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트루먼의 『진보 보수 기독교인』의 관점으로 해석한 조국 후보자의 문제

정성호 목사(대구서교회 부목사)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 이후에 시간이 꽤 지나갔다. 그동안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하여 조 후보자가 해명을 하기도 했고, 그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 각각 해명하기도 했다. 반대로 사모펀드 문제의 중심에 있던 대표, 조 후보자의 5촌이 해외로 도피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검찰이 수사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는 기사도 나오고, 서울대, 고려대, 부산대에서는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촛불집회의 주최 측의 배후에 대하여 보수정당과 관련이 있다는 여러 의혹도 기사로 전해지고 있으며, 또 일각에서는 조 후보자의 문제가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며 우매한 국민들이 감정적으로 매도하고 있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이외에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는 조국 지지자들이 ‘조국 힘내세요’, ‘가짜뉴스 아웃’, ‘한국언론 사망’, ‘정치검찰 아웃’, ‘보고싶다 청문회’ 등 키워드를 검색어 상위권에 올려놓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본 기고문에서는 조 후보자의 상황에 대한 내용 보다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좌파에 대한 사상적 흐름(좌파의 출현과 발전)을 살펴봄으로 현시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진보와 보수, 양자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조심스럽게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좌파의 출현

원래 정치적인 보수와 진보를 나타내는 단어는 ‘우익’과 ‘좌익’이다. 그리고 동일한 경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여 파(派)가 이루어진 것을 ‘우파’ 또는 ‘좌파’라고 부른다. 본 기고문에서는 논의의 편의상 ‘우익’과 ‘우파’를 동일한 개념으로, ‘좌익’과 ‘좌파’를 동일한 개념으로 전제를 하고 주장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글의 말미에 등장하는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 또한 ‘우파’와 ‘좌파’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할 것이다.

먼저 우파와 좌파의 기원은 프랑스 대혁명이다. 그때 열리게 된 국민의회에서 유래했다. 이 회의장의 왼쪽에는 왕정을 무너뜨리며 프랑스를 시민 중심으로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회의장의 오른쪽에는 왕정체제는 유지하되 문제 되는 부분을 개혁해 나감으로써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에서부터 급진적이며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좌파’, 점진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우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사회적 약자의 정치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모습으로서의 ‘좌파’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될 때, 도시에는 많은 문제들이 생겼다. 빈민가가 늘고, 아동의 노동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사회적인 약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들로서 ‘좌파’ 정치인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좌파’ 정치인들의 출발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하지만 ‘좌파’ 정치인들 또한 노동자 계급, 사회적 약자의 계급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중산층 이상의 계급에서 출현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좌파의 발전과 변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좌파의 역사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년~1883년)를 통하여 더욱 힘을 얻게 되고 발전하였다. 마르크스는 헤겔(G.W.F. Hegel, 1770년~1831년)의 변증법적 철학에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 마르크스가 보는 역사의 발달은 농업 중심의 봉건제에서부터 자본가 계급이 다스리는 시대를 거쳐, 미래의 유토피아, 곧 노동자들이 자기가 수고한 결과를 온전히 얻을 수 있고 그것을 직접 통제하는 이상향의 세계로 발전할 것이라고 바라보았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으로 ‘투쟁’과 ‘혁명’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의해서 ‘압제’를 당하고 있으며, ‘압제’를 당하고 있던 사람들이 ‘압제’에 ‘투쟁’을 하며, 스스로 힘을 모아 마침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혁명을 통하여 노동자 계층이 중산층을 권력에서 밀어낼 것을 기대했다. 이는 유토피아를 향해 발전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의 이런 주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사회에 큰 호응을 얻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경제적으로는 공산주의가 인기를 얻게 되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수정된 형태의 마르크스주의가 대유행하게 되었다. 이런 모습은 1922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성립으로 완벽한 정치적 형태를 가지게 되었으며, 1, 2차 세계대전, 6·25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자유민주주의와의 대결 구도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동·서독이 하나가 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마르크스 이론에 근거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체제는 틀린 이론이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도 계속 발전하고 변화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압제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상당수의 좌파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의 식민지들 안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새로운 해방 개념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민족성’이다. 좌파들은 ‘민족성’을 도구로 사용하여 해방운동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좌파들은 프로이드와의 제휴를 통해 ‘압제’의 개념을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의미에서부터 ‘심리학적 맥락’으로 바꾸어버렸다. 심리적으로 변한 ‘압제’는 점차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보다 중산층 좌파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되고, 그것이 인종차별주의, 동성애, 낙태와 같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들은 보다 안정적이고 수준이 높은 지원군들을 얻게 되었고, 점차 정치 세력화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했다.

