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맥스 루케이도의 스토리텔링으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전하는 십자가의 승리와 소망

 

모두에게 버림받았던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

완전히 패한 줄 알았던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

더 이상 소망을 찾을 수 없었던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영원한 승리가 성취된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

 

본서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탁월한 스토리텔러인 맥스 루케이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할 삶의 의미와 소망을 제시하는 책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수많은 저서를 통해 성경적인 통찰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낸 맥스 루케이도는 이 책에서도 2,000년 전의 이야기를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과 접목하며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간음하다 예수님 앞에 끌려온 여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죽었던 딸을 다시 얻은 회당장,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백부장,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마리아 등을 저자는 우리의 모습, 혹은 우리 이웃의 모습으로 느껴질 만큼 현대적인 각색과 실감 나는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와 소망을 전하는지 이야기한다.

인생의 폭풍우가 몰아칠 때 당신을 붙잡아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고통 대신 평안을 누리고,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확신을 찾고, 희망으로 절망을 밀어내며 살아가게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매 순간 삶의 목적과 소망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다.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저지르고,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여겨진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범사에 형통하여 찬양과 감사가 끊이지 않을 때에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푯대를 바라보라. 우리의 모든 죄와 고통을 담당하신 분이 어떻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는지 생각하라. 부활하신 주와 함께, 날마다 새 힘을 얻으며 승리하는 삶을 살라!

 

저자 소개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목사로, 1988년부터 간사로 섬기기 시작한 오크힐스교회에서 지금은 수석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미국 서부 텍사스의 작은 마을에서 반항기 가득한 십대 시절을 거친 그는 스무 살의 어느 날 만취 상태에서 깨어나 이 세상에는 분명 유흥 이상의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압도되어,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세월을 강단에서, 책에서, 방송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이야기꾼이 되었다.

따뜻하고 위트 있으면서도 예리한 영적 통찰을 놓치지 않는 그의 메시지는 지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성경의 든든한 토대 위에 다시 세워 놓는다. 54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책들이 ECPA에서 선정하는 골드메달리언 상을 일곱 번이나 수상하고, 그중 세 권은 ‘올해의 책’으로 뽑히는 등 작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그를 ‘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작가’로, <뉴욕타임스>는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 중 하나로 꼽았으며,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그를 가리켜 “이 시대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명문장가”라고 칭송했다.

지금까지 출간한 수많은 저서 중 본서를 비롯하여 『흔들리지 않는 약속, 흔들리지 않는 소망』,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이상 생명의말씀사), 『너는 특별하단다』(고슴도치), 『예수님처럼』(복있는사람),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아드폰테스) 등이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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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감사의 글

시작하는 글 - 닻을 깊이 내려라

1. 허리케인 경보

1부. 닻을 내릴 지점 1 - 인생은 허무하지 않다

 

2. 피로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처방

3. 두 개의 묘비

4. 살아 있는 증거

5. 타는 횃불과 살아 있는 약속

6. 천사의 메시지

7. 기억하라

 

2부. 닻을 내릴 지점 2 - 실수는 치명적이지 않다

8. 치명적인 실수

9. 크리스투 헤뎅토르

10. 황금잔

11. 집으로 돌아오라

12. 은혜의 전설

13. 11시의 선물

 

3부. 닻을 내릴 지점 3 - 죽음은 끝이 아니다

14. 하나님 vs. 죽음

15. 환상인가, 실제인가?

16. 영원의 불꽃

17. “나사로야, 나오너라!”

18. 축하 파티

19. 마지막 인사

 

본문중에서

만약 당신이 신앙을 잃는다면, 그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당신은 조금씩 영적인 의무를 게을리하게 될 것이다. 며칠씩 나침반을 보지 않을 것이다. 돛을 손질하지 않을 것이다. 항해에 필요한 장비를 준비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닻을 내리는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다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격랑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닻을 깊이 내리지 않으면 당신은 언제든 떠내려갈 수 있다.

