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제네바 교회와 국가

(Calvin's Geneva Church and Country)

김 영 수 장로(고신대 前사무처장/ 항일 신사불참배운동 발상지 표지석 추진위원장)

 

 

Ⅰ. 서론 들어가는 말

1.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

1) 교회의 역할 ┃

교회란 에클레시아(Ecclesia) ‘불러낸 자.’를 뜻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인 단체가 교회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일천만 성도들은 교회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서 신앙공동체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면, 정국(political situation)이나 혼란한 시국(chaotic state of affairs) 상황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방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칼빈주의적 문화관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전통적으로 개인은 정치에 참여할 수가 있지만, 교회가 정치 현안에 대해서 일일이 간여하는 것은 부절하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한국장로교회들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그런 입장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 한국교회는 오랜 기간 동안, 정세(political landscape)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대체적으로 무관심해 왔다. 이런 분위기와 정서를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으로 여겨왔던 것도 사실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2항은 국호와 정체를 명시한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국호는 대한민국, 정체는 민주공화국이다. 국가를 형성하는 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다. 교회의 지도자라면 국가 사회의 이념과 정체, 사상 등에 대한 논란이 있거나, 새로운 이념적 변화가 발생하고, 도덕적 윤리적, 기준이 모호해져서 사회적인 혼란이 야기되었을 경우에는, 무엇이 국익에 유익하다는 정의 개념에 기초한 통일된 견해를 내놓아야 한다. 만일 나라의 존망과 직결되고, 순수복음 전파 사역에 걸림돌이 될 만한 체제 변화와 같은 시도가 발생한다면 상황은 다르다.

교회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등장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여기에는 또 다른 유사기독교 집단들의 일탈로서 방해 공작이 있을 수는 있다. 칼빈시대에도 재세례파 피에를 카롤리나, 이단자 세르베투스의 이설과 온갖 모함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투적 삶의 연속이다.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국가 건설은 보편적 윤리 기반이 조성되고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이 장에서는「칼빈의 제네바 교회와 국가」라는 주제로,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주창한 칼빈의 국가론(the theory of the State)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가 비록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교회에 속해 있지만, 칼빈이 생존하던 당시의 제네바 시정부와 그 교회와는 전혀 다른 환경과 분위기에서 살고 있다. 21세기 현금의 우리환경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위대한 신학자가 남긴「기독교강요」의 한 부분을 음미함으로써, 칼빈의 국가론에 대한 원리를 깨닫게 될 것이며, 또 당시의 분위기와 정서를 조금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Ⅱ. 본말

1. 사람 안에는 이중 통치로 구분한다.

칼빈은 사람 안에 있는‘이중 통치’를 구분한다고 하였다.(Ⅲ.19.15). 하나는 영적 통치로서 인간의 양심에게 경건과 하나님 경외를 명령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적 통치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반드시 유지되어야 할 인간으로서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이 둘은 대개 ‘영적’ 관할권과 ‘현세적’ 관할권으로 불린다. 영적 통치는 영혼의 삶을 대상으로 삼는 반면에, 현세적 형태의 통치는 현세의 관심사들과 깊이 관련된다. 사람 안에는 두 세계가 있다. 각 세계에는 서로 다른 왕과 서로 다른 법이 다스린다.(Ⅲ.19.15).

2. 하나님이 세운 제도와 국가

1) 우리가 세속 정부의 사람들 틈에 섞여서 살고 있다. ┃

칼빈은 국가 자체, 심지어 기독교국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리스도의 통치와 세속 권력(세속 정부)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의 삶을 위해 지니는 의미에 관심이 있었다. 세속 정부는 우리가 사람들 틈에 섞여 사는 한, 하나님께 대한 외적 예배를 촉진시키고, 보호하고, 경건에 대한 건실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변호하고, 우리의 삶을 사람들의 사회에 맞추고, 우리가 사회에서 의롭게 행동하도록 선도하고, 서로를 화해케(화평)하고, 일반적인 평화와 평정을 정진(힘써 나아가게)하는 지정(확실하게 정함)된 목적을 갖고 있다.(Ⅳ.20.2).

