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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이승만 대통령의 업적2020년 6·25 전쟁 70주년 기념 코닷 기획기사(3)
  • 정성호(대구서교회 부목사)
  • 승인 2020.01.19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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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공과(功過)에 대하여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은 과(過)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나, 공(功)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미 우리에게는 그의 과(過)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굳이 여기에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며, 이번 기사에서는 그의 공(功)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1).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다음 기획기사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정치분야 -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 시기부터 꾸준하게 반공사상을 주창해왔고, 이로 인해 미 군정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북한은 정부 명칭만 가지지 않았지, 해방 이후 소련의 주둔 아래에 1946년 3월 민주개혁을 주창하며 중앙집권화를 강화했고, 1946년 11월 도, 시, 군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1947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런 위협 속에서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하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 이승만은 정치 분야에서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물론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전제적인 권위주의적 통치를 했고, 3·15 부정선거와 같은 오점을 남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치제도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에,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대통령 중심제 정부를 확립했다. 그는 대한민국을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제를 모방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가 통치했던 12년의 시간 동안 관제 여당을 앞세워 통치를 실시했지만, 언론의 자유를 비교적 폭넓게 허용하였고, 선거 및 의회 제도를 존중하며, 양당제도의 발달을 용인하였고, 지방자치제를 도입2)하는 등 형식상 민주주의의 겉모습을 유지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정직후>

 

외교분야 - 탁월한 외교력

앞선 기사(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탄생부터 대한민국 건국까지)를 통해 살펴보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직후 국내의 여러 단체로부터 중요 직을 부여받았다. 이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이승만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핵심은 그의 외교력에 있었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고, 미국에서 활동한 덕분에 국제정세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었고, 국제사회에서 약소국의 대표로 어떤 외교를 펼쳐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 유엔과 미국 등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획득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1952년에는 ‘인접 해양에 관한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일명 이승만 라인)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여 독도를 포함한 해역에서 어족자원 및 해저자원을 보호하였는데, 이는 1965년 일본과 어업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한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의 역할을 해왔다. 또한, 6·25전쟁 막바지에 미국이 단독으로 휴전을 모색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 등 미국의 정치가들을 회유 내지 협박하여 1953년 10월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시작부터 우리나라의 안보를 외세에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일각의 비평적 견해도 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손꼽히는 업적 중 하나이며, 미국이 제공하는 군사적 보호우산 아래 나라가 발전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농지개혁을 위한 연설>

 

경제분야 - 토지개혁의 성공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남한의 토지개혁 성공이다. 6·25 전쟁 발발 전에 시작된 토지 개역을 통해 기존의 지주 토지 소유제를 청산하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자작농적 토지 소유제를 확립하였다. 그 결과 전제 토지면적에 대한 자작지의 비율은 92.4%에 달하게 되었는데, 해방 당시 자작지의 면적이 35%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볼 때, 한국 농업구조상 획기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이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북한은 이미 1946년 3월에 북한 전 지역에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지주·소작제도를 일소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땅을 가져보고 싶은 것은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 동안 고통받았던 농민들의 오랜 소망이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해 준 토지개혁은 북한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3) 북한의 인식에서는 토지개혁이 조선의 완전한 민주 독립 국가건설의 초석을 닦는 일로 인식되었기에,4) 아직 토지개혁을 실시하지 못한 남한 사회에 영향을 미칠만한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특히 38선 이북의 이러한 상황은 여러 통로를 통해 남한에 전달이 되었고, 38선 이남의 정치세력들을 다층화 시키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남한은 내부적으로 갈등과 분열을 겪게 된다.5) 이에 미 군정은 1948년 3월 22일에 과거 일본인 소유 토지에 대한 개혁적 조치인 법령 174호를 전격 시행하여 토지개혁의 물꼬를 텄고, 이후 1950년 3월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법 공포로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는 남한의 토지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남한지역까지 확대하려고 했던 북한의 의도를 완전히 무너뜨렸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6), 한국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데 기여하였으며, 6·25전쟁 시 남한의 농민들이 북한군에 부역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교육분야 - 의무교육제도의 도입과 문맹 퇴치 운동전개

