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교수 주장에 대한 반론

Ⅲ. 저자의 주장에 대한 반론

1.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은 동성애에 대한 심판이 아니다.
    - 반론: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동성애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동성애와 관련된 본문을 1) 창세기 19장의 소돔의 문제, 2) 레위기의 성결법전의 문제, 3)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동성애 문제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저자는 성경해석의 다양성의 관점의 길을 열어두었고, 이어서 창세기 19장에 나타나는 소돔의 멸망문제를 동성애로 인한 죄 때문이 아니라 나그네를 환대하지 못했던 모습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성경해석 관점은 수정주의적 견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성경해석의 수정주의적 견해는 바른 성경주해를 통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면 환영받을 만한 일이지만, 적어도 창세기 19장의 해석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다. 신득일은 창세기 19장을 해석할 때, 문맥적 의미에서‘야다(yadah)’는 ‘성관계’를 뜻한다고 했다. 그 근거로 5절에 “남자를 모르는 두 딸”에서 사용된 ‘야다(yadah)’와 8절의 ‘야다(yadah)’는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는 Jame B, de Young의 견해를 인용하여 이 곳에서 ‘동침하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는 ‘사캅sakab’을 사용하지 않고 ‘야다(yadah)’를 사용한 이유는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요구한 것에 대한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따라 신득일은 ‘야다(yadah)’에 대한 베일리의 견해가 타당하지 않음을 밝히면서, 이 본문은 동성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롯의 부인이 소금기둥으로 변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를 그린 뉘른베르크 크로니클의 목판화.

또한 이 본문의 주제가 ‘환대’인지 ‘동성애’인지에 대한 논의는 보다 넓은 문맥을 살펴보면 해결 된다. 창세기 18장 20-2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보다 앞선 창세기 13장 13절 말씀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라는 말씀도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소돔 사람들의 죄악이 동성애가 아니라 단순히 환대의 소홀이라면, 이 죄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큰 죄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라는 표현을 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는 ‘큰 죄악’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그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가셨다고 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기존의 성경해석 관점에 동의하지하지 않고 수정주의적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기존의 방법으로 창세기 19장을 성경 해석한 것(동성애)은 잘못되었고, 새롭게 제시되는 견해(환대)가 맞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성경에는 동성애를 죄라고 인정하는 부분이 없는 것처럼 주장해 나간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분명히 '환대의 소홀'이 아닌 '창조질서에 반하는 큰 죄악, 곧 동성애'때문에 멸망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2.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동성애에 대하여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 반론 : 저자는 인용하는 학자들의 전체적인 견해를 왜곡한 채 일부만 취했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에 정통신학의 맥락에 서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복음(개혁)주의 학자들의 글을 많이 참고하고 인용한다. 구약의 본문을 해석할 때 신득일, 배정훈의 글을 참고하기도 하고, 동성애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 존 스토트(John Stott)의 글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동성애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복음주의의 변화된 입장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신득일은 다른 학술지 논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으로 결혼을 하도록 창조원리를 허락하셨다.”고 말하면서 “결혼을 통한 하나님의 복은 남녀 간의 결혼에서 보장되는 것이지 동성 간의 결합에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동성 간의 결혼과 성관계는 타락한 관계로서 당사자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부끄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된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배정훈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허호익이 인용한 그 글의 결론에서 “동성애를 부정하는 성서구절을 모호하거나 동성애와 관계없는 것으로 서술함으로써 자신들을 무고한 핍박을 받는 소수자로 주장하며... 구약성서는 동성애를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가증한 죄로 규정하고 분명하게 동성애를 부정하고 있다.”고 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존 스토트의 인용도 마찬가지다. 동성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흐름을 왜곡하고 특정한 부분만 선별했음을 알 수 있다. 존 스토트는 부드럽고 정중하지만 단호한 언어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동성애 관계를 고집스럽게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징계를 내려야 한다. 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시행해야 한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 간에 혹은 동성애적 범죄와 이성애적 범죄 간에 차별을 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공개적인 스캔들이 발생할 경우 내려야 하는 징계를 마녀 사냥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 존 스토트,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547. -

존스토트는 성경에서 동성애는 분명히 죄라고 규정하고 있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교회가 징계를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맹목적이고 맹신적으로 동성애를 거부하는 모습 또한 경계한다. 마녀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를 품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말하되, 한 사람의 인격으로는 존중하고 함께 협력하여 그 사람이 죄(동성애)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인용하는 학자의 글 대부분을 왜곡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동성애의 죄 보다 더 심한 죄가 많고, 형법상으로 문제없으니 동성애를 인정해야 한다.
  -반론 : 모든 죄를 다 경계해야 하고, 우리의 판단 기준은 세상 법이 아닌 성경이 되어야 한다.

