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적 사회주의, 과학적 사회주의, 공산적 사회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성경적 사회주의

정성호 목사(대구서교회 부목사)

앞선 글을 통해서 우리는 정치적 사회주의자는 될 수 없지만, 성경적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았다. 그렇다면 성경적 사회주의자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다. 먼저 서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필자는 ‘사회주의가 정답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필자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정치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따르고 반드시 수호해야 하며, 경제에서는 더 나은 대안이 없는 한 자본주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각 제도에 문제점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문제들은 개선을 해나가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한계와 문제를 지적하고 나선 사회주의의 몇몇 개념들은 함께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성경에서도 완전한 개인의 자율성에 근거한 자본주의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뛰어넘는 복음을 붙들며 살아가야 하지, 현실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자들의 힘을 실어주는 잘못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다만,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를 구분하기 위해 사회주의에 대한 설명이 길어 졌다는 점과 그 구절이 꼭 사회주의적 개념만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경구절을 찾을 때 사회주의라는 선 이해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eis-gesis)은 미리 밝히는 바이다.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적 사회주의)와 공산적 사회주의

먼저 ‘사회주의’라는 용어의 두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자. 사회주의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는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공상적 사회주의)가 있고, 둘째는 마르크스에 의한 공산주의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제시되는 사회주의(과학적 사회주의)가 있다. 먼저 ‘과학적 사회주의’를 살펴보면, 마르크스는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를 위한 예비적 단계로써 이해를 한다. 이를 공상적 사회주의와는 구별되는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소수의 자본으로 다수의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사회를 혁명을 통해 제거하고,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더불어 분배의 평등을 추구한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 그리고 마침내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 사회주의가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통용되는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적 사회주의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주의를 말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 즉 공상적 사회주의가 있다. 사회주의에 대하여 말할 때, 공상적 사회주의를 놓치고 마르크스적 사회주의만 이야기한다면 오히려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상적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것은 1789년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프랑스와 영국에서 출현한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프랑스의 꽁트 드 생시몽(Conte de Saint-Simon), 샤를르 푸리에(Charles Fourier)가 있고 영국의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이 있다. 이들은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자본가와 노동가의 경제적 격차가 커지며, 비인간적인 노동을 해야 하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그 대안으로 ‘사회적’인 방법을 제시하면서 등장했다. 이들은 ‘사회적 지옥’인 당시의 사회에 반대하여서 자본가들의 탐욕을 억압하고, 공동체(혹은 사회)를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푸리에의 경우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악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으로 대안공동체인 ‘펄랑주’라는 작은 공동체를 만든다. 1620명이 함께 살면서 노동하고 함께 나누어 먹는 농업공동체이다. 경쟁보다는 조화를 추구하며 적절한 노동과 적절한 분배를 통해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꿈꾸었다. 오웬도 영국이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6~8세가 되는 아동들마저도 하루에 13시간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현실을 바라보며 사회주의적 개혁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그는 ‘새로운 사회관’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목적은 ‘행복의 추구’라고 단정한다. 이의 달성을 위해 ‘공동체의 행복’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는 꿈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공장 노동자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생필품, 의류 등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회사가 단체로 구입하며 노동자들에게 시중 가격의 1/4에 판매함으로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을 상승시키려고 노력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공동체적 노력을 통하여 산업화가 가져다주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려고 하는 시도를 했다.

공상적 사회주의가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적 사회주의)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사유재산의 인정’이다. 그들은 산업화로 인해 촉발된 인간소외 문제, 노동의 문제, 부의 집중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 혹은 ‘공동체’를 제시하기는 하였지만, ‘사유재산’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생시몽은 산업화의 출현은 곧 봉건 체제의 종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산업화의 완성이 계급 간의 갈등, 계급투쟁의 종말로 보았다. 국가는 각 개인이 산업화를 위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생시몽은 빈부의 격차문제가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 상호 간의 불신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이익은 사회의 공통 이익으로 귀결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받기 때문에 사유재산이 인정된다. 푸리에도 사유재산을 인정하였다. 그는 ‘펄랑주’라는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했지만, 그 안에서도 분배의 차이는 있었다. 잉여 생산물의 경우 자본을 투자한 이들에게는 5/12, 일반적인 노동만 제공한 이들에게는 3/12, 관리업무를 포함한 특수한 기능을 제공한 이들에게는 4/12를 각각 분배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자본을 투자한 이들에게는 특권을 부여하는데, 분업화된 노동조직의 수장이 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평등을 추구하는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분배의 차이로 인한 사유재산을 인정한 것이다. 오웬도 마찬가지다. 그는 급진적으로 사회적 평등을 추구하여서 새로운 공동체를 마련하였다. 공동체 내에서 모든 구성원들의 그의 출신 배경이나 사회적 위치에 상관없이 모두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공동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상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과도기적 사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문제는 그가 꿈꾸는 대로 완전한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그의 실험은 과도기적 사회의 수준에 머무른 채 끝났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과를 미루어 짐작할 때, 오웬 또한 완전한 평등이 지배하는 공동체의 설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었으면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을뿐더러 사유재산을 폐지할 의사도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것을 정리해보자면 결국 산업화와 초기자본주의에 의해서 발생하는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 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공동체적 대안의 제시, 경쟁보다는 협력을 하지만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태도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른 과학적 사회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보다 온건한 사회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나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모습

