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수 목사, ‘기생충’은 누구일까?

박관수 목사(구영교회, 저서 [기도가 어려운 당신에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로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비롯한 4개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 문화예술계 역사상 최대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아카데미 92년 역사상 최초로 외국어로 만들어진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기적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왜 지금까지의 관례를 깨트리면서까지 [기생충]에게 작품상의 영광을 주었을까? 언론보도를 보면 외국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이 [기생충]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왜 그들에게 있어서는 알아듣기도 어려운 외국 영화인 [기생충]에게 그토록 찬사를 보내는 것일까?

그 이유는 [기생충]이 인류 보편의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빈부격차 문제와 계층 간의 갈등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슈도 아니요, 서구와 동양이 구분되는 문제도 아니요, 부유한 나라 미국이나 빈곤한 나라 소말리아나, 다같이 경험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골칫거리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어떤 사회이건 거기에는 극도로 부유한 극소수와 빈곤에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빈부격차 문제를 자본주의의 폐해로만 오해하는 사람들이 요즘 많은데,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착각은 없다. 공산주의 사회나 사회주의 국가에도 자본주의 국가와 똑같이 빈부격차 문제가 있으며.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보다 그 체제가 훨씬 더 심하다. 마치 공산주의 사회는 ‘카푸치노’와 비슷하다. 맨 위에 극소수의 지배계급, 그리고 중간에 우유와 같은 어느 정도 대우받는 당원이나 당원 가문들, 그리고 맨 밑에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암울한 색깔의 피지배 인민들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국가의 부의 5-10% 정도를 거의 극소수의 부자들이 차지하고 있듯이, 공산주의 사회도 한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실상이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에도 수많은 오류와 폐해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회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과 투쟁 패러다임으로 보는 공산주의는 그렇게 가진 자들을 미워하도록 부추기면서도 최고위층의 가진 자들은 무소불위의 돈과 권력을 휘둘러 독재의 보좌를 누린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방안이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눈이 멀어져서 사리 분별을 제대로 못 하는 탓이다. 이념에 지나치게 경도되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면서도 자신의 사상의 틀에 갇힌 채로 왜곡되게 보이게 되는 법이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에서 빈부격차 문제를 집단사기극과 우발적인 범죄사건이라는 방식으로 우화적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 거기에서 정치를 논하진 않는다. 그리고 생각할 점만 던질 뿐 영화에서 해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영화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실체에 대해 그 이면에 숨겨진 그림자를 은근슬쩍 보여준다. 영화속에서 부자는 여유가 있기에 너그럽고 친절하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속물근성을 보인다. 교양있는 척하지만 실상은 이중적이다. 은근히 덜 가진 자를 냄새 난다고 무시하기도 한다. 반면에 가난한 자는 심성이 비뚤어져 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억울해하고 반항하려 하고 뒤틀린 눈으로 세상과 가진 자들을 본다. 그러면서도 늘 부자를 동경한다. 부자 되기를 열망하며 산다. 반지하에 살면서 목표는 고급주택이다. 자신이 비판하는 삶의 모습을 자신도 추구하면서도 항상 가진 자들을 욕하기 좋아한다. 소박한 삶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즐길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속으로는 기회가 있으면 부자의 대열에 끼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불의한 방식으로라도 높이 치고 올라갈 기회가 주어지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부자도 사기 쳐서 돈을 버는 경우가 많듯이, 영화 속에서도 가난한 가족들은 사기를 쳐서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영화 속에서 가난한 자들의 모습은 부자들이 부정한 수단으로 재화를 축적하는 것과 어떤 면에선 한치도 다를 바 없다. 그러기에 부자를 무조건 악하게 보고, 가난한 자를 선하게 구분 짓는 공산주의적 사상의 기본전제는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가진 자는 타도해야 할 사회악이라고 보고, 덜 가진 자는 항상 의로운 민중이라고 여기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역시 오류인 것이 틀림없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좀 더 주도면밀하게 관찰해보면, 부자나 가난한 자나 불의한 기회로 엘리베이터를 탈 기회만 주어지면, 누구나 남을 짓밟고서라도 올라가려 하는 법이다. 부정부패와 권력자들의 비리 사건들이 터질 때, 그들을 비판하며 촛불이나 태극기를 들고서 항거하는 대열에 섰던 사람들의 내면속에도 알고 보면 권력에 대한 욕망, 부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기회만 주어진다면 불의도 서슴지 않고 욕망의 탑 위로 올라갈 확률이 높다는 점을 우리 스스로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빈부격차 문제는 사회의 구조적인 병폐이기 이전에 내 안에 있는 나의 욕망의 문제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계층 간의 갈등, 남녀 성적인 갈등, 종족 간의 갈등, 종교 분쟁들도 역시 큰 테두리 안에서는 같은 문제에서 비롯된다.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뿌리 깊은 물욕과 출세욕을 포함한 모든 욕심, 그 씨앗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문제가 우리 사회의 문제이다. 나 자신은 쏙 빼놓고, 나는 의로운 듯 스스로 자위하면서, 가진 자들, 권력자들을 싸잡아 욕하며, 사회구조와 제도의 탓만 해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치명적인 허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인간 속에 도사린 강렬한 죄성을 간과한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 문제, 인간 내면의 변화를 무시한 채 법 제정이나 제도 개선의 방식으로만 빈부격차 문제에 접근하다 보니 근원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인류의 샬롬을 위해 강림하신 메시야 예수님이 이 불의하고 부패한 세상에 와서 세상의 구조 악을 척결하거나 로마 제국을 쳐부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시고,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들의 벗이 되시면서 그들에게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고치고 삶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신 데는 다 깊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약자들을 배려하는 법 제정에 총력을 기울이고, 정치인들은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장기적인 정책을 만들어가야 하겠지만, 그 모든 제도개혁의 기초는 마음의 혁명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혁명은 다른 이들에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과 권력과 명예에 마음을 두고 현세적인 자기 영광만 추구하면서 주위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데에 소홀한다면, 이 땅에서 빈부격차의 갈등과 아픔은 영영 치유의 출구를 찾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한번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으면 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은유하는 ‘기생충’은 누구일까? 부잣집에 숨어들어 간 가난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가난한 자들의 것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내 걸로 만들어서 부와 권력을 누리는 부자들일까? 아니면 부자를 무조건 욕하면서 가난한 자는 무조건 의롭다고 부추기는 편향된 사람들일까? 아니면 자신을 서민, 못 가진 자, 기회를 박탈당한 억울한 시민이라고 자조하면서 늘상 속으로는 자신도 기회만 되면 부와 권력의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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