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적한 길에 교통 신호기가 하나 세워졌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 주민들의 안전출입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지신호가 아파트 쪽보다 통행로 쪽에 더 오래 켜져 있었다. 처음에는 나의 착각이겠거니 하고 성실하게 신호를 따랐는데, 다른 차들이 하나씩 둘씩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것이 아닌가. 아파트 쪽에 개미 한 마리 출입하지 않는데도 정지신호가 켜져 있기 때문에 아까운 시간과 기름을 낭비하면서 기다리려면 짜증도 나고 스스로가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뒤에 따라오는 차가 전조등을 껌벅이면서 가자고 재촉하면 버티기가 더 어렵다.

 

냉소 대상이 된 준법 교육
어떤 사람은 아파트 주민 위주로 신호가 설정된 것은 그 아파트에 권세 있는 사람이 살기 때문일 것이라 했다. 만약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 세력가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얼마 후부터 그 정지신호를 지키는 차는 거의 없게 되었고, 아파트 주민들은 신호기가 없을 때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파란 불을 믿고 진출하다가는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는 차들과 부딪치기 십상이다. 그것을 깨달았는지 며칠 전부터 아예 신호기 작동을 정지시켜 버렸다. 신호기 하나 세우는데 드는 4000만∼6000만원이 그렇게 허비된 것이다.

선진국들에 비해서 우리의 준법정신은 매우 낮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겠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역시 사회 지도층과 고위 공직자들이 법을 너무 많이 어기는 것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법을 만드는 국회가 스스로 만든 법과 규정을 깔아뭉개고 법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원 구성을 82일이나 지연시킨 것은 초 중 고 교사들이 애써 시켜 놓은 준법교육을 냉소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해서 약해진 시민들의 준법의식은 다시 국회의 위법을 쉽게 용인하고 마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또 다른 원인은 시민들이 지킬 수 없거나 지키지 않을 법을 너무 많이 만든 것이다. 노래방을 규제하는 음산법, 성매매특별법, 집시법 등에는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조항이 많아 지키기도 힘들고 단속하기도 어렵다. 어떤 도로에는 오히려 설정된 제한속도를 지키다가 사고를 일으킨다.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지키지 않고, 규제하고 단속하기가 어려워서 방치해버리면 그 법만 무력해질 뿐 아니라 법의 권위가 전반적으로 무시되는 것이다.

법 전문가들에 의하면 법에도 체면이란 것이 있어 어떤 법은 잘 지키지 않는다고 안 만들 수 없다고 한다. 특히 노동법에 그런 조항들이 많다. 국가의 위신도 고려해야 하고 외국의 눈치도 보아야 하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키지 못하거나 지킬 가능성이 약하다고 모두 그런 성질의 법은 아니다. 불필요한 신호기와 비합리적인 신호체계는 체면과 아무 관계가 없다. 권력 센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법 제정하는 사람들의 상상력 결핍이 그런 법과 규제를 만들어 낼 뿐이다.

 

좋은 사회는 법 많을 필요 없어
지키지 못할 법은 불공정한 법집행을 유발한다. 즉 재수 없는 사람만 걸리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따라 정지신호를 무시하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순찰차에 들켜 벌금을 낼 수 있고, 교통위반 단속 건수 올리는 데 함정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단속관의 자의적 판단에 빌미를 주어 밉게 보인 사람만 골탕 먹을 수 있다.

어떤 언론과 시민단체는 법 제정 건수로 국회와 의원을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기준이다. 사실 좋은 사회에는 법이 많을 필요가 없고, 법이 많아야 사회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은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법 외에는 만들지 말아야 하고, 지키지 않을 법은 가능한 한 없애야 한다.

국회는 법 제정 못지않게 잘못된 법의 개정이나 폐기에도 관심을 쓰고, 스스로 지키지 않을 법은 빨리 폐지해야 국회와 법에 대한 냉소가 줄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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