론입니다.23) 정신은 몸에 수반한다는 명제로 표현되는데 ‘정신의 어떤 변화는 몸의 어떤 변화를 반드시 내포한다’ 또는 ‘몸의 어떤 변화는 반드시 정신의 어떤 변화를 초래한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내포한다는 개념에 대해서는 유물론자들과 이원론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습니다.

정신은 창발 (創發, emergence)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역시 진화론 구도와 이어진 것인데 무기물만 있던 우주에 유기물 곧 생명이라는 현상이 생긴 것이 창발의 한 보기입니다. 생명 현상은 상위 개념이지만 무기물 곧 그 생명을 유지하는 물질의 여러 현상에 수반합니다. 그렇지만 생명현상은 상위 개념으로서 하위 개념인 물질들만의 종합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성질을 갖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을 창발이라 부르는데 기체 상태이던 수소 분자 두 개와 산소 분자 하나가 만나 액체인 물 분자를 이루는 것도 창발입니다. 새롭게 생성된 물은 수소와 산소가 갖던 것과 전혀 다른 특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수소와 산소의 작용에 수반합니다. 반대로 또 상위 개념은 하위 개념에 영향을 미치지만 하위 개념끼리 주고받는 인과관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그렇게 설명하는데 그리스도인 학자들 가운데는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합니다.24)

하지만 오늘 대부분의 두뇌과학자들은 정신 또는 의식은 신경 활동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뿐 정신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환원주의(reductionism)가 주도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경우 철학적 문제, 신학적 문제가 함께 제기됩니다. 철학적으로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의식과 생각이 전부 신경활동의 반영이라면 인간의 의식 역시 자연주의적 인과론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그 경우 인간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의지까지도 어떤 원인에 대한 결과일 것이므로 결국은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기 어럽게 됩니다.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묻기 어려워집니다. 근세 들어 인과론의 보편성이 확산될 때 칸트 같은 철학자가 인간의 존엄성을 자유와 책임에 두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수백 년 동안의 그 노력이 끝내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셈입니다.

두뇌과학은 철학적 문제와 더불어 신학적 문제도 제기합니다. 만약 인간의 정신활동이 신경작용의 반영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을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한 말씀25)의 진리성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믿는 행위의 독특함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의 하나 인간의 의식이 신경활동의 반영에 불과하다면 신앙의 고백 또한 신경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특정 신경을 조작함으로써 그런 고백을 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믿음의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그 믿음을 고백하는 나, 예수를 생각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 예수를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한 나의 의지마저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물론 이 정도 단계에 가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컴퓨터 기술을 이용한 인간 신경계의 탐구가 발빠르게 진전되면서 이런 날도 대비해야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신경과학이 제기하는 인간의 본질 문제는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의 문제와도 이어져 있습니다. 인공지능도 4차 산업혁명의 총아입니다. 기계기술과 결합되어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사람의 일자리를 거의 접수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아직은 지식 하나로 구성된 인공 ‘지능’의 단계지만 과학자들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생각하고 이성적인 판단가지 할 수 있는 단계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감정적인 요소를 가진 인공지능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리얼돌이나 섹스로봇도 조만간 인간과 정서적 교감을 나눌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정서는 곧장 의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정의를 고루 갖추게 되면 사람처럼 도덕의식이나 미적 감각까지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기술의 최고봉이 바로 고대 신화가 꿈꾼 피그말리온입니다.

만약 인공지능이 그 정도 단계에 이르게 된다면 인간의 생각, 의식, 이성, 영혼 등을 신체와 독립된 존재로 여겼던 전통 입장이 완전히 사라지고 유물론적 일원론이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단계까지는 아직 요원하지만 현재의 속도로 볼 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숙제로 안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창조해 낸 그런 인간은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 어떤 초인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존재도 사람이 계속 다스리게 될지 아니면 인간이 그 존재의 지배를 받게 될지는 아직 예측하기 이른 것 같습니다.

