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세 차례에 걸친 기획기사를 통해 현대인들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하 이승만으로 사용)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인식과 이승만의 일대기와 업적을 살펴보았다. 논의의 편의상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과(過)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功)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논의의 편의상 이렇게 진행했다고 해서 이승만이 잘못이 없는 완벽한 영웅이었다거나, 이승만을 제외하고 다른 독립 운동가들의 공(功)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일본 쇼와 천황의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상해사변 전승축하식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 등을 비롯하여 김좌진 장군이 이끌었던 북로군정서,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과 같이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많은 사람들의 노력도 있었고,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김구나 이승만과 같이 외교전을 펼칠 수 있었던 인물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독립운동에 있어서는 역할의 차이었지, 누가 더 나은지를 따지는 것은 무지의 소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균형 잡혀있는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승만에 대하여는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평가가 줄을 잇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결말로 갓 독립한 신생국가의 처지에서, 6·25 전쟁이라는 비참한 역사를 경험한 한 약소국의 대통령으로써 이승만이 보여준 탁월한 외교적 능력은 70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임에도, 여전히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던 E.H. Carr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과거에 대한 정당한 재평가를 토대로 오늘날의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본고에서 이승만을 ‘연약함이 있었던 국부(國父)’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았을 때, 완벽하지는 않았고 분명히 잘못된 모습들도 많이 보이지만, 조국(祖國)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광복(光復)과 전후(戰後)의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라보며, 기틀을 잘 놓았던 천재적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연약함이 있었던 이승만

이승만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념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우익의 관점에서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칭송하는 학자들이 있고, 또 다른 부류는 좌익의 관점에서 이승만을 독재자로 비판하는 학자들이 있다. 사실 이렇게 평가가 갈리는 이유는 이승만이 양쪽 모습 전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에 대하여 비판하는 학자들은 이승만이 3·1운동 발발과 거의 동시에 미주지역에서 제기되었던 국제연맹 하의 위임통치 청원을 근거로 이승만이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확신과 열망이 없었던 것으로 본다.1) 위임통치 청원의 내용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일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담보로 ‘몇 해 동안 국제연맹의 관할을 받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특정 수탁국의 식민 통치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들어 이승만의 요청은 한국인의 자력에 의한 독립회복을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본다.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3·1운동의 결과로 노령(블라디보스토크), 상해, 한성(서울) 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한성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의 직권으로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했는데, 미주지역의 외교 및 재정권을 장악했다. 구미위원부가 제대로 활동했던 1919년 8월부터 1922년 4월까지 최소 15만 달러를 미주교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이고 있었는데,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한 금액은 16,500달러에 불과했다. 나머지 금액은 구미위원부의 유지와 선전비용으로 충당했는데, 미국정부와의 외교 문제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심지어 이승만은 1925년 3월 18일 상해임시정부에 의하여 임시대통령에서 탄핵, 면직까지 되었다.2)

이외에도 이승만은 광복 이후에 친일파 세력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을 주장하여 결국 남한에서만 정부가 세워지게 했다는 이유로 남북 분단의 원흉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6·25 전쟁 초기에는 방송을 통해 군인들이 잘 방어하고 있다고 하면서 본인은 먼저 대전으로 피난을 간 부분이나, 수많은 국민들이 제대로 피난길에 오르지도 못하였는데 한강철교를 폭파시킴으로 인하여 국민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된 점도 실정(失政)으로 꼽히는 대목이다. 특히, 이승만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아마 3·15 부정선거일 것이다. 3·15 부정선거에 대하여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인식은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욕으로 인하여 부정선거에 깊숙하게 개입하였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에 반대하여 요즈음에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재평가를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당시에 노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고, 이기붕과 자유당의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 3·15 부정선거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인해 촉발된 4·19 혁명의 이야기를 듣고 대통령 자리에서 스스로 하야하였고, 이런 모습을 보인 이승만이 어떻게 독재자라고 할 수 있느냐?는 관점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경험하지 못한 사건으로 역사적 사료에 의해서만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우나, 양쪽의 견해를 담은 연구물들을 확인했을 때, 3·15부정선거 또한 이승만의 노쇠함으로 인한 정확한 판단의 어려움이 있었던 상황과 이승만을 보좌하고 있었던 정치가들의 권력욕으로 인해 발생한 치명적인 오점이지 않나 생각을 한다.3)

