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7:9-13절 주해와 설교적 적용

본문 마 17:9-13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본문의 번역(사역)과 비평

9절 그리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인자가 죽음으로부터 일어날 때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본 것을 말하지 말라.

10절 그러자 제자들이 그에게 질문하여 이르기를, 그러면 왜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만 한다고 말합니까?

1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기를,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다.

12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가 이미 왔고,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에게 대해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그에게 행하였다. 마찬가지로 인자도 장차 그들로부터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절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시다는 것을 이해했다.

 

10절 "제자들이"에서 어떤 사본에는 "그의 제자들이"로 표기된다. 사본상 중요도는 {C} 중요도이다. 그 의미는 본문과 비평란의 선택이 의심스럽다는 상태라는 것이다.

외에는 UBS4판에 언급된 비평이 없다.

N-A 27판에는 몇 개의 사본상 문제를 더 제기한다. 먼저 9절에 "일어날"의 단어가 다른 단어로 표기된 사본들이 있다(εγερθη --> αναστη). 11절에 괄호안에 번역한 것과 같이 주어로서 예수를 삽입한 것들이 있고, 엘리야가 "먼저" 와서로 할수 있도록(10 절과 같이) "먼저"가 삽입된 본문들도 있다. 12b-13절의 순서가 바뀐 것도 있다. 모두 크게 단락이나 의미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본문에 대한 질문들

1.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본 것이 무엇이었기에 인자가 죽음으로부터 일어날 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예수님이 명령하시는가? 미리 말하면 어떤 오해가 생기는가?

2. 이 명령을 듣고 왜 제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이해를 질문하게 되는가? 변화산에서 엘리야를 본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3. 엘리야가 와서 회복할 것이 무엇인가?

4. 엘리야와 인자가 어떻게 연결되는가?

5.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엘리야가 세례요한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왜 그런가?

6. 이 본문에는 인자라는 표현이 두번 나온다(9, 12). 인자가 예수님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인지하는 칭호로 본다. 그렇다면 왜 두번이나 나오는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본문의 근접 문맥

변화산 사건이 문맥이다.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이 3명의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변형되신 것이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말한다.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이 음성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때 음성과 같다(마3:17). 왜 이런 음성이 들려졌는가?

변화산 사건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로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고 난후(마16:16),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하셨다(마16:21).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되심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가능함을 보이신 것이다. 고난의 그리스도되심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구약으로부터 인정을 얻는 사건이 변화산 사건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목적도 회개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사하기 위한 길을 가시기 위해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다. 회개한 자들의 죄를 짊어지시는 사역이 예수님의 길이다. 이것을 삼위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가시는 것을 구약과 하나님이 인정하신 자리가 변화산 사건이다. 참고로 누가의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의 별세를(출애굽) 모세와 엘리야와 논의했다고 기록한다(눅9:31).

변화산 사건은 세 제자들이 오해한 것과 같이 고난과 십자가와는 정반대의 예수님을 생각하게 만든다.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영광의 길을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신다(17:5). 제자들의 인간적인 생각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과 의지를 듣도록 한다. 그것은 이미 말씀하신 고난의 길을 말한다.

 

◇마태의 거시적 목적과 관련해서

마태는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그린다(마1:21). 바벨론 포로의 원인이 죄이기 때문에 죄로부터 구원을 하시는 예수님은 결국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다.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짊어지기 위해서 십자가와 수난의 길을 걸어가신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변화산 사건까지에서도 힘들다.

 

◇본문 주해(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식으로)

9절: 예수님 일행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이 변화산 사건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사람들이 3제자들과 같이 오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 도시는 길을 가신다. 그러나 변화산의 모습은 구약과 하나님의 보증을 받은 메시아로 인정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로 오해한다. 정치적인 메시아 혹은 요한이 말한 것과 같은 종말의 심판적 메시아로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를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로 부르심은 단7:14절에 언급된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으시는 왕이신 메시아이다. 그런데 이런 왕권을 가진 메시아가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통해서 천국을 이루신다는 것을 백성들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다. 권력과 힘으로 이루는 나라를 지향하는 무리에게 변화산 사건은 오히려 오해가 된다.

