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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때아닌 이념논쟁을 대하며
정성호 목사(대구서교회 부목사)

요즘 때아닌 이념논쟁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미 역사가 판단을 내려준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사회주의 이념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조국 법무부장관은 청문회라는 공식 석상에서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지칭함으로 인해 이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촉발되었다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진영에서는 사회주의는 곧 공산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종북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서 공격한다.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진영에서는 이런 공격에 대하여 크게 대응하지는 않은 채, 묵묵히 자신들이 따르는 사회주의적 이념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사회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정당 및 정치인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보수정당에 대하여 실망과 좌절을 넘어 혐오의 감정을 가지면서, 보수정당 보다는 진보정당(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정당)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점에서 사회주의란 무엇이며, 보수적 입장에서 바라본 현 정부 구성원들의 정치적 입장은 어떠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먼저 사회주의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은 아주 복잡한 역사적 발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의미가 충분히 구현되기 전에 공산주의에 의해 개념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의 민주사회주의 선언(프랑크푸르트 선언, 1951년)에는 과거 사회주의의 의미와 완전히 결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강조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기에 단순하게 ‘사회주의는 무엇이다.’라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두산백과 사전을 참고해보면 사회주의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①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계획경제 제도를 수단으로, 자유·평등·사회정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는 사상과 운동을 뜻하는 경우(고전적 사회주의의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 ②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계획경제라고 하는 제도 자체만을 가리켜 뜻하는 경우, ③ 사회주의의 목적만을 가리키는 경우(자본주의보다 한층 훌륭한 사회를 뜻하는 경우), ④ 공산주의의 첫째 단계 또는 더욱 낮은 단계를 뜻하는 경우(공산주의자 특유의 반 논리적 용법), ⑤ 민주사회주의적 용법(민주주의적 방법에 의하여 민주주의 자체를 완성함으로써 사회를 개조하려는 사상 및 운동 또는 민주주의의 최고의 형태를 뜻하는 경우) 등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진보 쪽에서 주장하는 사회주의의 개념은 ⑤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며, 보수 쪽에서 주장하는 사회주의의 개념은 ④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개념을 따르든지 간에, 이 모든 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한 가지 원리가 있다면 ‘개인을 통제하고 사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원하는 바를 이룬다.’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던 운동이기에,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주장하기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회라는 집단을 통해서 생산과 소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입장이다.

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가?

앞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듯이, 사회주의에는 다양한 정의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맞다 틀리다’로 접근할 문제는 아니다. 한 사람이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 때에, 수많은 정의 중 어떤 개념으로 사용하였는지 추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보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왜 현 정부에 대하여,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위에서 살펴본 정의대로라면 사회주의는 현대의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긍정적인 정의(⑤)도 있지 않은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추적할 필요가 있는데, 현 정부의 관료들의 지나온 삶을 살아온 궤적을 추적해 보고 현재 하는 모습들을 볼 때, 충분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만한 근거들이 있다.

현 정부의 핵심적인 구성원들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있던 사람들이다. 노동자의 혁명과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변증법과 유물론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을 하나의 물질로 바라본다. 또한, 자본은 프롤레타리아의 적이요, 자본가들은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다. 이 사상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들은 투쟁과 혁명을 통해서 자본가들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빼앗고, 그들의 세상(유토피아)을 이루어야 한다. 현 정부의 핵심 구성원들은 이에 헌신했던 자들로서 마르크스주의와 연관된 사회주의를 주창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 곧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하위 단계로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예비적 단계로 인식되기 때문에, 따라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있다. 현 정부의 구성원들이 ‘사회주의’를 말할 때는 민주사회주의적 의미보다는 공산주의적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성향은 현재까지도 공산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두 국가(중국, 북한)에 대한 호감과 동경을 수반하여 나타난다.

현 정부의 핵심 인물인 문재인 대통령, 임종석 전 비서실장, 조국 법무부장관이 마르크스주의에 어떻게 영향을 받았고, 북한에 어떤 태도를 보여 왔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보안법 폐지 및 연방제 통일을 주장해왔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을 존경해왔는데, 그의 자서전에서 공산주의자 리영희 씨와 신영복 씨를 존경한다고 밝혀왔다(『운명』 131쪽, 신영복 빈소에 찾아가서 한 말 “선생님의 ‘더불어’ 정신, 공존과 연대의 정신을 늘 간직하면서 실천하겠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데, 특히 김원봉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외에도 베트남 전에서 미국이 패배했을 때, 희열을 느꼈다고 표현한 것(『운명』 132쪽)을 보아도 친북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대통령 전 비서실장이었던 임종석은 임수경 방북을 주도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김정일 사망 당시 북한에 조문을 써 보냈고, 북한으로부터 답장을 받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대북송금 특검 수사 반대, 미국이 북한 인권법을 제정할 때 항의를 했고,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에는 북한 핵실험의 원인이 미국에 있음을 밝히는 등 친북의 행보를 이어왔다. 조국 법무부장관도 마찬가지다. 그의 석사 논문을 보면 소련의 형법에 대한 연구를 하여 학위 논문을 받았고, 울산대 강사 시절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연맹(이하 사노맹)에 가담했던 경험도 있다. 특히 ‘사노맹 사건’에 대해 정보기관에 의한 고문·조작사실이 폭로된 사건으로 국제엠네스티에 의해 양심수로 지정되어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관점도 있기는 하다. 조사 과정의 불법성과는 별개로 사노맹 자체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따르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던 조직으로 철저하게 마르크스주의 이념의 구체적 실현을 도모했던 단체였다.