- <시작하는 글-닻을 깊이 내려라> 중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다 내게로 오라.” 그에게 오라는 초대다. 왜 그인가? 그는 압제당하는 나라의 가난한 랍비였다. 정치인도 아니었고, 로마의 권력자들과 친분이 있지도 않았다. 베스트셀러를 쓰지도 않았고, 학위를 취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농부들의 볕에 그을린 얼굴과 가정주부들의 피곤에 찌든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들을 쉬게 해 주겠노라 말한다. 그리고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에게 환멸을 느낀 몇몇 설교자들의 눈을 들여다본다. 금융전문가의 냉소적인 눈빛과 바텐더의 굶주린 눈빛을 응시하며 역설적인 약속을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다. 막다른 골목과 상업 지구에서 사람들이 나아왔다. 자기 존재의 짐을 지고 온 그들에게 그는 종교나 교리, 시스템이 아닌 평안을 주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를 “주님”이라고 불렀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를 “구세주”라고 불렀다.

그가 말한 것 때문이 아니라 그가 행한 것 때문에,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그가 행한 일 때문이었다.

- <피로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처방> 중에서

 

이 여인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실지 궁금했다. 그녀는 진실이 밝혀지면 예수님이 지금처럼 친절하게 그녀를 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아마 화를 내실 거야. 자리를 뜨시겠지. 내가 상종할 사람이 못 된다고 생각하실 거야.’

당신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면 연필을 꺼내 들라. 예수님의 대답에 밑줄을 치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당신 말이 맞소. 당신에게는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는 당신을 호적에 올리려고도 하지 않지요.”

예수님은 비난하지 않으셨다. 화를 내지도 않으셨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식의 설교를 늘어놓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솔직함이었다.

- <두 개의 묘비> 중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이 모든 게 짓궂은 장난이라면?’

‘말한 분이 진짜 하나님인지 어떻게 안담?’

아브람에게 의심의 짙은 어둠이 임한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당신이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조사를 들을 때 당신을 삼키는 것과 같은 어둠.

“악성 종양입니다. 수술해야 해요.”라는 말을 들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어둠.

당신이 또다시 분노를 터뜨렸음을 깨달았을 때 당신을 휘감는 것과 같은 어둠.

마지막까지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이혼이 기정사실화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어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 속에 스며 있는 것과 같은 어둠.

우리가 의심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아주 멀게 느껴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가까이 다가오기로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타는 횃불과 살아 있는 약속> 중에서

 

“오늘 동전 좀 모았니?”

그 아이는 땟국물이 흐르는 손을 펴서 그 안에 가득한 동전을 보여 주었다. 잘하면 음료수 한 병 정도 살 수 있을 만큼이었다.

나는 지갑에서 동전 1달러 정도를 꺼냈다. 그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것을 보는 내 눈은 촉촉해졌다.

그때 신호등 불빛이 바뀌었고, 뒤에 있는 차들이 빵빵거렸다. 그곳을 떠나면서 아이의 모습을 보니 아이는 자기가 받은 것을 보여 주려고 친구들에게 뛰어가고 있었다.

내 어깨 위의 목소리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셋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침묵 속에서 차를 몰았다.

내가 너무 많은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들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불평에 응답하신다면 어떻게 될까? 내 불평을 귀담아 들으셨다면?

그러셨을 수 있다. 내가 무심코 중얼거린 기도에 응답하셨을 수도 있다. 만약 응답하셨다면… 그 결과가 방금 내 방문 앞에 도착했다.

“비행이 취소되어 일정이 꼬이는 게 싫으냐? 그 아이에게는 그런 문제가 없다. 비디오카메라가 고장 나서 속상하냐? 그 아이는 그런 것 때문에 속상할 일이 없다. 오늘 저녁 끼니를 걱정할 수는 있어도 비디오카메라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지. 가족들 문제로 머리가 아프다고? 네가 너무 바빠서 가족들을 챙기기 힘들다면 그 아이는 기꺼이 네 가족 중 한 명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거다. 그리고 자동차가 어떻다고? 그래, 차가 종종 성가시긴 하지. 그렇다면 그 아이의 이동수단을 사용해 보는 것은 어떠냐? 맨발로 걷는 것 말이다.”