결국, 좌파의 관심이 가난, 기근, 질병, 경제, 인간소외 등과 같은 물질적이고 경험적인 문제에서, 심리학적 범주로 옮겨가게 되자 ‘억압’의 정의가 애매해져 버렸고, 그 결과 좌파들의 주장은 하나의 정치 논리가 되어버렸다. 좌파 진영에서 ‘억압’이라고 선언하는 그 순간 그것이 진짜 ‘억압’으로 인식이 되는 것이다. 칼 트루먼(1967년 ~ 현재, 전(前)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역사학 교수, 현 그로브시티 칼리지 교수)이 잘 지적한 대로, “좌파는 대체로 아주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 의로운 척하며 수사적으로 선언하는 운동이 되어버렸다.”

 

좌파의 모순

좌파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세계와 현실의 모습은 괴리가 있었다. 좌파들은 마르크스주의로 인하여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면, 노동자 계층이 중산층을 밀어내고 권력을 획득하여 사회적 정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현실은 달랐다. 노동자 계층이 권력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인원이 절대 권력을 획득했다. 노동자 계층이 중산층을 밀어낸다는 이유로 마르크스주의 국가들은 전체주의의 모습 보였다. 스탈린의 소련 집단 수용소, 헝가리 혁명 및 프라하의 봄에 대한 진압, 중국의 문화 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은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비참한 악몽으로 끝나는지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그들이 정치적 세력을 확보하여 집권 정당이 되었을 때, 무자비하게 반대파를 숙청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게 된다. 이 과정 속에 노동자들이 소외되었음은 물론이다.

정치적 현실뿐만 아니라 그들이 기대했던 이상향도 현실에 완벽하게 구현되지 않았다. 그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말 그대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에 대하여 칼 트루먼은 자신이 예전에 살았던 애버딘의 한 빈민가가 변화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나는 몇 해 전 애버딘의 한 빈민가를 거닐면서 그 지역에 부착된 크고 과시적인 위성 수신 안테나들을 보았습니다. 그런 안테나들은 내가 그때까지 보고 살았던 중산층 지역에 설치된 것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인민의 아편은 종교가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투표권을 원하지 않으며, 그저 시청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연속극을 원합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었을 때, 사회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또한 자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편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유가 아니라 빵이었고,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중산층이 누리는 삶을 자기들도 누리는 것이었다. 좌파들은 이런 현실 속에서 현실과 타협함으로 진정한 자유와 정의의 실현보다는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 쟁취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해방’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자신들의 삶을 자본주의의 제도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전히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모순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노동조합’이다. 모든 ‘노동조합’들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기업의 노동조합이 보여주는 행태를 보면 오히려 그들이 더 권력 지향적이며 자본 지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는 노동자의 권익 대변을 위한 조합으로 시작하였지만, 지금은 ‘노동조합’의 회원들 자신의 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고용주와 기업을 흔드는 역할만 하고 있다. 때로는 ‘민주노총’과 같이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그들의 이익 획득을 위한 집단행동까지도 불사하는 경우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시켜놓았더니, 자본주의에 편입되어 그들의 삶을 그대로 누리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좌파의 정의는 권력획득을 위한 구호에 불과했는가?