그럼으로 국가는 성화(그리스도인이 의롭게 되는 과정)를 돕는 제도이다. 우리가 참 조국(영원한 세계)을 사모하면서 이 땅위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진데, 나그네로 살아가는 데에는 그런 도움(국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에게서 그런 도움을 빼앗아(조국을 잃는) 가는 자들은 그에게서 인간성 자체를 앗아가는 자들이다.(Ⅳ.20.2).

2) 국가는 일종의 교회의 자산이 될 수 있다. ┃

그러므로 국가는 교회의 일종의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국가라는 제도는 하나님이 세웠다. 마치 육체가 영혼과는 다르듯이 국가는 교회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양자 사이에는 긴장이 발생할 수가 있다. 육체와 영혼, 덧없는 현세의 삶과 영원한 미래의 삶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과 세속 정부는 철저히 구분된다는 사실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Ⅳ.20.1). 국가는 하나님이 세우셨으나, 독재자들의 거처가 될 수도 있다. 로마서 13장이 말하는 국가와 요한계시록 13장이 말하는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칼빈은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5절 하반 절에는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영국의 청교도 목사 존 낙스 등은 메리 여왕에게‘양심에 따라 할 것이니라.’고 하였지 않느냐고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런 사상에 근거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을 건설하게 되었다.(필자 註)

3) 교회와 국가 관계는 영혼과 육체관계와 같다. ┃

육체는 영혼에 장애를 놓을 수도 있고, 성화를 도울 수도 있다. 국가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궁극적으로 교회와 국가를 구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런 이유는 단순하다. 교회는 국가와 동일한 주를 모시고 있고(모셔야 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국가는 교회의 안녕을 뒷받침 한다.). 마치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라 불릴 수 있으면서도 영혼을 위해 존재하듯이 그렇다. 그럼으로 칼빈은 1536년판 기독교강요에는 ‘세속 질서는 교회의 안녕을 위해 존재한다.’는 제목을 붙였다.(Niesel 230).

(참고 : Wilhelm Niesel. 독일 신학자, 1903 출생, 1923년에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온 후 칼빈 연구에 매진함.)

“교회는 국가와 동일한 주를 모시고 있고” 란 세속 권세가 하나님에 의해 정하신 바이기 때문에 그러하다.(필자 註)

4) 통치자는 하나님의 부섭정 이다. ┃

통치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았고, 신적권위를 부여 받았으며, 하나님의 부섭정(vice regent)들처럼 행동하는 방법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대표자들이다.’ 그럼으로 성경은 그들을 향하여 ‘신들, gods’이라고 한다.(시82:6). 그들은 하나님의 대표자들로서 독자적인 권세를 갖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종들이요. 신하들이다. "땅위의 만물에 대한 권위가 그 밖의 통치자들의 손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거룩한 규례로 말미암은 결과이다."(Ⅳ.20.4) 그럼으로 모든 통치자들과 군주들은 겸손하게 대왕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적 홀(笏, 제후를 봉할 때 쓰던)에 복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의 통치는 한 분이신 이 주님을 섬기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Niesel, 231f.).

사극에서 임금의 나이가 어려서 모후가 섭정하는 관경을 볼 수 있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을 때, 다른 분이 대신 다스리는 것을 섭정이라고 한다. 부섭정은 하나님이 대신 맡겼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이다.(편집자 註)

5) 교회에 대한 국가의 책무┃

칼빈에 의하면 국가는 공적 종교행사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게 하고, 사람 등 사이에 인간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내가 지금 세속정부에게 종교를 올바로 세울 의무를 부여한다고 해서 혼동을 느껴서는 안 된다.(Ⅳ.20.3.). 통치자들은 다른 의무를 갖고 있지만,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은 시민들의 육체적 안녕을 보살피는 게 아니라 교회의 번성을 지켜보는 것이다.‘하나님은 자기 교회를 위하여 세상과 인류를 유지하신다.’ (Niese, l233). 그럼으로 국가는 참 교리를 세우는 노력으로써 교회를 뒷받침해야 한다.

