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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와 만주교회 이야기Ⅰ

  

김동춘 목사 (SFC대표간사, 연변대 역사학박사ㅡ만주 근대사)

사람들은 간도와 만주, 동북 3성, 연변, 연길이라는 지명을 서로 혼재해서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만주'라는 지명을 많이 사용하고, 간간이 '간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현재의 만주 땅은 동북 3성이니 연변이라는 말로 불리고 있다. 그러면 이들 용어들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다양하게 사용되었을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청나라의 봉금령과 북간도개척사를 살펴봐야 한다.

   1. 간도, 만주, 동북 3성, 연변

  1616년 만주를 통일한 여진족 누루하치와 그의 아들 태종은 여진족을 만주족으로, 후금을 청으로 고쳤다. 그리고 여진족의 발상지인 두만강, 압록강 일대를 봉금했다. 이른바 ‘강도회맹(江都會盟, 1627년)이다. 협약 내용인 즉, 두만강과 압록강을 월강한 자는 잡아서 돌려보내되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었다. 그 처벌이라는 것이 주로 목을 참수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법령이 만주족이나 중국 한족에 해당된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을 겨냥한 것이어서 말 그대로 강도 같은 협약이었다. 이때부터 압록강 및 두만강 이북지역은 2~300년 가까이 엄격한 봉금책 아래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대가 되었다.

  왜 청나라는 굳이 이들 지역에 봉금령을 내려 조선사람의 접근을 금지하였을까? 그것은 대략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두만강과 압록강의 발원지인 백두산은 청나라 역시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 성지(聖地)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백두산에서의 곰과 호랑이 등의 동물은 토템사상을 반영하고 있지만,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도 중요한 힌트를 제공해 준다. 곰은 조선민족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호랑이는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을까? 바로 여진족(만주족)이다. 만주족은 자신의 발상지를 백두산 밑에 있는 원지(圓池-두만강 발상지에서 약 700미터 지점에 있는 못으로 너비가 1.2km)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1677년 강희제는 백두산을 청조 발상지 영산이라 하여 제사를 올리게 하고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1천여 리에 달하는 지역을 ‘용흥지지'(龍興之地, 용이 흥하던 땅)로 규정하여 봉금정책을 더욱 엄격히 실시하였다.

  둘째로,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특산물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두산 일대에서 산출되는 인삼, 녹용 등 특산물은 만주족이 독점 판매하기에 중요한 작물이다.

  셋째로, 조선민족을 견제하는 일종의 완충장치이다. 만주족은 세종대왕이 4군 6진을 개척할 당시만 해도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으로 흩어진 부족에 불과했고 역사 이래로 조선민족(고조선,고구려,발해)의 하층에 속했으므로 조선민족을 경계하고 두려워하였다. 북경으로의 천도 및 대륙 진출도 조선을 다스리고(병자호란) 난 다음에 진행할 정도이다.

  봉금령으로 인해 백두산 일대는 밀림과 같이 되었고 만주일대는 땅이 비옥해져 온갖 특산물이 넘쳐나고 농사짓기에 아주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그래서 봉금조치에도 불구하고 대흉년을 당한 조선인에게는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두만강 인근의 조선인들은 삼정 문란으로 인한 피폐함이 극에 달해 두만강을 과감하게 넘게 되었다. 철종 11년(1860) 조선 북부지역에 발생한 대홍수와 1869년과 1870년 연이어 전국에서 일어난 대흉년은 수많은 사람들이 구걸로 연명하며 굶어 죽는 사람이 길가에 넘쳤으며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결국, 함경도 지역 사람들은 그 출구를 만주로 삼았다.

  하지만 봉금령을 어길 경우 참수를 당하는 서슬 퍼런 법령이 아직 살아있으므로 몰래 두만강을 넘되 주변 사람들에게는 두만강 안에 있는 조그만 텃밭인 “사이섬”에 간다고 핑계를 대었다. 그 “사이섬”이 바로 “간도(間島)”이다. 본래 간도는 용정(開山屯) 근처의 경계선이 애매한 ‘사이의 섬(간도)’이었지만 점차 두만강 이북의 땅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나중에 압록강 이북의 땅이 개척되자 두만강 이북은 “북간도” 압록강 이북은 “서간도”로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1년 9월 18일 일본에 의한 만주 사변이 일어나고 1932년 만주국이 들어선 후 “간도”라는 말보다는 “만주”라는 말이 더욱 널리 쓰이게 된다. 그래서 두만강 이북 동쪽은 동만, 압록강 이북 및 두만강 서쪽은 남만, 그리고 요하 및 송하강 이북은 북만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호칭 모두 현 중국 정부는 대단히 싫어한다. 왜냐하면 “간도”란 호칭은 조선민족이 중국에 정착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만주”란 호칭은 만주족에 중원을 빼앗긴 과거에 대한 기억이자 “만주국”에 대한 악몽이 연상됨으로 싫은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동북 3성(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으로 사용하고, 예전 북간도 일대는 연변(조선족자치주)으로 지칭하고 있다(연변의 수도가 연길이다).

  초기에는 함경도 지역의 평민들이 주로 이주하여 왔다. 80~90%에 달한다. 그다음은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순이다. 이런 상황은 인근 지역의 근접성과 가족, 친척, 이웃들의 이주가 주원인이다. 하지만 1910년대 이후부터 타 지역민, 그리고 정치적 망명가들도 다수 이주하면서 이주의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먼저 정치적 망명가들을 보자.

  정치적 망명가들은 확고한 항일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존경받는 비중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해외에 기지를 세우되 조선과 가까운 지역, 조선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압록강, 두만강 인접 지역으로 이주 망명하였다. 대표적으로 1910년 12월과 1911년 1월에 걸쳐 압록강을 건넌 이회영, 이시영 일가 59명이 있다.

  한편, 두만강 이북지역에서는 그보다 10년이나 앞선 시점에서 집단 이주가 있었다. 1899년 음력 2월 18일 명동촌에 이주한 다섯 가문 문병규, 김약연, 남도천, 김하규와 1년 뒤 합류한 윤씨 가문으로 22 가문 도합 142명(윤씨 가문까지 합치면 160명)의 대이민단이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령 이북과 용정촌 중간에 정착하였다. 이들 다섯 가문은 두만강 변의 도시인 회령, 종성 등에 거주하던 학자들 가문으로 단순하게 분산적으로 이주하여 합쳐진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한 협의와 준비를 하여 집단적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의 협의 내용을 보면, 첫째, 척박하고도 값이 비싼 조선의 땅을 팔고 비옥하고도 값싼 북간도의 땅을 많이 사서 개간하여 잘살아 보자, 둘째로 썩어빠진 조선에서는 어찌할 수 없으니 북간도 땅에 가서 이전 조선민족의 옛 땅을 새롭게 건설하자, 셋째로 새로운 환경에서 구국구민(救國救民)을 위해 후대를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이들이 정착한 땅이 바로 "명동"(‘明東’이란 말은 ‘동쪽을 밝힌다’는 뜻으로 동쪽은 한국을 의미)이다.

 

김동춘  sfcccm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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