좌파의 역사와 발전, 모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조 후보자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이 된다. 그의 삶의 겉모습은 진정한 정의를 위한 부르짖음으로 가득했지만, 실상 자본주의의 제도에 굴복하여 기득권층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왔다. 불법은 아니라고 하지만 일반 국민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해왔던 것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에 그가 했던 발언과 그의 삶이 전혀 일치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의 외침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지지 세력이 되었고, 이는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였지만, 이는 조 후보자는 권력의 중심부에 서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그의 외침대로 진정한 정의가 이루어지는 사회였다. 불법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삶으로도 청렴한 정치인들이 많이 일어나고, 적폐를 몰아내며 사회 곳곳에 조 후보자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세워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살아왔던 삶의 내용은 이런 기대를 산산조각내기에 충분했다. 조 후보자의 외침은 권력획득을 위한 구호에 불과했다. 진정으로 가난하고 소외되며, 약자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그러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위선적인 모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파에 있는 사람들 또한 부정부패가 가득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들은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우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미 지난 대선을 통해 자기들 손으로 우파들을 도려낼 수 있는 건전한 이성과 담대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좌파에 있는 사람들, 그 대표적인 인물인 조국과 그의 지지자들은 우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가지 내용들이 확인 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향한 그의 의지를 내려놓고 있지를 않고 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광기(狂氣)에 사로잡혀 옹호하기 바쁘다. 무엇이 문제인지 현실적으로 분별하려 하지 않고, 적폐 청산을 위한 투사의 이미지를 투영하여 무한한 지지를 보여주고 있다. ‘불법이 아니면 괜찮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다. 이런 모든 모습들은 그동안 조 후보자가 말해왔던 사회적 정의가 단순히 자기의 권력과 자기 가족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에 일반 국민들은 분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우파) 그리스도인, 실천적으로는 진보(좌파) 그리스도인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입장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보수냐 진보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현시대를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다만 한계는 있다. 성경은 현대 사회에 일어나는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명확하게 답을 해주지 않는다. 나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택을 해야 할까?

먼저는 정치적 보수(우파)의 입장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 진보(좌파)는 철저하게 시대의 산물이요 사상의 산물이다. 이들의 주장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혁명)’과 ‘해체(상대주의)’가 핵심이다. 이들의 논거를 받아들인다면 기독교는 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일반 사람들에게 ‘회심’을 강요하는 집단이요, ‘교리’를 강제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여기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좌파) 사상이다. 또한, 이들은 절대주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진리를 해체한다.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이며, 각자의 상황에서 ‘진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기독교도 상대적 진리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와는 대척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나라에 있는 진보(좌파)는 친북·종북의 성향이 강하다. 진보(좌파)가 된다고 해서 우리나라를 단번에 북한으로 만든다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 개인의 자유가 제약되고 정부의 통제 아래에 두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더군다나 이들은 반일을 넘어서 반미까지 나아갈 위험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는 급격하게 무너질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적 이유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보수(우파)의 입장에 설 것을 제안한다. 우파는 전체주의의 위험(실상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좌파에서도 전체주의의 모습이 나타난다.)이 있지만, 기존의 질서를 지키고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둔다. 성장을 중요시하며, 발전을 강조한다. 정치적으로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의 연합(때로는 과도한 사대주의적 모습이 나타나긴 하지만)을 통해 우리나라를 안정적으로 세워나가고자 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큰 어려움 없이 함께 어울려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는 진보(좌파)의 입장에 설 것을 제안한다. 정치적 보수(우파)의 입장에 의해 발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실천적 진보의 모습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천적 진보는 이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보(좌파)들이 주장하는 사회적 실천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도움, 과도한 성장주의에 대한 적절한 견제와 비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에 근거한 사회 정의 실현을 의미한다. 이것이 단순히 권력획득을 위하여 구호처럼 외치는 ‘정의’도 아니며, 억압된 자들의 해방으로서의 ‘혁명’도 아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실천적인 측면으로서의 ‘정의’를 이루어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죄로 인해 타락하고 왜곡된 이 세상에 흘러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경은 무엇을 선택하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문제다. 그때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보수 그리스도인, 실천적으로는 진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선택해야 한다. 권력획득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그리스도 사랑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 복음을 실천하여 그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 사회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는 상황(롬8:22)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변혁시켜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