<사진출처: 이승만 기념관. 4·19 직후 서울대 병원을 찾아 부상당한 학생을 위로하는 이승만 대통령>

 

국부(國父) 이승만

하지만 이미 여러 번의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이승만의 업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시할 수 없는 수준도 아니다. 그는 조선 왕조-대한제국-식민지-해방-전쟁-전후(戰後)의 시기를 거치면서 유교적 왕조제도를 뛰어넘어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초석을 놓았던 인물이다. 비록 역사적 과도기를 거치면서 그의 연약함이 많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제도적으로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미국 유학을 통해 국제질서에 대한 감각을 익힘으로 자주독립이라는 것은 곧 외교를 통해서 이룰 수 있으며, 미국을 통해서 자주독립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명민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며, 6·25 전쟁 중에도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이끌어내는 한편, 전쟁 말기에는 군인의 수를 비약적으로 늘림으로 군사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그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번 소(小)주제에서는 그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이승만이 어떻게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가고, 비슷한 시기에 해방된 다른 나라(예. 필리핀)와 비교하였을 때, 그의 지도력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봄으로, 국부(國父)라고 불리 우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이승만은 약소국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최고의 힘은 ‘외교’라고 믿었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로 자칫 잘못하면 패전국의 오명을 쓰게 될 위험이 있었는데, 일찌감치 이승만은 임시정부로부터 각종 권한을 위임받아 열강들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독립을 주장했다. 특히,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미국과 영국 수뇌에게 알림으로써 1943년의 카이로 회담에서 독립 약속을 원칙적으로나마 확인시키는데 기여를 했다. 이 당시에 미군정은 이승만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는데, 그 이유는 이승만이 통제 불가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행동은 전혀 예측 불가능한 모습을 가졌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는 벼랑 끝 전술도 서슴없이 행동으로 실천했었다. 이렇기에 이승만은 외교무대에서 활동하면서,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끊임없이 미군정의 방해와 견제 속에서 활동을 해야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뛰어난 외교력과 탁월한 리더십, 명민한 판단으로 인해 해방 이후 한국의 상황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이끌 도록 노력했다. 이에 대하여 독일의 지도자였던 아데나워(Konard Adenauer, 1876-1967)와 비교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또한, 이승만은 당대에 소련과 북한의 영향 아래에 있던 좌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 오늘날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하였다. 해방 이후 38도선 이남의 사회는 아주 혼란스러웠다. 박헌영은 여운형과 손잡고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고, 김구 또한 남북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임을 시사했다. 이미 임시정부시절부터 중국과 소련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인물들의 친(親)공산당적 행보로 인하여 38도선 이남의 사회에서는 누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느냐가 최대 관건이었다. 이때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은 좌우합작을 지지하면서 눈엣가시였던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하였다.4)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에 미국에서는 친(親) 소련주의자들이 많았고, 간첩 혹은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미 국무부 극동 문제 담당 관리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외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끝까지 반공을 주장하면서, 뛰어난 리더십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6·25전쟁 이전에도 38도선 이남에서 좌익계열의 사람들이 국지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본격적인 계획은 6·25전쟁이었다. 김일성과 스탈린이 마오쩌둥과 협의하여 수립한 북한의 남침공격계획에 따르면, 해방 이후 이미 남한에 존재하고 있는 2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들에 의한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1개월 만에 전쟁을 끝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김일성이 남침을 강행하고,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을 때에, 박헌영은 라디오 연설에서 “엄숙한 시기에 전체 남반부 인민이 어찌 총궐기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무엇을 주저할 것입니까? 모두 다 한 사람 같이 일어나 정의의 전쟁에 적극 참가해야 합니다. 인민의 무기는 하나도 봉기요, 둘도 봉기입니다.”