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의 마중물 고신대 복음병원 장기려박사의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

코로나19로 인하여 한국의 의료진 및 의료체계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호평을 받고 있다. 정부는 한국의료진들의 헌신을 영상으로 제작하여 전 세계에 배포함으로 수준 높은 의료체계 및 의료진들의 헌신을 자랑 하기도 했다. 이런 의료체계로 인하여 한국에 가면 치료를 잘 받을 수 있다는 정보들이 해외에 전해지게 되고, 아직 입국제한을 하지 않은 상황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특히,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 또한 본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입국자의 90%정도가 한국국적을 가진 국민들이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이유는 잘 발달되어 있는 의료체계, 헌신적인 의료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렴한(혹은 확진자일 경우 비용이 없는) 의료비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하여 보고자 하는 것은 외국인들이 극찬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이러한 의료체계, 특히 온 국민이 마음껏 병원을 다닐 수 있도록 해준 국민건강보험 체계는 누가 시작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과 같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국민건강보험이 완전하지는 않고, 이에 따른 의료수가 문제, 보험 적용 대상 확대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런 내용보다는, 건강보험체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역사적 발전과정을 추적해보도록 한다.

먼저 국민건강보험체계는 박정희 정권 때인 1963년에 법적으로 제도가 마련되었다. 이때는 ‘의료보험법’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의료에 대한 사회보험을 실시하고자 한 것은 1963년 의료보험법이 제정되면서부터이다. 이때 의료보험법이 제정된 이유는 북한이 인민들에게 ‘무상의료’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북한의 제도에 맞서 남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을 돌려주기 위해 의료보험법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허울뿐인 제도였기 때문에 이 법을 구체적으로 손질하여 실시한 1977년까지는 유명무실한 법과 제도에 불과했다.

장기려박사와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

하지만 민간 영역에서 오늘날의 의료보험 같은 제도가 실행되었다. 1968년 부산 지역의 23개 교회 단체의 대표가 주축이 되어 한 협동조합을 설립했는데, 바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은 미국 텍사스주에서 발생한 청십자 운동에 영향을 받아서 세워진 것으로 가난한 환자를 구제하고, 조합원 서로가 돕는 정신을 가지며, 질병과 경제적 부담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사회를 만드는데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협동조합을 세우는 데는 당시에 부산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성산(聖山) 장기려 박사(1911 ~ 1995)이다. 장기려 박사는 6·25 전쟁 당시 부산 영도의 한 천막진료소를 세워 무료진료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현재 고신대 복음병원의 모태이다. 그는 1976년까지 25년을 고신대 복음병원 원장으로 봉직하면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시켰던 것이다. 이때 함께 동참했던 사람들은 이재술, 박동식, 조광제, 서원길, 손창희, 김영환 등이다.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은 1969년 2월 ‘부산의료협동조합’과 통합하여 회원수가 급증하였고, 1969년 7월에는 서울 청십자 의료협동조합이 발족되었고, 이후 전주, 원주, 거제도 등지로 의료보험 조합 운동이 확산되었다. 조합원들은 병원비에 대하여 40% 할인, 조합부담 30%, 본인부담 30%로 운영되어, 현재 의료보험 제도의 초석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1976년 사단법인 한국 청십자 복지회를 설립하여 청십자 병원을 직접 운영하였고, 지역 의료보험을 넘어서 전국적으로 영세민 환자의 구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노태우 정부가 전 국민의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려고 하기 직전인, 1989년 6월 30일에 20만 명의 회원을 국가 의료 보험에 귀속시키고 설립 21년 만에 발전적으로 해체 되었다.

이런 민간 영역의 발전과 노력을 힘입어 정부 차원에서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었다. 1977년에는 500인 이상 대규모 사업장을 중심으로 직장 의료보험이 시행되었고, 1979년에는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을 위한 의료보험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중소기업, 영세기업, 자영업, 농어민, 장애인, 일반 국민 등 사회적 약자는 여전히 제외되어 있었다. 전두환 정부 시절에 의료보험제도를 전 국민으로 확대할 것을 약속하였고, 1989년 1월부터 시행하기로 하였으나,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거쳐 개헌이 진행되자 이를 제대로 추진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대통령이 된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선거시절 공약인 전국민 의료보험 가입을 실행하고자 하였고, 1988년 1월부터 농어촌 주민을 지역조합을 통해 의료보험에 가입, 1988년에는 5인 이상 근로자의 사업장까지 직장의료보험 확대, 1989년 7월에 마침내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하게 된다. 그리고 각자 다양한 모습으로 쪼개어진 형태의 의료보험을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2000년에 각 조합을 통합해 오늘날과 같은 전 국민 건강보험이라는 통합된 형태의 건강보험제도가 실시 된 것이다.

미국의 경우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한국을 모델로 삼은 건강보험 개혁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 가정에서는 여전히 민간보험을 위한 많은 금액이 지출되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제때 병원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 또한 미국의 엄청난 의료비에 대한 이야기는 기사를 통해 자주 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의료 보험제도의 실시로 인하여 국민들은 안정적으로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오늘날과 같이 적은 비용으로 수준 높은 의료혜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고신대 복음병원 초대 병원장을 지낸 장기려 박사(출처-고신대병원 공식 블로그)

국민건강보험 제도는 정부에서 법을 제정하고 정책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하였지만, 부산에서 장기려 박사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던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라는 마중물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의료제도를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말씀을 살아내려고 노력한 장기려 박사, 비록 자신이 금전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아픈 환자를 그냥 돌려보내지 못한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한 사람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의 의료제도는 이처럼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장기려 박사의 생애(출처-'크렌체(crenche)'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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