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다운 교회 칭송받는 교회(truly Church! truly praised! truly recovered!)를 향해...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미포 사무총장)

교회는 교회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닌데, 왜 교회다운 교회를 언급해야 하는가? 교회다움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한국 내에서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최대의 집단이 기독교회이다. 선교 130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넘어 걱정과 염려의 대상이 되는 현실이다.

1. 한국교회의 현실을 말해주는 지표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주관해서 한국기독교 분석 리포트를 발행했다. 20년간 4차례에 걸쳐 추적 여론조사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회에 인식 지표를 측정했다. 비개신교인을 대상으로 한국교회의 해결과제를 질문한 결과 목회자의 사리사욕/이기심/권위주의가 28.6%로 나타났고, 자기 교회 중심적 18.7%, 타종교 배타적 14.8%, 양적 팽창/외형에 치우침 11.8%, 교파가 너무 많음/단합이 안 됨 8.3%로 나타났고, 개신교인들은 양적 팽창과 교파 많음, 세속화 등을 과제로 뽑았다(한국기독교분석리포트, p.258-9).

그리고 개신교가 신뢰받기 위해서 중요하게 바뀌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개신교 비개신교인 관계없이 교회 지도자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특히 비개신교인들은 44.4%인데, 이는 2012년의 3차 조사 때의 37.1%보다 더 높아졌다. 개신교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가 더 많이 무너졌다(p.261).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인 목회자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질문했을 때 첫째는 물질적 욕심(50%)과 성장주의 인격/윤리 부족, 언행일치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pp.264-6.)

그리고 교회가 어떤 분야에 가장 집중해야 하는지를 질문했을 때, 개신교인들 스스로 사회적 책임(구제와 봉사)가(39.4%) 예배, 교육, 양육보다(28.1) 더 높게 나타났다(pp.262-3).

이런 몇 가지의 설문 조사 결과는 기독교의 현실을 보여준다. 비 개신 교인은 물론 개신교인들 자체도 한국교회의 문제를 목회자로 지목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신뢰성에 목회자의 사리사욕과 탐욕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양적 팽창이나 성장주의와 무관하지 않은 현실이다.

그래서 2017년 한국기독교윤리실천협의회의 한국교회 신뢰도 조사에서는 5점 만점에 2.55점을 받아서 낙제점을 기록하였다.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되지 않는 기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현실은 기독교회가 교회다움을 상실한 결과이고, 그 결과 칭송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2. 교회다움이란 무엇인가?

교회다움을 이해하기 위해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돌아보게 된다. 행2:42-47절과 4:32-35절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 복음이 전파되는 교회

예루살렘교회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 땅 위에 교회는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이 복음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죄를 회개함으로 용서받고, 세례를 받음으로 새생명을 얻고, 교회의 교제와 성찬과 기도를 하는 새새명의 공동체의 삶을 살게 된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회개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범죄를 회개함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헛된 신을 섬겼거나 인간 자신만을 중심으로 살았던 이기적인 삶을 회개함이다. 복음을 믿고 회개함으로 새 생명을 가진 자들은 구원자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을 알고, 또한 함께 회개한 성도들과 교제에 들어간다. 이것이 교회이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이웃으로부터 격리시켰다. 신을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대상으로 이용하고(종교의 타락), 이웃을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얻는 수단으로 이해하다. 이것이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래 아담을 지으시고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서 돕는 이를 만드셨다(창2:18).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되었지만, 배필이란 말은 원래 없다. 단지 남자와 여자라는 관점에서 배필로 번역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돕는 관계로 주어졌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홀로 두지 않고 함께 두신 목적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복음을 전파한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르침, 교제, 성찬, 기도 등)와 함께 드리는 성도들을 사랑해야 하는 이웃으로 인식한다.

2)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는 무엇보다 사도의 가르침(행2:42, 4:33)인 부활의 복음에 성실해야 한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함으로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의 역사로 세워진 교회는 어떤 역사적인 실체를 가졌는가?

교회가 역사 속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형태는 "각 사람의 필요"에 부응하는 모습이었다(행2:45, 4:35). "각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 자기의 것을 내어놓는 교회는 가난한 자가 없는 교회를 만들었다(행4:34). 가난한 자가 없는 교회의 모습은 구약의 안식년과 희년이 도래한 상태이다(신15:4-5). 안식년이 실행됨으로 그 땅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같은 저자인 누가는 예수님의 복음을 은혜의 해가 이미 도래한 것으로 선포한다(눅4:18-21). 은혜의 해가 바로 희년이고, 안식년이다. 따라서 예루살렘교회가 각 사람의 필요에 부응하여 가난한 자가 없는 교회가 된 것은 구약의 안식년과 예수님의 은혜의 해가 도래한 결과이다. 첫 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이 역사하여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들어온 성도들로 구성한 교회의 모습을 안식년과 희년이 도래한 모습을 이루는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없도록 "각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교회가 되도록 사도의 지도력을 따라서 만들어 갔다.