6) 세속 정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세운 권세이니 복종하라는 것이다. ┃

정부는 신적 제도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는 양심을 위해서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 이는 권세는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고, 하나님이 내리지 않는 권세란 없기 때문이다.(Ⅳ.20.4). 실로 ‘세속권세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합법적인 부르심일 뿐만 아니라, 필멸(必滅)의 인간들의 삶을 통틀어 모든 부르심 가운데 가장 성스럽고 가장 존귀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Ⅳ.20.4).

7) 통치자는 교리와 도덕적 판단에 관여할 수가 없다. ┃

(Ⅳ.3.3)에서 칼빈은 말씀 사역을 가리켜 ‘우리들 사이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고 다른 어떤 기능보다도 뛰어난 기능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한 반면에 ‘만약 통치자들이 본연의 한계를 넘어서 교회에 대한 통치를 가로채고, 교리문제와 영적 통치 문제들에 대해서까지 재판관을 자임하려고 한다면, 교회를 섬기는 일이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일이 된다.(Niesel, 236). 칼빈에 의하면 교리와 도덕에 관한 판단은 교회에 속한다. 교회는 사회의‘영혼’이다. 고 하였다.

현재 국가 헌법기관은 양심에 관한 사안 외에도, 절차와 형식 등 다수의 교회 재판에 관한 것들을 취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필자 註)

8) 통치자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이 닿지 않는 삶의 영역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카이퍼(화란의 수상, 신학자, 칼빈주의자)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통치 밖에 서있는 실재란 손톱만큼도 없다.’

그러나‘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리스도 앞에 서약해야 하듯이, 또한 복음의 진리와 권위를 인정하라는 명령을 받는다.’(Niesel, 236). 칼빈은 세속권력의 가장 큰 의무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평화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면서, 이 이중의무가 하나님의 율법이 내리는 두 가지 큰 계명에 의해 제시된다고 여겼다.(237). 통치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말씀에 의해, 책임을 부여 받았지만, 그런 다음에는 말씀의 위로도 받는다. 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교회의 지지와 기도에 의존할 수도 있다. ‘비록 그들(통치자)은 형벌을 집행해야할 의무를 맡고 있지만, 그 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회중에 속할 자격을 잃지 않는다. 반면에 그들에게 부여된 가장 큰 의무는 교회의 훌륭한 지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론이다.’(238).

그러므로 다스리는 사람 편에서 뿐만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편에서도 귀결되는 경건이다. 백성들은 존경(22항)과 순종(23항)을 나타내야 한다. ‘통치자들에 대한 백성의 첫 번째 의무는 그들의 직무를 하나님이 내리신 권세로 알고 존귀하게 생각하고, 그런 이유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들과 대표자들로 평가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이 의무에서 다른 의무들도 따라 나온다. 백성들은 통치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선포에 복종하든 아니면 공역(公役)에 참여하고, 국방(병역의무)의 짐을 지든 아니면, 그 밖의 그들의 명령을 실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들에게 순종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Ⅳ.20.2).

칼빈은 로마서 13:1~2에 근거를 두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칼빈이 그렇게 말한 것은 오늘날의 첨예한 상황을 보고 말한 것이 아니다. 당시는 민주적 귀족 정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Ⅳ.20.8).