이런 전력들이 있기에 많은 보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주의라고 했을 때, 민주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적 요소의 실현인 ‘민주사회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예비 단계로서의 ‘사회주의’로 이해한다. 따라서 현 정부의 정책 방향과 주장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것이 곧 공산주의적 의미는 아닌가? 혹은 친북·종북의 입장을 따르는 것은 아닌가? 자유민주주의에 근거한 협력과 통일이 아닌 사회주의에 근거한 협력과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거둘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렇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정책들이 있더라도 이들의 정책에 협력하고 동조하는 것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의 ‘공산화’에 협력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도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보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높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아니, 사회주의자는 아니더라도 그런 정책에 동의할 수 있는가? 대한 대답을 하고자 한다. 사견임을 전제로 한다면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자’가 될 수 없지만, ‘성경적으로는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성경에서는 개인주의든 사회주의든, 자유주의든 공산주의든 인간의 어떠한 정치 체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가 되는 것도 정답이 아니며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만약 이것들이 정답이었다면 예수님 부활 승천하신 이후로 늘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특정한 정치 체제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난 하나의 사회 제도의 형태이자 이념이다. 그것이 곧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념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를 고백하는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부활과 승천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자들이고, 종말론적 지평에서 현실을 이해하는 ‘주민주의(主民主義, 주님을 믿는 백성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이념과 체제를 선택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복음 안에 바르게 서 있다면, 어느 것을 선택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다만, 진리는 아니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삶의 현장 안에서 어떤 체제가 성경적 가치관을 가장 잘 구현해 낼 수 있느냐, 어떤 이념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를 잘 분별해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복음에는 사회주의적 가치보다는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가 더욱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적 가치는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보다 역사적으로 복음의 대적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 그곳에는 언제나 전체주의적 모습을 가지게 되며 자신들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죽이는 학살이 있었다. 공산주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잔혹한 만행에 대한 종합적인 학술 기록 보고서인 “공산주의 흑서(Le livre noir du communisme)”가 프랑스에서 1997년에 발간되었다. 이에 따르면, 공산주의에 의해 약 1억 명의 사람이 학살당했다. 이 숫자에 기독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정치적으로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곧 북한과 연결될 위험성이 늘 잔존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북한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사회주의 이념을 주로 주장해왔다. 이런 위험성과 더불어 사회주의는 개인보다는 사회, 국가를 우선시한다. 국가 권력의 비대화를 초래할 수 있고, 악용된다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더 나아가서는 신앙의 자유마저도 억압할 위험도 있다. ‘우리는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현재 한국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대안과 완성으로서의 민주사회주의가 아니라 대부분 공산주의의 전 단계로서의 사회주의를 따르기 때문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것은 복음의 대적과 방해가 되는 일에 동참하는 것임으로 지양해야 할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것이라도, 인간이 그것을 구현해 나가는 경우에 부정적인 모습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사회주의가 아주 이상적인 사회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이요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작금의 현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력획득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일 수는 있지만, 그것에 동조하는 자들이 되는 것은 곧 복음의 억압과 약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므로 정치적 사회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말에 오해 없기를 바란다. 사회주의적 가치라는 것은 공산주의의 예비적 단계의 사회주의적 가치가 아니라 과도한 경쟁과 자율만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하는 가치로서의 사회주의적 가치를 뜻한다. 이 사회주의적 가치는 성경의 모습 가운데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래서 본인은 이것을 ‘성경적 사회주의’라고 이름을 붙인다. ‘성경적 사회주의자’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복음이라는 새로운 언약 가운데 공동체를 돌보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경쟁,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도 신앙 공동체가 함께 약자를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정치적 사회주의자’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경적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철저하게 복음의 정신에 근거하여 약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복음의 공동체가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이는 억압과 반목과 갈등의 가치가 아니라 ‘섬김’의 가치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에 반하여 ‘정치적 사회주의’는 복음과는 무관하다. 그들은 이념의 실행을 위해 노력하며,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경제적 평등이라는 명목으로 기업 죽이기에 나선다. 그들의 추구하는 주된 가치는 투쟁이며 혁명이다. ‘성경적 사회주의자’와는 너무나 명백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정치적 사회주의자’가 아닌 ‘성경적 사회주의자’는 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주의자’가 된다, 혹은 ‘사회주의적 가치’에 동조한다고 할 때는 ‘정치적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성경적 사회주의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 기사를 통해 소개하도록 하겠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닫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자로 바르게 세워지되, 삶의 실천 영역에서는 복음 위에서 성경적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정성호  peripateo@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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