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진리이기에 사회가 좌경화 될수록 우익처럼 보이고, 우익화 될수록 좌익처럼 보인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기독교 안에서 정치에 대한 담론은 불문율처럼 여겨진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용어의 왜곡은 거의 대다수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정치에 한 무관심이 곧 경건이라는 등식으로 오해 하도록 만들었다. 정교분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정치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영국에서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억압받았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신대륙으로 건너가 국가를 세운 청교도들이 이런 종교 박해가 신대륙에서도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원칙이었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미국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다. 그는 정치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세 가지 세속정부의 정교분리 원칙을 규정했다. 첫째로 정치는 교회의 활동에 관여하지 말 것, 둘째는 정치가 교회에 해가 되는 법을 만들지 말 것, 셋째로 정치는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런데 이런 정교분리의 원칙과 의도가 한국 정치에서는 교묘하게 왜곡되고 유린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정교분리를 잘못 이해한 탓에, 좌익들에 의해 신앙의 자유가 점점 억압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개혁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뿐만 아니다. 이런 좌익 정치가들의 종교 박해에 대해 교회가 목소리를 내면 정교분리 원칙을 어기고 있다고 안팎의 공격한다. 물론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개혁과 핍박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교분리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비판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몇 개의 용어를 먼저 정리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 가운데 하나는 ‘좌익’을 ‘진보’로 지칭하는 것이다. 좌익을 진보로 지칭하도록 한 것은 대중에게 좌익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만든 전술에 불과하다. 좌익은 결코 진보 일 수 없다. 왜냐하면 좌익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진보를 가져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좌익의 철학 배경은 유물론, 진화론, 무신론, 마르크스 사회 혁명론 등이다. 이런 철학적 배경은 역사에서 끊임없이 인류는 퇴보를 가져왔다. 좌익들이 들어가는 곳마다 문명이 사라지고 봉건주의와 유사한 전체주의가 일어났다. 풍요가 사라지고 극심한 빈곤이 재앙처럼 확산됐다. 윤리와 도덕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끝을 모르는 혁명의 공포정치만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좌익들은 어디를 가든지 예외 없이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급진적 적대정책을 펼쳤다. 이것을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들은 그냥 ‘좌익’일 뿐이다.

그럼 ‘좌익’이 무엇인지 용어를 정리해보자. 이 용어를 정리하려면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거론해야 한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혁명 역사는 생략하고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당시 좌익은 혁명을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가진 부류들을 지칭했다. 반대로 우익은 혁명을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에 가진 사람들을 의미했다. 여기서 ‘익’에 해당하는 한자는 ‘날개 익(翼)’자를 사용한다.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혁명 당시, 좌익과 우익이 앉는 좌석은 평민대표들이 지정했다는 사실이다. 서구 문화에서 ‘오른쪽’은 존경하고 우월하며 좋은 위치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왼쪽’은 영어의 고어에서부터 ‘불길한’ ‘사악한’의 의미를 가진 ‘sinister’를 사용할 정도로 부정적이고 나쁜 의미를 상징했다.1) 이런 역사적 관점을 이해한다면 좌익이 스스로를 ‘진보’로 지칭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아무런 근거 없는 자기 위장의 프레임에 불과하다.

이제 ‘우익’이라는 용어를 정리해보자. 먼저 우익이라는 용어를 ‘보수’와 혼용하는 것이 결코 적절치 못하다는 점부터 집고 넘어가자. ‘우익’이라는 용어는 ‘좌익’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용되는 ‘상대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동안씨의 주장처럼 우익과 좌익이라는 용어가 명사(名詞)적 용어가 아니라 대명사(代名詞)적 용어이기 때문에 사상적 경향에 따라서 우익과 좌익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2) 프랑스 혁명 당시에 좌익은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또 우익은 혁명을 반대하고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사회주의세력이 좌익의 명칭을 가지면서 자동적으로 보수주의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이 우익이라는 명칭을 소유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우익이나 좌익이라는 용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기독교는 진리이기 때문에 사회가 좌경화 되면 우익처럼 보이고, 우경화 되면 좌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이 끊임없이 좌와 우로 도약하는 흐름 속에서 비춰지는 착시현상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좌익이나 우익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용어 자체가 바로 변증법(辨證法)적 논리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좌익과 우익은 말 그대로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라는 뜻이다. 이 말을 변증법적으로 생각해 보자. 새나 비행기의 몸통이 비상하는 것을 변증법의 합(合)에 해당한다고 하자. 이를 위해 날개는 반드시 들이어야 한다. 왼쪽과 오른쪽 날개가 있어야 한다. 이 둘은 변증법의 ‘정’과 ‘반’의 관계로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정치관을 ‘우익’이라고 말하자는 주장은 기독교 정치관이 절반의 진리에 불과하다는 뜻이 된다. 상대적으로 좌익 정치관이 비록 무신론, 진화론, 인본주의, 혁명주의를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반절의 진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 정치관을 ‘보수’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만 우익이나, 우파로 지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제 ‘우파’와 ‘좌파’라는 용어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오늘날 보수를 흔히 ‘우파’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파라는 말은 아주 모호한 표현이다. ‘파(派)’에 해당하는 한자는 ‘물갈래 파’를 사용한다. 이 말은 하나의 이념(파도) 안에서 나눠진 갈래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보수라는 파도 안에서도 왼쪽으로 치우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보수 좌파’라고 한다. 반대로 오른 쪽으로 치우치면 ‘보수 우파’라고 한다. 반대로 좌익 안에서도 보수에 기울어지면 ‘좌익 우파’, 급진적인 쪽으로 기울어지면 ‘좌익 좌파’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보수’가 무엇인지 용어를 살펴보고 글을 정리하자. 보수란 역사 속에서 이미 시도된 가장 탁월하게 검증된 조상들의 지혜를 존중하는 태도를 말한다.3) 이런 태도는 종교개혁의 정신에서 나왔다. 개혁자들은 끊임없이 ‘개혁’(reformation)을 외쳤다. 개혁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reform은 again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접두어 ‘re’와 형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form’으로 구성된 합성어다. 다시 말해서 본래의 형태(성경)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이것이 영어로 ‘개혁’(reformation)이다. 개혁은 체제 자체를 뒤엎자는 운동이 아니다. 가장 탁월한 본래의 form(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창조 질서를 재발견하고 회복하자는 운동이다. 이것이 보수의 논리이다. 흥미로운 점은 개혁자들의 이런 개혁 운동이 역사의 진보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기독교 보수 정치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역사의 진보가 혁명을 통한 것이었다는 좌익학자들의 주장은 궤변에 불과하다. 역사는 좌익 혁명이 끝을 모르는 퇴보(退步)의 연속이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 보수 정치관에서 좌익들의 혁명적 정치관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이유를 러셀 커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득한다.

“가장 영리한 사람이라도 수 세기 동안의 합의를 무시하고 이성의 생성물로만 맞서려 한다면 그저 자만에 들떠 잘난체하는 꼴이 된다”4)

계속해서 커크는 에드먼드 버크의 주장을 인용한다.

“민간에 전래된 지혜나 법칙을 빼앗긴다면 인간은 선동가를 부추기거나 사기꾼을 배불리고, 전제군주에 항복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다.”5)

미주

1) 양동안,「사상과 언어」,(북앤피플,2011),p.42.

2) Ibid.,p.45.

3) 러셀 커크,「보수의 정신」,이재학 역,(지식노마드,2018),P.64.

4) 러셀 커크,op.cit.,p.118.

5)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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