10절 제자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주장을 언급한 이유는 메시아의 시대가 엘리야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말4:4-6절을 보면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올것을 예언한다. 엘리야의 역할을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자녀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말4:4절에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아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은 율법의 회복을 일으키는 엘리야의 도래를 통해서 시작된다.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리키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바울이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규정할만큼(빌3:5) 바리새인과 율법은 연결되었다.

변화산 사건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 이심을 확신한 제자들은 메시아의 시대 즉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있게 될 엘리야의 도래가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질문한 것이다.

11절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주장을 인정하신다.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다. 모든 것을 회복한다는 말은 율법을 회복함이다(말4:4-6). 율법이 회복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엘리야가 심판을 통해서 제시할 것이다. 오늘의 바벨론에 의한 멸망과 포로됨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언약적 율법을 버린 저주이다. 이것을 엘리야가 오므리 왕가에서 외치고 드러내었듯이 유대의 멸망의 원인도 마찬가지로 언약적 율법을 버린 결과임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래서 율법을 온전하게 만드신 메시아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12-3절 예수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의 심판의 결과임을 확인하는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선언하신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친 세례 요한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다(마3:2).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이 율법의 길로 돌이키라는 엘리야의 외침과 같다. 그러나 백성들은 엘리야의 말을 듣고 회개하기 보다는 오히려 죽였다. 헤롯과 같은 자들이 요한을 이미 죽였다(마14:10-12). 예수님은 엘리야를 요한으로 이해했고, 이것을 제자들도 이해하게 되었다(13)

예수님은 모든 권세를 위함받은 인자이지만 요한과 같이 고난을 받을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신다. 엘리야에 대한 헛된 기대를 통해서 요한의 증거를 받으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지 않는 이 시대가 예수님의 메시아(그리스도)되심을 신적으로 그리고 구약적으로 인정을 받은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주해적 정리를 통한 설교 구성

전체의 핵심: 복음의 길은 죄를 이기는 고난의 길이다.

1.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복음의 사건이다.

변화산 사건이 예수님의 메시아로 고백을 받은 후, 수난을 겪고 죽고 부활하는 방식으로 메시아의 역할을 하실 것을 선언하셨다. 이런 메시아의 길에 대해서 구약의 성취임을 모세와 엘리야가 증거한다. 특히 누가는 예수님의 별세(출애굽 εξοδος, exodus)를 논의하는 장면을 통해 구원의 길이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례때에 주셨던 음성으로 메시아의 고난의 길을 인정하신다. 복음의 길, 구원의 길, 메시아의 길은 수난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인 것을 인준하신다.

 

2. 예수님의 고난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예수님이 변화산 사건을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있기까지는 알리지 말라고 하심은 세상이 예수님의 메시아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세우는 자는 권력을 얻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현재의 권력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권력에 수난을 당하는 길을 가신다. 이것은 승리의 길이 아니라 패배의 길이다. 그런데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의 권세를 한꺼번에 이기신다. 고난의 길을 통해서 부활을 경험하는 십자가의 길, 복음의 길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고 언제나 세상의 영광을 취하는 길로 간다.

이것은 엘리야에 대한 오해로 연결된다. 엘리야가 오기까지는 새로운 나라가 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미 왔다. 세례요한을 통해서 회개를 외침으로 모든 백성들이 율법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로 나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요한을 죽였다. 예수님은 요한의 길을 따라서 역시 버림을 당하고 고난을 받게 된다. 복음의 길이 고난의 길이다. 세상의 영광의 길과 다르다.

 

3. 죄를 해결하는 복음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예수님은 세상이 요한을 올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던 것처럼 예수님을 오해한다. 철저하게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해한다. 현실적인 유익과 번영을 주는 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과 같이 고난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 세상은 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아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런 메시아는 없다. 고난을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해결해 줄 메시아는 없다. 정치적 메시아, 이념적 메시아는 존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죄를 해결해 줄 메시아는 없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한다(빌1:8). 고난을 받는 길이 사도들의 길이고, 사도들을 따르는 교회와 성도들의 길이다. 죄를 이기고 싶은 자들은 고난의 길로 가야한다. 세상의 영광을 얻는 자들의 길과 다르다.

복음의 길은 죄를 이기는 고난의 길이다.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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