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호 목사(대구서교회 부목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서, 특별히 문화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은 크게 세 가지 이다.1) 첫 번째는 세상 문화는 기독교와 하등 상관없는 것이며, 오히려 악이 지배하는 곳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최대한 세상과 떨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이는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수도원 운동, 재세례파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하여 오셨고, 세상과 구별되지 않으시는 분으로 여기는 입장(문화의 그리스도)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곧 교회로 여기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기독교 역사 가운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소시니안주의로 나타났고, 근대 이후에는 자유주의신학이라는 입장으로 나타났다. 세 번째는 개혁주의 신학적 관점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과 구별 된 존재이지만, 세상을 말씀으로 변혁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세상과 분명히 구별 된 존재이지만 세상을 떠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말씀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이 속한 곳을 변혁시키는 것이다. 각각의 입장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하여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진다.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의 하나님 나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역사관과도 연결이 된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말씀하셨다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팔레스틴지역에 국한되었던 하나님 나라가, 이제는 인종, 성별, 문화, 전통 등 모든 차별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신 백성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로 오늘까지 왕성하게 확장되어 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다면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도래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완성되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중첩되는 시기’로 본다. 여전이 죄의 영향이 남아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어 성도들의 삶을 다스리고 있는 시기이다. 이 중첩기에 살아가고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는 구별되면서 동시에 세상을 떠나지 않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역할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즉, 이미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의 은혜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 내가 속한 삶의 현장에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붙들며, 말씀에 근거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진리의 문제에는 타협하지 않으며, 그 외의 일에는 관용과 사랑으로 품고,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세상 속에서도 선포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 2)

우리의 논의를 ‘역사’의 관점으로 확장시켜보려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진정한 역사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 구별 없이 역사라고 하면 이 땅의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역사가 진짜 역사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역사가 진짜 역사가 아니라 ‘구속의 역사’가 진짜 역사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의 모습이 곧 삼위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들과 영원토록 누리게 될 은혜임을 보여주셨다.3)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생명나무를 선택하기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타락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여전히 세상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은 하고 있는데, 죄로 인해 타락했고 방향성을 상실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새로운 계획을 이루어 가실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타락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구속의 역사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 원시 복음의 형태로 되어있는데,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역사의 기준이 새롭게 제시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와 전 피조물을 탄식(롬8:22) 가운데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그 결과 인간의 역사 가운데 두 역사로 중첩되어 진행된다. 이 세상 속에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며 살아가는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기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장으로 활용하신다. 인간의 문명은 계속 발전해가나(창4장)4), 동시에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도 이루어져 간다. 성경은 창세기 12장 이후로 아브라함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형성이 되며,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는지를 기술한다. 더 나아가서는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왕을 대리 통치자로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해 가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들이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시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으며, 하나님의 예언대로 70년이 지난 후에 다시 가나안 지역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침내 하나님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시며, 더 나아가서는 재림의 때에 온전하게 완성시킬 것에 대한 약속을 해주신다.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의 종국은 인간 역사의 진보에 따른 어떠한 결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성경은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보여주면서,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역사를 따라 성취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야곱이 요셉을 따라 애굽에 내려갔을 때, 바로를 향해 축복해주는 모습(창4:47)은 세상의 왕도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포함되어 축복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성경 여러 구절을 통해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에도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주장하셨고(출 4:21 ; 7:3 ; 14:4),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스라엘 민족들을 괴롭히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다(삿2:14, 23). 남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떠나 패역한 삶을 보여줄 때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시기도 하셨다. 이런 구약의 여러 내용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운행해 가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라고 설명한다. 이 세상의 모든 왕권이나 주권이나 통치자나 권세가 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왔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에 대한 바른 고찰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이라는 책에 잘 정리되어 있다.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로마가 게르만 민족에 의해서 점령을 당하게 될 때, 기독교는 여러 오해와 공격을 받게 된다. 이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통해, 이 세상의 역사와는 다른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여전히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지상의 도성을 만들었으며, 구속의 은혜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하나님의 도성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5)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찬양하는 삶,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어거스틴은 설명한다.6)

초기 기독교 성도들은 강력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갔다. 이 세상의 역사가 진짜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계22:20). 그러나 재림의 시기가 지연이 되고,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인간 이성이 중요시되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학문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세상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이 분리가 되어서 더 이상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관을 학교에서 가르칠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 성경의 역사관은 "Geschichte" 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영역으로 축소되고, 객관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Historie"라는 역사 이해가 객관성이 있으며, 이성을 가진 인간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역사라고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Geschichte”가 주관적, 신앙적 역사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객관적이고 진정한 역사이며, “Historie” 성경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장(場)으로서, 하부(下部) 역사라고 하겠다.7)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이 세상의 역사가 진정한 역사가 아니며, 성경에 계시 된 구원의 역사가 진정한 역사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진정한 역사인 구속의 역사만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궁금증에 대하여 성경은 이사야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답변해 주고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24,26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 임하게 될 때, 세상의 영광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땅의 왕들이 자기의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갈 것이며,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이사야 60장의 말씀을 축약해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사야 60장에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때에 회복될 때에, 예루살렘이 받게 될 영광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방에서 나라들과 왕들이 예루살렘으로 나아오게 될 것이며, 수많은 재물과 보물을 가지고 와서 예루살렘을 영화롭게 할 것임을 기록하고 있다. 즉, 이 세상의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모든 것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요한계시록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세상의 역사 속에서도 변혁자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진정한 역사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 경작하고 가꾸었던(창2:15)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의 삶 가운데 만나게 되는 반 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들에 대항하여 진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 땅에서 더욱 풍성하고 찬란하게 기독교문화를 이루어 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가 현실을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성경적이지 않은 것들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른 부정적인 일들이 발생할 수 있고, 균형을 잃어버린다면 좋은 중심을 왜곡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선포되는 일에 계속해서 동참하고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Pro R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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