하나님은 그 아이를 통해 내게 메시지를 보내셨고, 그 메시지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너는 샴페인이 엎질러졌다고 울고 있구나.”

나는 움찔했다.

“너는 필수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치품이 너무 많아서 불평을 하고 있어. 기본적인 것들이 아니라 부가적인 것들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지. 네 문제의 근원은 다름 아닌 네가 받은 축복들이다!”

- <천사의 메시지> 중에서

 

큰딸 제나가 네 살이 안 되었을 때 나에게 와서 고백했다.

“아빠, 크레용으로 벽에 그림을 그렸어요”(어린아이들의 솔직함은 정말 놀랍다).

나는 제나를 무릎에 앉히고 어떻게 대답하는 게 현명할지 생각한 뒤 물었다.

“그게 잘한 일일까?”

“아니요.”

“네가 벽에 그림을 그리면 아빠가 어떻게 하지?”

“맴매해요.”

“이번에는 어떻게 할 것 같아?”

“사랑해 줘요.”

우리 모두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가?

비록 벽 전체가 우리의 실수로 도배되어 있어도 우리를 사랑해 줄 아버지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계시다. 우리가 최악일 때에도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가 계시다.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 가장 큰 은혜를 부어 주시는 아버지가 계시다.

- <치명적인 실수> 중에서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

우리는 더럽지만 예수님은 순결하시다.

우리는 틀렸지만 예수님은 옳으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로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 점을 이해한 도둑이 예수님께 요청을 드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희망인 예수님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이 한 것과 똑같은 요청을 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겉으로 꾸민 겸손의 말 따위는 없었다. 변명도 없었다. 오직 간절한 도움의 요청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예수님은 십자가의 가장 위대한 기적을 행하셨다. 지진보다 더 위대한 기적, 성전 휘장이 둘로 갈라진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 날이 어두워진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 부활한 성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이다.

그것은 바로 용서의 기적이었다. 죄에 찌든 범죄자가 피에 젖은 구세주에게 받아들여졌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우와!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 도둑은 왕이 빵 부스러기라도 조금 주시지 않을까 하고 성문 앞에서 모자를 쥐어짜던 걸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빵 저장실 전체를 갖게 되었다.

은혜란 이런 것이다!

- <11시의 선물> 중에서

 

브라질에는 밀림 속 오지에 사는 인디언 부족을 발견한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부족은 큰 강 근처에 살았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었지만 전염병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밀림의 다른 쪽에 병원이 있어서, 선교사는 그들을 병원에 데려가 치료와 예방접종을 받게 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병원에 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 인디언 부족은 강을 건너는 것을 두려워했다. 강에 악령이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강을 건너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선교사는 그들의 미신을 없애 주는 어려운 과제에 착수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강을 건너서 마을에 도착했는지 설명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사람들을 데리고 강둑으로 가서 강물에 손을 담가 보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는 강에 들어가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사람들은 그런 선교사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지만, 여전히 망설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강물에 몸을 완전히 담갔다. 그리고 헤엄을 쳐서 반대편으로 나왔다.

강의 능력이라는 것이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함을 입증해 보인 선교사는 승리의 주먹을 들어 올렸다. 결국 인디언들은 환호하며 그의 뒤를 따라 강을 건넜다.

- <“나사로야, 나오너라!”> 중에서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

사막 한가운데의 에베레스트처럼 인류 역사의 지평에 우뚝 선 여섯 시간.

2,000년 동안 해독되고 분석되고 토론되어 온 그 여섯 시간.

이 여섯 시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여섯 시간은 영원(eternity)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온 시간의 문이다. 이 여섯 시간은 위대한 항해자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닻을 내릴 지점을 알려 주려고 깊은 물속에 들어간 순간이다.

그 금요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수로 캄캄해진 인생에게 그 금요일은 용서를 의미한다.

인생의 허무함으로 좌절한 가슴에게 그 금요일은 목적을 의미한다. 그리고 죽음의 터널을 들여다보는 영혼에게 그 금요일은 구원을 의미한다.

어느 금요일의 여섯 시간.

당신에게는 그 금요일의 여섯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 <마지막 인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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