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도는 회심에 관한 것이다. 복음주의는 좋은 소식의 선언이다. 그 선언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회심이란 그리스어 메타노이아, '돌아서다'는 뜻이다. 이 변화는 다시 태어나는 일로도 묘사된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보라(요 3:3∼7).

그러나 회심은 영적인 경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회심은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난다. 회심이 항상 악한 삶에서 거룩한 삶으로 가는 패턴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릴 때 그리스도를 믿게 됐다. 사실 나는 극도로 악했던 내 삶의 방식에서 돌이켜 회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순종하지 않는 영이 내 마음 깊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았다. 때문에 나는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면 깨끗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회심은 항상 우리의 옛 본성으로부터 변화를 요구한다. 아담과 이브로부터 우리 모두에게 전해진 죄된 상태인 옛 본성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만이 새로운 본성으로 변화시킨다.

최근 나는 낡은 가족사진 속에서 세발자전거를 타던 내 모습을 발견했다. 네 살이 안 됐던 어릴 때였다. 당시 어머니는 마당에 화초를 심었고 나와 함께 씨를 뿌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땅을 파는 법과 파종법을 가르쳐주셨다. 규칙적으로 물 주는 법도 알려주셨다. 그리고는 "씨를 뿌린 땅을 절대 밟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화초가 자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의 시선을 피해 몰래 밭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내가 씨를 뿌렸던 곳을 밟았다. 그때가 아직도 기억나는데 불순종하고 싶은 생각이 나를 움직였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뒤 혹시 내가 뿌렸던 씨가 자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내 소행이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천만다행히 싹은 돋았고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유년 시절을 돌이켜봐도 사악한 삶에서 거룩한 삶으로 옮겨지는 패턴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참으로 죄악된 본성으로부터 구속이 필요했다. 회심이 드라마틱하지 않게 일어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태초부터 깊이 뿌리박은 죄된 본성을 구출한다는 심오한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회심의 종류와 상관 없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는 찬송을 부를 수 있다.

회심은 앞쪽과 뒤쪽 둘 다를 보는 과정이다. 앞을 봄으로써 우리는 천국을 준비한다. 회심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 속으로 안내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마주보게 될 그날을 고대하게 된다. 회심은 또 뒤를 보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피조세계의 청지기 사명을 주셨지만 우리의 첫 부모는 타락하고 말았다. 회심은 인간의 죄성으로 뒤틀려진 것을 회복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불순종의 영은 정복됐고 다시 한번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생명력 넘치는 관계 속으로 초대됐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