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본회퍼 신학에서 그리스도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스도는 ‘말씀’(로고스)라는 표현과 혼용하여 표현된다.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표현할 때, 그 의미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또 요한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로고스)의 개념도 아니다. 실존주의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로고스로 이해해야 한다.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을 보면 그리스도를 언급하기 전에 ‘인간 로고스’를 먼저 언급한다. 인간 로고스는 “체계적인 분류와 종합의 과정을 통해 대상의 ‘어떻게’(how)를 규정하는 것”이라 한다. 쉽게 말하면 인간 로고스란 대상을 수단으로 규정하는 내면의 자기주장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본회퍼는 “인간성 속에 질서를 부여하는 로고스”라고 한다. 이것을 이성주 박사는 “이러한 기독론은 존재론적 기독론이 아니라 기능적인 기독론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꼬집었다. 아마 독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인내하며 읽으면 이해가 되리라 생각된다.

인간 로고스를 언급한 후에 본회퍼는 ‘반로고스의 공격’을 말한다. ‘반로고스’란 인간의 자기 주장에 반하는 또 다른 주장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는 반로고스”라고 한다. 로고스는 반로고스의 공격 속에서 점차 반로고스를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인간 로고스는 죽고 하나님 로고스의 생명에 참여한다. 이 표현은 정확하게 헤겔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실제로 본회퍼는 그리스도론에서 “헤겔은 그의 철학에서 바로 이것을 밝히려 했다”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인간 로고스가 ‘정’(正/thesis)이고, 반로고스는 ‘반’(反/antithesis)에 해당하며, 하나님의 로고스는 ‘합’(合/sythesis)이 된다. 한마디로 신학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책은 성경강론이 아니라 철학 강론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반로고스(신적인 로고스)가 인간 로고스를 취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논리는 3세기 이단 ‘양자론’과 논리가 흡사하다. 양자론은 예수가 본래 보통 사람이었으나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을 때, 로고스가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이단이다. 본회퍼를 양자론 이단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신학자들의 손에 맡기자.

핵심을 말한다면 본회퍼에게 그리스도는 실존적 의미의 대상일 뿐이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의 실존적 의미를 찾은 후엔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함으로 인간은 하나님 로고스에 참여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인간은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찾는다.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노동자로서, 정치적 불합리 속에 탄식하는 시민으로서, 부르주아의 억압에 시달리는 프롤레타리아로서, 그리스도를 향해 “당신은 누굽니까”라는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한 실존적 답변을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예수는 공장이라는 공간에서 사회주의자로 현재 존재할 수 있고, 정치적인 일에서는 이상주의자로 존재할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의 현존재 속에서는 선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분은 그들과 한 노선에 서서 원수, 즉 자본주의와 투쟁하신다”

이렇게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재해석하고, 그 재해석된 그리스도의 실존에 참여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로고스에 참여한 ‘구원’이 된다. 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사회주의자로 사는 것이 구원이다.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공산혁명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다. 해방신학의 개념으로 보면 그리스도는 민중(오클로스)의 대명사로 이해된다. 실제로 본회퍼는 해방신학에 이런 방식으로 이론적 근원이 됐다. 킬렌(Allen Killen)은 “해방신학의 역사적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트리히 본회퍼에게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적절한 지적이다. 따라서 민중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자체를 구원으로 삼는다. 본회퍼에게서 역사적 그리스도는 별 의미가 없다. 단지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새로운 의미로 여겨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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