 

4차 산업혁명과 교회

엄청난 변화가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행동도 생활도 바뀌고 있지만 그것들과 함께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급속히 변하고 있습니다. 그냥 찻잔 속의 태풍이라면 괜찮겠는데 바람에 강해 찻잔이 넘어지고 차가 쏟아집니다. 4차 산업혁명이 일으키고 있는 변화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에 대해 자연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너무나 근본적인 변화를 너무나 급속하게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지금 어떻습니까? 지금 미래포험이 계속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포럼 외에 다른 움직임이 많지 않아 두렵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터요 기둥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불러 들여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전해야 할 구원의 집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서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자연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 복음에 대해 거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 공격의 효과는 우리 자녀들에게 나타나 자연과학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핵심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젊은이들이 과학에 설득당하거나 속아서 교회를 떠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을 모르고 과학을 폄훼하고 과학과 담을 쌓은 교회 때문에 떠난다고 봅니다. 성경과 과학이 다를 때 믿음의 자녀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과학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대하는 과학의 태도와 과학을 대하는 성경의 태도를 비교한 다음 어느 쪽이 저 진지하고, 더 진실하고, 삶을 더 의미있게 보는지 판단하고 교회를 떠난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의 빛으로 세우셨습니다. 세상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의 존재의미와 자연의 의미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믿는 우리는 그런 결말이 무엇일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렇게 멸망으로 달려가는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조금 심하게 말해 교회는 지금 꽉 막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얼 생각하는지, 무얼 읽고 보고 배우는지, 무얼 연구하고 무얼 고민하는지 별로 관심조차 쓰지 않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동성애 반대나 낙태 반대 같은 중요한 사안에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도 그에 못지 않은, 어쩌면 그보다 더한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세상은 프로로 변하고 있는데 교회는 아마추어 수준의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전학을 연구하는 연세대학교의 송기원 교수는 “종교계는 생명과학의 발전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변화의 내용과 속도를 불감한 채 마치 중세와 비슷하게 여전히 과학과의 담쌓기가 종교를 지켜줄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26) ‘종교계’라는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했지만 중세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냥 교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송 교수가 교회를 향한 안타까움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도들이 바로 알고 바로 살기 위해서는 말씀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적 세계관을 갖추고 거기 맞는 생각과 언어와 삶을 구현하여 세상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그러자면 교회에서 훈련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훈련을 하자면 목사가 먼저 교사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목사를 기르는 신학교가 성경, 신학, 교회사, 선교, 목회 등의 영역과 함께 세상에 대해, 세상을 보는 성경적 관점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커리큘럼이나 현실을 볼 때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성경과 신학만으로도 한가득인데 세상의 다양한 학문과 문화까지 언제 제대로 배우겠습니까?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한 것은 연구소라고 봅니다. 이름만 가진 연구소로는 안 됩니다. 자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파트 타임으로 모이는 연구소로도 안 됩니다. 전문가조차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로 빨리 변하는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분석하고 올바른 성경적 원리를 만들고 가르치려면 전적으로 이 연구에 매달리는 그런 기관이 필요합니다. 그런 기관이 연구한 것을 토대로 신학교에서 목사후보생을 훈련시킬 수 있을 것이고 또 교회를 통해 일반 교인들도 교육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각 영역에서 전문가로 활동하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은데 제대로 된 연구소가 설립된다면 그런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일종의 기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현안이 쌓여 있습니다. 나라의 경제정책, 정치참여의 문제, 대북관계, 대일관계, 동성애 같은 사회의 윤리적 변화, 섹스로봇의 문제, 진화론을 비롯한 기초과학, 생명과학, 인공지능 문제 등등 끝이 없습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 가운데 교회는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생각들은 많은데 들어보면 중구난방입니다. 세상은 이미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행하여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데 교회는 한참 뒤에서 뒷짐만 진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교회가 사회를 모르거나 사회와 담을 쌓고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교회로 불러 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교회에 속한 성도들 역시 사회에도 함께 속해 있으므로 사회를 바로 알아 그리스도의 주권에 굴복시키는 일은 교회의 궁극적인 사명인 전도와 떼놓을 수 없는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미주

1) 로마 신화를 모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메타모르포시스, Metamorphosis)> 10권 243-297행에 자세하게 수록됨.