9. 다음 난해한 부분이 우리 앞에 있다. ┃

칼빈은 “시민(individual)들은 공무에 간섭하거나 일체의 정치적인 일을 떠맡아서는 안 된다.(Ⅳ.20.23). “우리는 자기들의 본분대로 의롭고 성실하게 우리를 대상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군주들의 권위에 복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방법이 되었던 통치권을 행사하며, 심지어 조금도 군주의 본분을 행하지 않는 자들의 권위에도 복종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불의한 통치자들에 대해서도 “공적 복종에 관한 가장 훌륭한 왕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에게 바치게 될 것과 똑 같은 존경과 경의를 바쳐야 한다.(Ⅳ.20.25). 모든 사람에게 동의와 복종을 권하는 것이다. “왕들의 악이 도를 넘을지라도 그것을 제어하는 것은 여러분의 일이 아니다. 여러분은 오직 그들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Ⅳ.20.29). 칼빈은 이런 태도가 철저히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주께서는 우리의 악행에 대해서 그런 자들을 회초리로 삼아 틀림없이 징계하신다.(Ⅳ.20.29). 여기에서 칼빈은 체념과 성찰로서 십자가를 지는 태도와 경건을 유일한 방책으로 보는 듯하다.

10. 불의 앞에 체념은 금물이다. 열등한 통치자들을 거역할 권리가 있다. ┃

그러나 칼빈은 시민들이 국가에서 행하는 불의 앞에서 체념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간혹 “자기 종들 가운데서 복수 자를 일으키시고 비참한 재앙으로 악인을 징벌하라는 명령으로 그들을 무장시키신다.”는 것을 시인한다.(Ⅳ. 20.30).

그러나 시민들은 합헌적 통치자를 통해서만 행동할 수 있다. “만약 무절제한 것(족벌주의)을 바로 잡는 일이 주께서 보응하실 일이라면. 순종하고 인내하라는 명령밖에 받은 바 없는 우리에게 그 일이 위임되었다고 경솔히 생각하지 말자”고 한다.(Ⅳ.20.31). 그러나 칼빈은 자신이 “내내 개인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덧붙인다.

11. 칼빈은 통치자들의 불의를 거역할 주체가 중간 간부들이라고 지목하였다. ┃

칼빈에게 중간 통치자들은 “왕들의 전횡을 억제할” 권리와 신적 사명을 지닌다. 그들은 왕들이 하민 층을 포악하게 착취하고 폭행할 때, 눈 감아버리거나, 자기들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민중의 보호자로 임명된 줄을 말하면서도, 부정직하게 민중의 자유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 그럼으로 바로 앞에서 ‘개인’이 폭군에게 저항해서는 안 된다고 반복해서 경고한 칼빈은 여기에서 깜짝 놀랄 만큼 방향을 선회하여, 민중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합헌적 통치자의 행동을 인정하고, 엄숙히 권장한다.(Ⅳ.20.30). 이것을 “칼빈의 민주주의적인 요소”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상당히 모호성이 있다는 비판적 견해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칼빈의 주장은 정칙(established rule)된 것이 아님을 은근히 비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다니엘 6:22 주석에서 논쟁이 확대되었다. 6:22 본문은 ‘다니엘이 자신의 무고함과 참소 자들이 꾸며낸 정치적 반역 음모의 부당성을 지적한 내용이다.

칼빈은 위 9항에서 왕들의 악행이 도를 넘을 지라도 제어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악한 왕을 세운 목적이 우리의 악행에 대해 회초리로 삼기 위함이라고 한다. 반면 10항에서는 국가에서 행하는 불의 앞에서 체념하지 말라고 한다. 11항은 통치자의 불의는 중간간부들이 신적 사명을 받았으니 하민 층을 괴롭히는 왕의 악행을 눈감아주지 말라고 한다. 아마 이런 순서가 교회가 취할 절차적 자세가 아닌가 한다. (필자 註)

12. 오직 주안에서만 복종하라고 한다.┃

칼빈은 “우리는 우리에게 권위를 지닌 자들에게 복종하되, 오직 주안에서 복종한다.” 만약 그들이 주를 거슬려 무엇을 명한다면, 그 명령은 귀담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때는 통치자들이 소유한 모든 위엄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 ‘위엄에 개의치 말자’라고 하였다. 그 위엄이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존의 권세 앞에 겸비해 진다고 해서, 그 위엄이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은 1559년판 「기독교강요」를 보강하면서 어떤 왕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안되며, 어떤 그리스도인도 왕들의 왕께(위임자) 눈가림으로 복종함으로써 경건을 가장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Ⅳ.30.32).