이승만 대통령은 6년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성인들 대상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령아동의 취학률을 95.3%로 높이고, 해방 당시 80%에 달했던 문맹률을 22%(남11%, 여33%)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이 대통령의 정부는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대폭 증설하고,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산업화에 필요한 고급 인재를 양산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의 대학과 전문학교는 19개교, 학생 수 8천 명에 불과했는데, 1960년대는 정부정책에 힘입어 초급대학·대학·대학교가 68개교, 학생 수는 1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 대통령 집권기에 해외 유학생 수가 비약적으로 늘었는데,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정규 유학생’자격으로 해외로 나간 학생이 4,884명(미국 89.9%), ‘기술훈련 유학생’자격으로 출국한 학생이 2,309명이었다. 이밖에도 1950년대에 9,000명 이상의 군 장교들이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았다. 이런 교육정책의 장려로 인하여 1960년대 이후 ‘경이적’ 경제성장의 지적 기반이 조성되었다.

 

사회분야 - 양반제도를 뿌리 뽑고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기회 보장

이승만 대통령이 사회분야에서 끼친 영향력도 대단한데, 우선 농지개혁을 통해서 전통적인 양반제도를 뿌리 뽑았다. 그리고 남·녀 구분 없이 동등한 교육 및 취업기회를 정책적으로 보장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한국 여성은 초등학교 수준에서 남자와 똑같은 의무교육을 받게 되었고, 나아가 중·고등학교 및 대학에 대거 진학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 각급학교의 여학생 수를 비교해보면, 초등학교의 경우 3.1배(541,011→1,655,659), 중·고등학생의 경우 6.1배(63,516+23,721→88,625+6,469), 사범학교의 경우 2.5배(1,825→4,527), 그리고 대학(교)의 경우 8.5배(1,086→9,189)로 엄청난 증가를 보였다. 저학력 여성들은 타자수, 교환수, 섬유 노동자, 직조공, 피복공 등에 취업하였고, 고학력 여성들은 교원, 의사, 약제사, 경찰관, 공무원 등 직업을 가졌다.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1950년대에는 여성 판·검사, 여군 장교, 여자 항공대원, 여자 공학사가 나타났고, 국회의원과 장관 및 대사들도 등장하였다. 조선시대 이래 차별대우를 받던 한국 여성이 이 대통령의 집권기에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임 시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미국 유학을 통해서 선진 문물과 제도를 경험했던 그의 경험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고, 미 군정 시기에 개시된 일련의 개혁을 잘 계승 발전하였으며, 6·25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하여 새롭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나라를 운영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개혁과 업적에 대하여 수정주의 사관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의하면 ‘미제의 앞잡이’로서 남한을 미국이라는 패권국가에 종속시키는 작업을 수행했다고 비판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해방 후 혼돈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 강력한 리더쉽과 확고한 반공의식을 통해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제도적 정비와 사회 다방면의 개혁을 이루어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功)이라 할 수 있다.

 

미주

1. 유영익, “이승만대통령의 업적 재평가”, 「역사학보」 192 (2006)의 논문을 중심으로 요약 정리했다.

2.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대통령 기록관, 이승만대통령~박정희 대통령(지방자치 태동기) 참고.

3. 안문석, 최재덕,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의 부정 사례와 그 원인”, 「한국동북아논총」 24(2) (2019) : 78.

4. 공임순, “민주주의 정치적 담로자원과 인민대중의 진정한 지도자상”, 「서강인문논총」 29 (2010): 124.

5. Ibid, 135.

6. 기광서, “한국전쟁시기 북한의 남한지역 토지개혁”, 「한국근현대사연구」 62 (2012) : 9. 북한은 남한의 토지개혁을 위해 1949년 5월 내각 결정(제46호)을 채택하여 남한 토지개혁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였고,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정성호(대구서교회 부목사)  peripateo@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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