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굳이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교리가 바로 그 유명한 예정과 선택 교리다. 이 위대한 교리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유기했다는 하나님의 편협함을 드러내는 교리가 아니다. 이 교리를 좁은 지면에서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교리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요약한다면, 그것은 단언하건대 하나님의 주권이다. 지난 시간까지 살펴보았던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의 큰 물줄기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교리이다. 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섭리교리,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 그리고 구원의 확신 교리를 설명했다.

이제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교리는 ‘하나님의 영광 교리’이다. 하나님의 영광 교리는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이다. 물론 자본주의 정신에서 구원의 확신을 위한 금욕적 삶도 핵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모든 경제활동의 궁극적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있다고 보았다. 막스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뱅주의를 신봉한 ‘성도들’의 삶은 오로지 초월적인 목표인 ‘구원’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그들의 현세적인 삶은 이 땅에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는 유일한 관점의 지배 아래에서 철저하게 합리적으로 조직되었다.”1)

구원의 확실성 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과 그대로 직결된 문제로 이해됐다. 왜냐하면, 구원의 확실성이 단순히 바리새인과 같은 금욕적 삶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행위 구원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수도원적 금욕주의 삶을 살았다는 베버의 주장은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표징으로서의 삶을 의미했다. 신자에게 거룩한 행위는 존 머레이 교수의 표현처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관계” 이해된다.2) 구원받은 자의 표징은 그들의 경건한 삶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 경건한 삶이 바로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한다.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성화를 종교적 행위에서 찾기보다는 일상의 경제 윤리에서 찾았다는 점이 가톨릭과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단순히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정이 도덕을 유발한 것인지를 찾는다. 베버는 구원의 확실성 교리와 하나님의 영광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직 택함 받은 자들만이 실제로 ‘유효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오직 그들만이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중생과 실질적으로 거룩해지는 성화를 토대로 한 진정한 선행, 즉 단지 겉모양이 아닌 참된 선행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3)

여기서 우리는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형성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개혁자들의 엄격한 경제 윤리는 단순히 지옥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다. 이들의 금욕주의적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이중 계명과 직결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적 엄격성에 기초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신자의 심령 속에 사랑으로 작용한 것만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금욕적 윤리의 삶을 살아서 스스로 공덕을 쌓는 데 관심을 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윤리적 삶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자기 심령에 작용한 결과인지, 중생한 결과인지 확신하고 싶었다. 때문에 그들의 경건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가 나와야 했다(마 5:20).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도덕이 아니다. 참으로 성령님이 심령 속에 작용한 결과로 나오는 경건을 열망한 것이다. 이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다.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가능한 도덕적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칼빈도 같은 말을 했다.

“오직 신앙의 아주 분명한 열매들만이…자신이 구원받은 자에 속해 있다는 신자들의 생각을 증명해 주는 확실하고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표지를 제공해 준다.”4)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덕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는”(마 19:26) 수준이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의 호소처럼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도덕성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신자의 내면에서 일하신 결과로서의 도덕이 나오려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어야 한다(히 11:38).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그토록 부의 축적을 강조하면서도 부자들이 타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또 전통적 자본주의(천민자본주의)와 구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의 축적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에 있다. 자연인들도 충분히 가능한 도덕적 행위를 추구한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불법과 싸우며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도덕적 수준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데 있다.

광풍처럼 몰아닥치는 재물의 유혹과 위협은 자연인들의 도덕적 수준으로는 한계가 있다. 여기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 한계점에 도달하면 적당히 타협하고 위선으로 빠진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자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근면과 검소와 정직과 성실로 재산을 축적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죽거나 망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야 한다. 자연인들 수준의 도덕적 행위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믿음의 행위로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어느 정도는 도덕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하나님만 가능한 도덕적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성화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덕적 행위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목숨을 내어놓는 수준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업을 하다가 망하면 망하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믿음은 자기의 의지로 나온 도덕이 아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부터 나오는 도덕이다. 이런 믿음의 경제활동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미주

1) 막스 베버,「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박문제 역,(현대지성, 2018),p.216.

2) 존 머레이,「구속론」, 하문호 역,(성광문화사, 1994),p.197.

3) 막스 베버,op.cit.,pp.204-205.

4) 칼빈, 기독교 강요, 1536년 초판 제1장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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