이런 사상은 영국의 청교도 정신과 유사하다.(필자 註)

칼빈은 후반기에 들어서 점차 이런 방향으로 나갔다. 이런 사실로 인해 그의 신학에는 앞선 다른 진술들과는 다소 긴장되는 부딪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그의 모든 진술은 책임과 경건에 대한 역설이 일관되게 흐른다. 우리는 “경건을 떠나기보다, 어떤 고통이라도 받을 때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을 드리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받아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용기를 잃지 않도록 또 다른 자극을 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악한 정욕에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하며, 불경건한 자들에게 복종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7:34).(Ⅳ.20.30).

칼빈 신학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 ┃ 칼빈이 생존하던 시대에는 교회와 국가에 관한 네 가지에 기본 개념이 있었다.

주의사항 :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점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은 육체에 있지 않고, 영혼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육체도 성화되고 부활하여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기독교강요」는 1936년에 초판을 출간했다. 1559년판에 비해서 1/3이 되지를 못한다.

1559년 무렵에는 정세가 바뀌어서 몇몇 나라에서는 개혁주의자들이 통치자로 부상했다. 칼빈 역시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그 시대의 사람으로서 환경과 여건의 영향을 받았다, 청년시절과 말기에는 또 다른 환경이었다.

칼빈은 베자와 그 밖의 사람들과 함께 온건하고 탄원하는 입장에 있기 보다는, 보다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런 발전을 가리켜 행정적 개혁이라고 한다. 이런 견해는 재세례파 급진적 세력으로부터 반대와 비판을 받았다. 재세례파는 반전론 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일반적으로 인간 문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국가의 권리와 권세에 대해서 좀 더 부정적인 경향을 띠었다.

다음은 칼빈이 말한 합법적 형태와 불법적 형태의 세 가지 국가 형태이다. 불법적 형태마다 다음과 같은 부패가 따른다고 말했다.(Ⅳ.20.8).

1. 군부정치가 부패하면 전제 정치가 되고

2. 귀족 정치가 부패하면 과두 정치가 되고

3. 민주정치가 부패하면 무정부주의가 된다.

칼빈은 민주정치를 가미한 귀족 정치를 이상적인 정부형태로 했다. 이는 현재 미국이 시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일종의 ‘연방주의’를 제안했다. 이로써 옛것과 새것을 아주 흥미롭게 조합했다. 그는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중요하고 시대변화를 선도한 인물이다.

칼빈이 사적 인간(private man)과 공적 인간(public man)을 구분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로 올라간다. 고대는 사적 시민들은 직접적으로 공적 행위를 할 권리가 없고, 공적 시민들이(즉 중간관리들)이 정부를 인도적으로 만들 의무를 지닌다. 정부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관”이지만 과거의 좋은 정부에는 언제나 “견제와 균형”이 있었고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미래의 정부에도 언제나 그것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견해는 고대의 것일 뿐 아니라, 대단히 현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칼빈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1536년이었는데, 프랑스 혁명이 1789년에 발생했고, 미국의 권리장전은 1791년 채택되었다. 그러니까 칼빈은 253년이나 시대를 앞섰다.

「기독교강요」는 독특한 정치 문서로서, 그것이 작성될 때의 정치 상황을 떼어 놓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현대국가에 준 영향은 지대하며 또 주목해야 한다. 그는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를 둔 신학을 작성했다. 칼빈의 신학은 추상적이지 않고, 모든 살아 있는 것에 관계된 이데올로기(이념)와 피에타티스(경건)이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발전시키라고 명하신 그 문화에 철저히 잠겨야 한다.

 

Ⅲ. 맺는 말

1. 성경적 지도자론

잠언은 솔로몬의 금언이다. “지혜롭고 의롭게 공평하고 정직하게 행해야 한다.”는 이 금언은 국가 사회의 모든 공직자들이 모토로 삼아야할 가장 중요한 금언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공직자들이 이 금언을 마음에 새겼으면 한다.

