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지난 칼럼에서 예고했던 것처럼 근대 자본주의와 보수정치 제도가 어떻게 프로테스탄트 교리에 입각한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시간부터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살펴보자. 여기서 막스베버(Max Weber/1864-1920)의 논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막스 베버의 논문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자렛(David Zaret)의 주장처럼 막스 베버가 칼빈주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가 칼빈의 입장에서는 벗어난 점이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1) 특히 송기섭 씨가 막스베버는 “칼빈의 오직 믿음(sola fide)의 은혜와 열매의 균형이 열매(행위) 쪽에 치우치고 청교도의 계약 신학에서의 은혜와 주의주의(主意主義)의 균형에서 주의주의 쪽을 강조함으로 균형을 잃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칼빈주의로 나타나게 되었다”2)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스베버는 종교개혁 이후에 근대 자본주의가 어떤 골격에 의해 형성됐는지 예리한 관점에서 비교적 잘 설명했다고 본다. 그 골격은 바로 칼빈주의와 청교도 교리다. 베버의 이정도 관점만 이해해도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사실은 개혁이란 용어가 더 적절하지만)이 종교 영역만의 개혁이 아님에 충격을 받는다. 루터에 의해 시발 된 개혁은 전 세계의 존재 방식 자체를 개혁한 획기적인 사건이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자본주의 정신을 이룬 교리로서 첫 번째 살펴볼 교리는 ‘섭리교리’다. 섭리교리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거룩하고 지혜롭게 ‘보존’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교리다.3)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투철하게 믿었다. 때문에 그들은 불법과 속임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정직함과 성실함과 검소함, 절제 등의 금욕적 삶을 살면, 결코 망하지 않고 ‘보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단이 통치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을 아담 스미스(Adam Smith/1729-1790)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을 학교에서 ‘개개인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의도와 계획이 없이도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유익이 주어진다는 것’ 정도로 배웠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손을 떠올리면 경제 정책의 비합리성, 혹은 요행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런 비합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므로 오가와 히토시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보이지 않는 질서’라는 의미로서 “세상의 질서는 결코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위 인간의 무의식적인 행위를 신(하나님)이 조종하도록 해서 형성된 것”이란 뜻이라고 설명한다.4) 아주 적절한 설명이다. 흥미롭게도 구글에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영어로 “the invisible hand of God”(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으로 검색하면, ‘보이지 않는 손’을 하나님의 섭리로 설명한다. 아담 스미스는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는 주장들이다.

사진@조윤희 집사(김해중앙교회)

막스 베버도 동일한 주장을 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배당하고, 각 사람은 소명으로서의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인식하고서, 그 직업노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5)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핵심이 있다.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직업을 생존의 수단이나 성공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직업은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졌다. 직업이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졌다는 말은 직업 자체가 ‘성직’이란 의미다. 종교개혁 이후부터 직업은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렇게 성실하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노동을 함으로 늘어난 재산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이해했다. 직업과 부의 축적에 대한 이해가 바뀌자 사람들은 부자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과거에 부자는 탐욕과 억압과 이기심(利己心)으로 재물을 축적하는 혐오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부터 부자가 되려면 검소하고 부지런하며 경건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이런 인식이 부자를 존경의 대상으로 보게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부자가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자.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 정신에서 강조하는 섭리에 대한 인식의 결여가 가져온 결과다. 직업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직업을 성공과 행복과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여기에 기독교 신자나 불신자나 직업에 대한 인식에는 아무런 구별됨이 없다. 신자들에게도 직업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없다. 이 시대의 교회는 이 정신부터 개혁돼야 한다. 직업에 대한 인식이 개혁된다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부(富)는 자발적으로 재분배될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 큰 부자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회에 기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분배의 주체는 인간 정부의 강압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신자들의 마음에 사랑으로 자발성을 부여하여 분배케 한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교회에서 일어난 기적이었다.

미주

1) 송기섭,「종교학 연구-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나타난 막스 베버의 칼빈주의에 대한 고찰」, 서울대 종교학 석사논문,p.125.

2) Ibid.,p.124.

3)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1문.

4) 오가와 희토시,「애덤 스미스, 인간의 본질」,김영주 옮김,(이노다임북스,2015),p.90.

5) 막스 베버,「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박문제 옮김,(현대지성,2018),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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