부활의 복음과 가난한 자가 없는 교회의 모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부활의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파된다(눅4:18, 7:22). 가난한 자라는 것이 단지 물질적인 면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질적인 가난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각 사람의 필요" 물질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의 고통, 위로, 열등, 질병, 걱정, 근심 등의 해결이 각 사람의 필요에 다 들어있다. 그래서 필요가 있는 무리들을 가난한 자라고 부른다. 부활의 복음은 새생명을 만들고, 이전에 삶을 회개했기에 자신만을 추구하는 삶에서 옆에 있는 이웃을 돕는 이로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이 원래 사람들을 만든 목적이 바로 돕는 이로 상호 존재하고 섬기는 것이다.

삭개오의 회개는 이웃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나의 부와 이익의 대상으로 여겼던 삶에서 이제는 그들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과 같은 죄인을 찾아 주신 것처럼, 그는 이웃과 가난한 자를 찾는 자가 되었다. 이웃 즉, 각 사람의 필요에 부응하는 변화가 생겼다.

3. 오순절에 생긴 예루살렘 교회의 교회다움은 무엇인가?

모든 시대 교회의 기준점이 되는 예루살렘교회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해서 복음을 전파함으로 세워진 예루살렘교회의 역사적 실체를 누가 만들었는가?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저절로 생긴 교회인가? "각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자기의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는 회개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각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교회가 되었을 때, 가난한 자가 없다고 행4:34-35절이 말한다. 그런데 이런 행위의 출발은 33절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함으로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부활의 복음을 사도들이 전하고 나자 은혜를 받고, 무리들은 이웃의 필요를 기억하고 자기 것을 내어놓은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자기의 복지와 이익을 극대화하는 이방종교적 기복신앙과 거리가 멀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이웃의 필요를 자기의 것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더 부자가 되고, 더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다. 교회가 가르쳐야 할 복음의 실체가 아니다.

오순절에 세워진 교회는 복음을 근거로 회개한 자들이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었다. 이것은 복음의 역사이고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이다. 새로운 생명을 얻는 자들이 어떤 교회가 되어야 마땅한지를 선택한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이 은혜의 해를 성취한 것으로 이해하고, 가난한 자가 없는 교회는 역사 속에서 만들어내는 섬김을 가진 교회가 되었다. 예배를 통해서 역사적인 실체로서 안식년과 희년이 도래하는 교회로 사도들의 지도력 아래 온 성도들이 순종함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교회다움의 첫 번째 실체였다.

이웃을 돕는 이로 발견한 성도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실체는 "각 사람의 필요"에 부응하는 교회였다.

4. 칭송받는 교회는 무엇인가?

오순절의 교회가 회개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새생명을 얻는 실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각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교회가 되었다. 복음을 가진 교회의 일관성 있는 모습이다. 그것이 이웃을 돕는 이로,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의 회개이고, 실천적 회개이다. 재물을 나의 안전과 이익의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않는 회개의 모습이다.

이런 교회가 되었을 때, 교회는 하나님을 찬미하였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는 근거는 복음의 은혜가 만들어낸 구체적인 실천적 현실 때문이다. 각 사람의 필요가 채워지는 현실이다(행2:45).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한다. 교회다움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세상 속에서 칭송의 근거가 된다. 칭찬의 이유가 된다.

어떻게 자기의 욕심을 버릴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자기의 것을 내어놓아서라도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교회가 되었는가? 바로 칭찬받는 교회의 실체는 자기의 욕심을 비우는 교회의 지도자, 성도들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섬김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 역사이고, 믿음의 순종이고, 성령의 구체적 역사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와 걱정거리가 되는 현실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욕과 물욕과 성장의 탐욕에 젖어있고, 성도들은 번영의 복음에 속고 있다. 이때 고신 교회가 복음에 철저히 기초하고, 이웃을 돕는 이로 이해하는 회개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예루살렘교회처럼 실체적으로 가질 때, 교회다움을 회복하고 칭송받는 교회가 될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 탈북자들, 결혼하여 온 외국인들 난민 등, 이 땅에 가난한 이웃들의 위한 교회가 될 때, 교회다움을 실천하고, 칭송받는 교회가 될 것이다.

고신교회 70주년을 맞으면서도 신사참배에 항거한 믿음의 조상들의 행위는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서 신사를 거절하였기에 이는 동시에 억압받는 민족의 편에 선 모세와 같은 복음적 행위로 평가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하는 복음적 순교적 신앙은 21세기를 맞으면서 생활의 순결 적용은, 교회가 이웃을 돕는 이로 보고, 섬김을 감당하는 교회다움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도록 고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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