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이후 1년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일흔여섯 ‘세속의 끈’ 놓기 아직도 신앙의 광야에서 방황”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76·문학평론가)이 크리스천이 되어 세례를 받은 지 1년이 조금 지났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화제어를 만들어냈던 이 전 장관은 그러나 세례 이후 신앙인으로서의 침묵기를 보내왔다. 몇 차례 강단에 서긴 했지만 한국교회에 대한 당부와 강의로 신앙고백을 대신한 정도였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이 전 장관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신앙을 가진 이후 어떻게 달라졌는지 들어봤다.

-세상을 홀로 맞서는 인문학자가 크리스천이 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례 이후의 날들을 소개해 달라.

"지난 1년간 광야의 시간을 보냈다. 신앙의 벌판에 서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어떤 매체와도 신앙에 대한 얘기는 피해왔다. 1년이 지나면 자신감이 생기려니 했는데 아직도 똑같은 상태다. 여전히 광야에 있고, 여전히 어려움 속에 있다."

-광야란 무엇인가.

"여섯 살 적에 보리밭 길에서 굴렁쇠를 굴리며 혼자서 서럽게 울었던 적이 있다. 햇볕, 침묵, 절대적인 고독과 외로움, 죽음 앞에서의 어린 생명, 그런 것들이 이유였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최초의 종교체험이었던 것 같다. 죽음이 있다는 것, 영원하지가 않다는 것, 종교에 대한 관심은 그때 시작됐지만 멈춰서서 관찰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로부터 70년 동안 정신없이 뛰다가 딸의 투병이 계기가 돼 기독교와 관계를 맺게 됐다. 그러나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신앙의 광야라로 말하고 싶다."

-그 어려움은 내면적인 것인가, 아니면 외부적인 것인가.

"두 개 모두이다. 외부적인 어려움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설명이 잘 안된다. 그동안 욥기와 예레미야애가를 무수히 읽으며 그 통절함에 전율했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총을 찬미하고 당신을 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성경의 깊이에 흠뻑 빠져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확실한 크리스천이라고 자신할 수 없는 것은 심한 영혼의 갈증 속에서도 내 행동이 전적으로 변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마치 번지점프를 한다고 해야 할까. 끈을 매지 않고 뛰어내릴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 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은총 속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과거에는 세속적 삶의 가치에 대해 고민했다면 지금은 영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고민의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은총 속으로 곧바로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지금의 고통이 아주 값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조금 달라진 것은 있다. 과거 내 책상의 사전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성서가 놓여 있다. 얼마 전 출간한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문학세계사)에는 과거 무신론자 때 쓴 시 외에 10편 가량의 신앙시가 수록돼 있는데 그 시편들은 내 절실한 기도와 처절한 심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기독교로의 회심 이후 내가 뭔가 주님의 사역을 한 게 있다면 그 시편들이 바로 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쪽과 저쪽을 다 경험해 본 사람의 입장에서 세속의 문화는 결별하기에 너무 재미있지 않나.

"나는 과거에도 세상의 문화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권력과 돈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 데에 재미를 들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어떤 성직자 못지 않게 금욕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속적 쾌락이나 물질적 재미를 모르고 살면서도 종교적 생활로 가지 못했던 것은 문학이 주는 신성한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크리스천이 된 지금도 세상의 문화와 쉽게 결별하지 못하는 것은 재미 때문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의 얽혀있음, 그 인간적인 틀을 넘어서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신앙을 갖게 된 이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글쓰는 데 어려움이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시집 서문에도 썼지만 나는 시의 언어를 반물질이라고 파악한다. 태초의 공간에 물질과 반물질이 있었는데 그 중 시의 언어는 반물질이라고 본다. 그 반물질은 빛을 만나며 대폭발한다. 빅뱅을 하는 나의 상상력은 갇혀있는 것이 아니다. 내게는 교리 해석도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성경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버리는' 것으로 해석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의미를 설명해 달라.

"세속적 갈구는 노동으로 얻어지지만 영적 갈구는 그런 것으로 얻어질 수 없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라는 말은 가진 것을 버릴 때 영적 목마름이 해결된다는 의미라고 본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영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생이 아니라 물질적 빵을 구하고 있다. 당연히 줄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도 물질의 빵을 구하기 위해 새카맣게 몰려들고 있다. 예수님이 오늘에 오셔도 참으로 외로울 것이다. 세속의 빵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구하는 것은 세속의 것을 버리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많은 글을 쓴 작가가 서양 종교로 회심했다고 욕을 먹은 적은 없는가.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나는 배용준과 같은 스타였던 적이 있었다. 내 글을 읽었던 그 팬들이 나를 배신자라고 욕을 하고 인터넷에 여러 글을 올린 것을 보았다. 그러나 반대로 나에게 달려와 인사하고 악수를 청하며 뱃 속에 잉태한 아이에게 축복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의 셈법은 항시 그렇다. 이쪽이 있으면 저쪽이 있다."

-지성과 감성과 영성은 어떤 지점에서 구분이 된다고 보나.

"예수님은 육체로 오셨다. 그것이 바로 감성과 지성의 단계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의 세계를 연 것이 바로 영적 세계이다. 예수께서는 감성 지성의 세계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돌파해서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셨다. 영성의 세계로 들어갈 때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진다. 지성과 감성은 영성의 바탕이다. 지성과 감성의 단계를 넘어서면 영성의 새로운 몸을 얻게 된다고 본다."

-기독교의 온순한 사랑의 언어가 세속의 폭력적 언어 앞에서 무기력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예수를 부정하는 많은 언어들이 힘을 얻고 있지 않은가.

"사랑의 언어는 결국은 이기기 마련이다. 증오의 언어를 가진 야곱이 처음에는 이기는 듯했지만 결국은 살려 달라고 천사에게 매달리지 않았는가. 사랑의 언어가 증오의 언어와 싸우면 처음에는 사랑의 언어가 무기력해 보이지만 결국은 이긴다. 파워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의 언어에는 거듭나게 하는 힘이 있다. 불효자는 늙은 아비를 팰 수 있지만 효자는 아비를 패지 못한다. 아버지의 높은 권위와 사랑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하나님을 능멸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믿는 사람은 꼼짝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만 사랑과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고 또한 극복했기 때문에 영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닌가. 시장통의 상처받고 힘 없는 낮은 사람들에게 영성이 그토록 필요한 것인가.

"영성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그들이 영성을 갈구한다면 가난한 자의 순수성 때문에 높은 영성을 얻을 수 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은 물질적 결핍 때문에 영성을 추구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물질적 결핍이 영적 갈구로 이어져야 한다. 빈자의 제단이 빛나는 까닭은 영혼이 맑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 중에서 많은 성자들이 나왔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물질적 절박함 때문에 영생의 빵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고 물질적 타락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물질적 결핍을 해결하기 위한 혁명은 역사적으로 성공한 예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혁명은 물질적 증오만을 낳을 뿐이다. 영혼의 구제 없이 물질적 구제는 불가능하다." (국민일보제공 임순만 기자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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