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은혜로 하자'고 말할 때가 많다. 과연 맞는 말인가? 대개 자신의 무책임,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하기 위해 은혜를 들먹일 때가 많다. 자신의 무책임으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은혜로 하자고 말한다. 대충 넘어가자, 문제삼지 말고 무마해달라는 뜻이다.

라반은 야곱에게 우리는 친척이요 서로 사랑하는 관계니까 내 집에 머물라고 말한다. 겉으로 보면 사랑을 강조하는 은혜로운 말이다. 그러나 내용은 야곱을 계속해서 싼 임금으로 붙들어매려는 욕심이다. 은혜를 들먹이며 약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교활함이다.

은혜를 들먹이며 약자에게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많은 부교역자들의 생활이 열악하다. 교회가 은혜를 강조하면서 그들에게 과도한 희생을 요구한다. 기본적인 생활이 힘들 정도의 생활비를 지급한다. 그리고 은혜로 사역하라고 말한다. 다른 부분에 과도한 지출이 있으면서 이런 구조를 유지하는 것은 악이다.

미국에 사는 사람에게는 영주권이 절실한가 보다. 교회는 영주권 없는 사역자를 데려다 놓고 영주권을 미끼로 저임금, 강요된 사역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은혜로 하자고 말한다. 은혜의 남용이요 은혜의 오용이다.

먼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풍성히 받은 사람이 있다. 더 받은 것은 사명이다. 더 받은 것은 남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누고 섬기기 위한 도구다. 더 받았기에 더 많은 자기 희생이 가능하다.

은혜는 자기 희생을 통해 남을 살리는 것이다. 은혜를 들먹일 때는 항상 물어야 한다. 은혜를 말할 때 누구에게 유리한가? 은혜를 말할 때 자기 희생이 있는가? 은혜를 말할 때 남을 살리는 힘이 작동하는가?

로라 이야기가 기억난다. 15년 전쯤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로라라는 소녀가 가출했다. 마약 하고, 문란한 생활을 했다. 로라의 어머니는 백방으로 딸의 연락처를 알려고 노력했다. 누가 로라를 봤다는 말을 들었다. LA 어느 지역에서 창녀노릇을 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LA 인근 지역이 얼마나 넓은가?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다. 어머니는 딸을 찾기 위해 딸의 사진이 들어 있는 전단지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마음에 걸렸다.

"이 전단지를 보면 로라가 얼마나 창피해할까? 나중에 시집 가는데 지장이 있겠다."

딸을 배려하는 마음이었다. 어머니는 고심 끝에 전단지에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넣었다. 그리고 이렇게 인쇄했다.

"이 사진의 엄마가 딸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사흘 후에 로라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한다. 자기 사진을 넣는 마음, 이것이 은혜다. "무너져도 내가 무너지는 것이 낫다. 창피를 당해도 내가 창피당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과 태도가 은혜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항상 칭찬과 격려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해를 살 때가 있다. 매도당할 때도 있다. 은혜받은 사람은 힘들어도 계속한다. 당해도 계속한다.

자기 희생 속에서 상대를 살리는 일이라면 계속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산다. 이것이 은혜다.

자기 희생을 통해 남을 살리는 은혜의 통로가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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