1) 국가 지도자론

1. 지혜롭게 처리해야한다.

2. 의롭게 처리해야한다.

3. 공평해야 한다.

4. 정직해야한다.

여호와의 신은 지혜(wisdom)와 총명(understanding)의 하나님이시다. 모략(counsel)과 재능(might)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신은 모든 지식(knowledge)의 근원이시며, 우리가 두려워하고 경외(fear)해야 할 하나님이시다.(이사야 11:2). 위 말씀에서 국가 지도자들의 통치 방법적 연구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2) 칼빈의 국가론은 현실 적용이 가능한가?

칼빈이 주창한 국가론은 현재의 한국교회 입장에서 그 적용이 가능한가? 비록 가상적이지만, 한번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세상의 군왕들은 만왕의 왕이신 전능자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권력을 부섭정(vice regent)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다. 칼빈이 세상 권세를 가진 군왕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통치자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왕권을 위임 받았기 때문이다. 왕들의 악행에도 순종을 강요한 것은 위임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왕들의 악행을 자신의 행위에 따른 채찍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만일 세상 임금들이 왕권을 함부로 휘두를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제적 일차 대응자로서는, 왕들을 직접 보좌하고 있는 중간간부들이라고 지목한다. 왕들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왕을 제압해야 한다는 지침으로도 보인다. 심지어 중간간부들에 주어진 책무가‘신적 권위로서’왕들의 악행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중간간부들의 책무가 신적권위로서 주어진 사명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칼빈의 입장은 민주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들의 민중 봉기와 같은 것은 허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칼빈은 국가 조직은 세상 권세를 가진 자들 즉, 독재자들의 거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하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또 열등(inferiority)한 통치자들의 불법적이고,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되며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선지자적 사명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세운 까닭은 타락한 자기 백성들을 그냥두지 않고 돌보시기 위해 사랑의 줄로 꼭 묶어 두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장차 일어날 일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미리 알리셨다. 이들을 “대언자”라고 부른다.

“너희 중에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노니, 내가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명기 18;18)고 하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말을 네 입에 두노라.”(렘1;9)고 하셨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개인이나 왕들에게도, 그들의 죄악을 일일이 지적했다. 불의한 재판에 대해서도, 여러 종류의 다양한 불의한 사건이나 일들에 대해서도, 일일이 하나님의 경고성 메시지를 전달했다. 심지어는 타 국가들에게 까지도,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전달했다. 즉시 회개하고 회복한 경우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서,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다.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다시 회복해 주셨다. 선지자들은 세상 권세 자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대언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선지자들은 대개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어갔다.

3. 제사장들의 처리 방법

하나님께서 우림과 둠밈으로 판결하도록 하신 데에는, 제사장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써의 제도(system)를 둔 것이다. 모든 결정에는 철저하게 사람의 생각이 배제되었다. 오늘날의 리더들도 우림과 둠밈의 흉패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지도자라면 당리당략이나 사심을 개입시키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려고 한다면, 특별계시로서 우리에게 전달된 성경 말씀을 표준으로 삼고, 정세와 시국에 대한 입장을 전달해야 한다.

말을 맺으면서

교회는 성경적 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현안문제를 풀고 논의해야 한다. 사회적인 혼란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묵인, 방관하게 되면 공감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골로새서 2:8 에 의하면 철학은 하나의 헛된 속임수에 불과하며, 초등학문이라고 지적해 놓았다. 특히 칸트 철학, 헤겔 철학은 서양의 기독교 문화와 고귀한 유산인 오랜 전통을 훼손한 장본인이다. 기독교 정신과 사상을 침몰시킨 주범들이다. 그런 주범들이 우리교회 안에서도 득실거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기독교 지성인이라고 자청하는 분들이 윤리와 도덕군자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들이 한국교회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비기독교적 행위이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knowledge)과 믿는 것(to believe)은 다르다. 우리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이 모호해졌는데도, 기독교 철학자들은 입을 열지 않는다. 칼빈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최대의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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