먼저 성경적 사회주의자라는 용어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자. 이미 사회학적으로는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영국의 F. D. Maurice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성경적 사회주의자’라는 용어를 제시한 까닭은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방향에 모든 것을 다 동의하며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기독교’라는 단어와 ‘사회주의자’라는 단어도 모순이다. ‘성경적’이라는 단어와 ‘사회주의자’라는 단어도 또한 모순이다. ‘사회주의’라는 개념 자체는 사상적 발전의 맥락에서 볼 때,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태어났다. 즉, 우주와 천지만물을 바라봄에 있어 하나님이 필요 없는 관점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이 계몽주의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유물론적 입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하나님 없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성경적(혹은 기독교) 사회주의자’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다. 굳이 용어를 사용하자면 앞선 기사에서 사용된 ‘ 주민주의(主民主義, 주님을 믿는 백성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 혹은 ‘예수주의자(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정도의 용어가 적당하겠다. 아니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오해가 될 수 있으니 그냥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 이라 하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과연 성경에서는 공상적 사회주의자가 추구했던 모습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먼저 구약에서 나타나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희년’제도 이다. 이 ‘희년’제도는 인간 개인의 상황으로 인하여 상속받았던 토지를 잃어버리게 될 경우, 50년째 되는 해에는 모든 채무를 털어버리고 원래의 주인에게 귀속시키게 하는 제도이다. 또한, 이때는 노예로 팔렸던 자들도 다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자신이 취득한 토지와 자신이 돈을 주고 산 노예를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다스림과 그분의 가르침 안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제를 향하여 영원한 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토지를 사고팔고, 노예를 사고팔며, 재산권을 행사하는 등 일정 부분에서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마지막에는 율법의 원리를 따라 모든 것을 처음 상태로 회복시켜야 했다. 이런 율법의 정신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에 대한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고,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신27:17), 압제를 당하는 자를 위한 말씀(시 9:9, 10:18, 잠28:15, 22:22 등), 그리고 ‘룻기’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 땅에서의 모든 소유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통해 함께 세워져야 함을 보여주셨다. 구약 말씀은 인간의 무한한 자유와 자본의 획득만을 추구하도록 허락하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서로를 돌아보며 세워나가도록 말씀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실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공동체를 통해서 해결책을 찾아 나가고자 하는 공상적 사회주의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도행전2장 말씀

 

신약 성경에도 좋은 예가 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본문으로써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 이후에 신앙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것을 팔아 가진 것을 통용하고 연약한 자들을 돕는 모습이다(행2:43-47, 행5-6장).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니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들이 ‘남’이 아니라 ‘우리’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그들이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입든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복음으로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많이 가진 자들이 자신의 것을 팔아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도와주게 된다. 이로써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 이런 공동체 의식은 개 교회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큰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했을 때, 바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모금된 부조를 챙겨 예루살렘을 방문했다(행11:27-30). 이는 지역교회 사이에서도 함께 협력하며 서로를 도와주는 관계가 잘 정립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신약의 예들을 통해서도 복음으로 함께 묶인 신앙공동체가 개인의 능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개인의 가치를 넘어서 공동체(좁은 의미로서의 사회)로서 연약한 자들을 돌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에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약자의 존중, 서로 상생하는 것, 사회가 개인의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 등의 가치가 반영되어 있다. 무한한 경쟁 사회 속에서 낙오하며 신음하고 있는 자들을 교회 공동체가 함께 보살피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복음의 가치를 구현해 내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자본주의만 강조해서는 나타날 수 없는 부분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뛰어넘는 복음의 가치

작금의 한국 사회는 이념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이 고스란히 교회 내에 들어와 교회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진보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전적으로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 정치적인 개별 사안에 따라서 필요한 태도를 달리 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두 번의 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굳이 우리가 굳이 정치적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치의 입장과 상관없이 우리는 성경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대안적 모습을 통해 얼마든지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고, 공동체의 가치를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가치를 제공한다.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는 우리의 것을 내려놓고 연약한 자들을 돌볼 수 있으며,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는 주어진 삶의 모습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할 수 있다.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라는 사회제도가 타락한 인간의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라, 오직 복음의 능력만이, 그리고 그 능력을 따르는 사람들이 사회 각처에서 복음의 가치대로 살아내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자유와 경쟁만을 강조할 때에도 공동체를 돌보았던 복음의 가치를 제시할 수 있고, 개인을 말살하고 제도와 사회를 강조할 때에도 개인의 필요를 인정했던 복음의 가치를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오직 복음의 가치 안에서만 현실의 문제를 개선해 나가고자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제도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관점에서 각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다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 어떤 사회적 제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고민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떤 제도가 복음의 가치를 유지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가? 라는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본다면 정치적 사회주의보다는 정치적 자본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에게는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성경적 사회주의자, 아니 진정으로 복음의 가치, 성경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사회 제도에 그 해결책을 호소하는 것으로서 매우 어리석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할 때에, 복음을 억압하고 기독교를 해체하려고 하는 정치적인 사회주의(우리나라에서는 과학적 사회주의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에 힘을 싣게 되는 잘못을 범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복음적 가치, 성경적 가치에 근거하여 늘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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