2) 고대 문헌에는 여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흔히들 알고 있는 갈라테아라는 이름은 18세기에 장자크 루소의 책 <피그말리온(Pygmalion)>에 처음 등장한 이후 확산되었다. (Wikipedia, “Galatea”)

3) 사도행전 13:6, 13. 영어이름은 Paphos.

4) Harvard 대학의 R. Rosenthal과 L. Jacobson 교수 팀이 1964년의 실험에 근거해 만든 개념.

5) 사이언스타임즈 2017년 7월 6일자 보도 내용.

6) 사이언스타임즈 같은 기사 내용.

7) 디모데후서 3:1은 ‘자기 사랑’을 말세의 첫 특징으로 언급한다. 이와 관련하여 휴대폰이나 SNS 등도 4차 산업혁명의 중요한 영역이지만 신학적 의미 도출이 쉽지 않아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8) 송기원 엮음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 (서울: 동아시아, 2017), 6.

9) 2019년 6월 고신선교포럼 때 신경규 교수가 발제한 내용.

10) 창세기 1:26-28.

11) 창세기 2:15.

12) 데살로니가후서 3:10.

13) 한자: 無恒産無恒心 출전: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편 상(上)

14) 니체의 글 “도덕 외적인 뜻으로 본 참과 거짓” (Über Wahrheit und Lüge im aussermoralischen Sinne)” (1873) 첫 단락.

15) 자료: ScienceABC.com. 우주의 역사를 1년으로 환산해 본 것은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 Carl Sagan (1934-1996)의 아이디어다.

16) 김기석 <신학자의 과학 산책>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8), 154-8.

17) 2019년 IVP가 출간한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가 좋은 보기. 영어원본은 2016년 출간.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 풀러신학교 총장을 지낸 리처드 마우, 철학자 제임스 스미스 등 25명의 복음주의 학자들이 자신이 진화론을 수용하게 된 계기를 간증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18) 제임스 스미스 & 윌리엄 캐버노 편집 <인간의 타락과 진화> (새물결플러스, 2019). 영어원서 (Evolution and the Fall)는 2017년 출간. 진화론이 말하는 주장, 이를테면 약 8천 내지 1만 명의 유인원이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원죄 교리나 창세기 기록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겠는지 논의하는 책. 이에 반해 웨인 그루덤 등 편집 <유신 진화론 비판>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9)은 전통 기독교 입장에서 유신진화론을 비판하는 책. 원서 (Theistic Evolution)는 2017년 출간.

19) 송기원 엮음,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 102-103. Ike Swetlitz, "For the first time, researchers will release genetically engineered mosquitoes in Africa" STAT 2018년 9월 5일자 기사. 자료 출처: https://www.statnews.com/2018/09/05/release-genetically-engineered-mosquitoes-africa/

20) 송기원 엮음,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 109-110

21) 손화철 “유전자가위기술, 배아논쟁을 넘어야 한다” 기윤실 좋은나무, 2018년 8월 24일.

22) J. P. Moreland "How Theistic Evolution Kicks Christianity Out of Plausibility Structure and Robs Christianity of Confidence that the Bible Is a Source of Knowledge" in J. P. Moreland ed al ed., Theistic Evolution (Grand Rapids, MI: Crossway, 2017) 653.

23) McLaughlin, Brian and Bennett, Karen, "Supervenience",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8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18/entries/supervenience/>.

24) 풀러 신학교의 낸시 머피가 대표적. Jonathan Loose "Nancey Murphy" in Dictionary of Christainity and Science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7), 457.

25) 로마서 10:10.

26) 송기원 엮음,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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