저자는 성경에는 동성애 보다 더 큰 죄가 있으며, 죄는 시대에 따라 가변적이고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종교적 죄(sin)와 법에서 규정하는 죄(crime)의 구분을 통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그들을 인정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죄의 크기에 따라서 더 중요한 죄 덜 중요한 죄를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죄라고 생각되는 모든 부분은 죄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죄라고 생각되는 모든 부분에서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지 어떤 것은 중요하지 않은 죄기 때문에 적당히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저자는 종교적 죄(sin)와 법적인 죄(crime)의 구분을 통하여서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설사 종교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세상 법이 아니다. 우리의 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은 오직 성경이다. 성경에서 동성애에 대해서 무엇이라 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기준을 따라 평가를 해야 하는데, 세상의 법에 호소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4. 동성애는 에이즈를 유발하지 않고, 동성애는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다.
  - 반론: 남성간 동성애는 에이즈를 유발하고, 동성애는 평생 관리해야 하는 질병이다.

동성애, 특별히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에이즈 환자의 수가 급격한 증가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성애·동성혼 반대 국민연합」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남성간 동성애로 인하여 에이즈의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것을 미국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2010년에 47,500명의 HIV 신규감염자 중 80%에 해당하는 38,000명이 남성에 해당됨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도 2018년 내국인 에이즈 감염인의 통계를 살펴보면 “남자 95.6%(945명), 여자 4.4%(44명)으로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감염 경로는 99%가 성행위이다.”고 나와 있다. 또한 다른 기사에서도 에이즈 발생 현황은 성별로는 남자가 많고 연령별로는 20대가 가장 높은 것을 조사되었다. 결국 다른 감염경로를 통해서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지만, 주된 감염 경로는 동성애(남성간 동성애)를 통한 것임이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저자는 에이즈는 동성애와 상관없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 1인당 월 치료비용이 적힌 현수막(사진=GWM 연합 블로그)

또한 에이즈를 통제하지 못하는 병, 걸리면 무조건 죽는 병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일면 맞는 말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1981년 HIV/에이즈는 죽음과 동일시 되는 무서운 질병이었지만, 이후에는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관리의 영역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유엔 에이즈 계획(UNAIDS)도 2015년에 펴낸 자료집에서 "치료와 관리를 받으면 보통 수명을 누릴 수 있고, 치료를 받지 않을 경우 11년의 기대수명을 누릴 수 있는 질병"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여기의 핵심은 '관리'이다. 에이즈에 걸리면 평생 관리를 해야한다. 현재의 의료체계에서 완치에 이르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평생 관리를 해야 하는 질병에 대하여 '치료가 가능하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섣부른 평가라 할 수 있다.

5. 해외에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인정해야 한다.
  - 반론: 우리와 해외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우리의 판단 기준은 오직 성경이다.

해외에서 주장하는 의견들은 기본적으로 현대사상에 의해 많이 오염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과 후기구조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기존의 가치가 뒤집어지고, 소수의 목소리가 진리가 되고 있다. 칼 마르크스 이후에 유물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성(性) 해방이 곧 권력이 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인하여 해외에서는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주장하며, 기존 진리와 전통을 해체하면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추세이다. 이런 추세는 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이제는 동성애자가 목사가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해외의 흐름일 뿐이다. 우리는 사상적 영향을 받아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직 성경을 판단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이 우리의 걸음을 비춰줄 때에, 말씀의 빛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시119:105).  판단기준으로서의 성경에 대해서는 3번 주장의 반론에서 이미 논했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Ⅳ. 결론

허호익의 『동성애는 죄인가?』는 수정주의적 성경해석 방법을 통하여 성경 본문을 다르게 바라보며, 이를 통해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남성과 여성 뿐 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를 가지고 있는 제3의 성이 있음을 말하면서 인간을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죄에 대하여도 종교적 맥락이 아닌 사회적 맥락에서 접근하면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쳐 나간다. 이런 그의 주장에는 마르크스적 유물론과 후기 구조주의적 영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다분히 나타남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을 해야 할까?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실천적 관점에서 동성애 문제를 대할 때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하여 존 스토트의 입장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에게 권할 때에, 동성애가 죄이며, 죄에서 회개하는 형제들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정말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들과 함께 있어주어야 함을 힘써 말하고 있다.

그분의 받아주심은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을 완전하게 값없이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이지 우리가 계속 죄를 짓는 것을 눈감아 주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를 받아 주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료 회개자와 동료 순례자로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계속 죄를 짓겠다고 고집하는 동료 죄인으로 받아주는 것은 아니다.  
- 존 스토트,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537. -

나는 동성애자들에게 자신의 성적 성향을 모든 사람에게 밝히라고 권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필요하지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하짐나 그들에게 심중을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을 만한 친구가 적어도 한 명은 정말로 필요하다. 그 친구는 그들을 멸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우정과 기도로 후원해 줄 것이다.
- 존 스토트,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546. -

우리는 동성애 자체는 죄로 간주하고 부정해야 한다. 특히 그것이 ‘경향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행동’으로 나타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동성애적 모습을 가지고 고민하는 형제자매들이 있다면, 우리가 원색적으로 그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미는 손을 잡아 줄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야 할 것이다. 그들 또한 구원을 받아야 하는 한 영혼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동성애에 대한 합법화·제도화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계속 높이되,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앞으로 나아와 전인격적으로 변화되어 동성애의 죄를 버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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