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국 단둥을 다녀왔다. 단둥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보는 도시인 관계로 대북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또 동시에 이곳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도 3000여명이나 있어 남북의 사람들이 만나고 교류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국경도시답게 제법 외양이 화려하고 번듯하다. 고층 빌딩들과 밤의 야경은 강 건너편의 짓눌린 분위기의 불꺼진 도시 신의주와 확연한 대비를 보인다.

이 흥청거리는 도시 단둥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해주는 강 건너 북한의 이야기는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영혼을 고통스럽게 한다. 계속되는 식량난이 중국의 곡물금수조치로 더욱 심각해졌다거나, 어느 도시에서는 아사자들이 길거리에서 목격된다는 등의 이야기는 안타까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이제 우리는 미국과 친해지려 합니다. 미국이 동맹국을 배신한 적이 없었음을 우리가 잘 압니다'라고 최근의 북·미 화해분위기를 설명하는 북한 관리의 말에는 애처로움과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 중국 교회 지도자는 단둥을 드나들던 북한 주민 한 사람을 전도해 신앙을 갖게 했지만 그 후 몇 년간 소식이 두절되었다며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단둥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한 톨의 식량이라도 더 보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여러 날 계속 되는 촛불시위의 함성과 요구는 막막한 북한 현실과 그 주민들의 비참함 앞에서는 차라리 사치스런 몸짓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현실 앞에 서면 휴전선 철조망 한 줄을 경계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 삶은 엄청난 은총의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신앙과 민주주의가 그러하고 패기만만하고 생기발랄한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렇게 은총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삶이 요청된다. 예수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라고 하셨다. 이사야 26장 10절에는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라고 하셨다. 의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의에 익숙지 못한 사람'이며 이는 악한 자라는 의미이다. 현실의 어려움이 있다 하여 은총을 입고도 의에 익숙하지 못하면 악인의 길을 걷는 자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공평과 정의'를 넘어서는 긍휼과 사랑이다. 원래 하나님의 의는 공평함을 넘어서는 무한의 사랑에 기초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공평함으로만 우리를 대하시면 우리의 처지는 어찌 되었을까? 하나님은 결코 공평하심만을 당신의 의로 여기지 않으신다. 그의 의는 사랑과 자비에서 열매 맺고 완성된다. 그러기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 하셨다. 이제 우리는 긍휼과 사랑을 품고 주변을 바라보고 섬기는, 의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은총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단동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가르쳐준 교훈이다. 특히 북한을 바라보면서 더욱 간절해지는 절실한 교훈이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