라고 선동했다.5) 이것은 해방 이후에 김일성과 그 무리들은 38도선 이남 지역에서는 엄청난 수의 공산당원들을 활용하여 적화통일의 야욕을 실천하려고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약에 이승만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미국의 방해와 국내 정치인들 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반공(反共)사상을 바탕으로 남한의 공산화를 막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쯤 각 가정에 김일성 삼부자의 사진을 걸어놓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만으로도 이승만은 충분히 국부(國父)로 불릴 만하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던 국가 중에 남한(이하 한국)만큼 빠르게 안정된 나라가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가장 비교가 되는 두 나라는 한국과 필리핀이다.6) 두 나라는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독립을 맞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둘 다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나라였고, 독립 후 냉전의 최전선에서 반공노선을 기본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렇기에 두 나라의 지도자를 비교해봄으로써 이승만이 얼마나 뛰어난 대통령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먼저 필리핀의 주요 대통령은 누구라고 한 명을 정확하게 꼽기가 어렵다. 1946년 완전한 독립을 얻은 이후로 1961년까지 무려 4명의 대통령이 재임을 했기 때문이다. 먼저 독립이후에 세워진 제3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으로 로하스(Manuel Roxas)가 당선이 되었는데, 그는 신생 독립국이었던 필리핀의 경제를 살리고 망가진 국가를 재건하려는 의욕을 강하게 보였다. 그는 필리핀 자생적 공산주의 운동 훅(Huk)을 진압하고자 농촌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재임 2년 만인 1948년 심방마비로 서거했다.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부통령이었던 키리노(elpidio Quirino)가 대통령에 올라 잔여 임기를 마치고, 재선에도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대통령 임기가 끝나버렸다. 1953년 대선에서는 당시의 국방장관이었던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 궁에서 농민을 위한 만찬을 여는 등 ‘서민들의 대통령’으로 기억되어 있다. 그는 토지개혁을 포함한 농촌개혁을 시도하여 일정한 성과는 거두었지만, 완전한 개혁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국방장관 출신답게 ‘훅’을 공식적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막사이사이는 1957년 3월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부통령이던 가르시아(Calros Garcia)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재선에도 성공하였는데, 필리핀공산당을 불법화하는데 성공했으며, 필리핀 우선정책을 도입하여 국민들이 국산품을 애용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출처: 이승만 학당 카페. 이승만 대통령 장례식 추모 행렬>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절에 필리핀에 총 4명의 대통령이 지나갔는데, 토지개혁, 반공주의, 친일파 청산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자주 바뀌는 탓에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뒷받침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결과 필리핀은 독립 이후에도 여전히 소수의 지주 가문이 농민을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 지배하게 되었고, 근대적 시민계급이 형성되지 못했다. 결국, 필리핀은 정치적으로 후퇴를 거듭하게 되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라는 평가를 받다가 현재는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 수준(2017년 기준)의 저개발국으로 머무르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꿈꾸었던 독재자라는 평이 있지만, 비슷한 국제 정치질서 가운데서도 강력한 리더십과 뛰어난 외교력을 바탕으로 토지개혁을 성공시키고 반공 정책에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각종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현대적 한국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는 점, 국민들이 원할 때 자진해서 하야(下野)를 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국부(國父)로서의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미주

1. 고정휴, “우리역사 바로알자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했는가”, 「역사비평」 (1991): 200.

2.이택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이승만 탄핵 재검토”, 「세계지역연구논총」 37

(2019): 45.

3. 3·15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적 내용으로는 이준식, “미완의 친일청산과 3·15 부정선 거” 「내일을 여는 역사」 62 (2016).; 서중석, “이승만과 3·15 부정선거” 「역사비평」 (2011).을 참고하고, 3·15 부정선거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전혀 몰랐다는 입장은 이승만 기념관(www.miracleofkorea.com)의 내용을 참고하라.

4. 김원모, “해방정국 이승만-김구-이광수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김일성 적화통일 야 욕”, 「춘원연구학보」 9 (2016): 103.

5. Ibid, 145.

6. 류석춘, 조정기, “한국과 필리핀 건국의 핵심과제와 대통령(들)비교: 이승만 대 케손 등”, 「동남아시아연구」 27(1) (2017)의 논문을 요약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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