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 알고 대처하자

들어가는 말

정군효 목사(사) 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의회 대표 월간 ⌜교회와이단⌟ 발행인

한국교회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이하‘신천지’라 한다)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많은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다. 신천지의 주장에 의하면 신천지신도가 20만에 육박(肉薄)했다고 한다. 신천지는 사회제도권 곳곳의 자리매김을 하고 건전한 단체인양 행사하고 있다. 이런 신천지를 경계하고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는 신천지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신천지의 형성과정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으로 초대교회는 혼란을 겪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로 초기에 황국주씨, 이용도씨, 유명화씨, 김성도씨 등 잘못된 이단 사상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했고 이들의 계보를 이어받은 이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이단교리의 시작은 백남주씨이다. 백남주씨는 평양신학교 25회 졸업생이며 당시 삼대천재라고 불리었다. 백남주씨는 당시 “새생명의 길”을 편찬(編纂)하였는데, 김백문씨는 백남주씨가 지은 “새생명의 길”을 근간으로 하여 “기독교근본원리”를 저술한다. 김백문씨의 신앙에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김남조 라고 하는 여인인데 그는 황국주씨와 교분이 있고 신령파이자 기도꾼이라고 불리었다. 그 이후 김백문씨의 “기독교근본원리”를 통해 문선명씨의 “원리강론”이 나오게 된다. 또한 황국주씨의 제자인 정득은이라고 하는 여인이 김백문씨와 깊은 관계가 있었는데 정득은 여인은 전도관(천부교)을 세운 박태선씨에게 영향을 주었다.

신천지는 박태선씨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만희씨는 1957년 5월에 박태선씨의 전도관이 운영하고 있던 집성촌인 “신앙촌”을 찾아간다. 이만희씨는 박태선 교주의 신앙촌에 들어가서 손마디가 없어질 정도로 그가 가지고 있는 미장기술을 가지고 천년성을 쌓는다고 벽돌 쌓고, 집 짓는 일을 1967년 신앙촌에서 나오기까지 10년간 밤낮으로 하였다고 한다. 이만희씨가 신앙촌을 나와서 1967년말경 유재열씨가 세운 장막성전에 합류하게 되는데, 유재열씨는 서울 상도동에 호생기도원 출신이다. 호생기도원은 1964년 김종규(본명:김용기)씨가 세웠는데 김종규씨는 박태선씨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호생기도원은 이후 1965년 경기도 과천 막계리 청계산 기슭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리고 1966년 또다시 충청도 증원군에 위치해 있는 해발 640m 천둥산 정상으로 이전하였다. 유재열씨는 1965년 신비체험을 한 후 부친인 유인구씨와 함께 호생기도원(김종규)에 합류 한 후 김종규씨의 여신도 간음사건을 통해 호생기도원에서 이탈하였다.

유재열씨는 1966년 4월 4일 청계산 계곡에 장막성전을 설립하는데 그때 유재열씨를 어린종, 삼손, 선지자라고 불리었다. 유재열씨는 이때 시한부종말론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만희씨는 1967년말에 장막성전에 들어와서 유재열씨의 영향을 받았으나, 1969년 9월 14일 삼년 반 언약의 기간에 역사가 성취되지 않자 이만희 씨는 유재열씨와 다투고 장막성전을 떠났다. 그리고 잠시 통일교 강사출신인 목영득씨에게 약6개월간 의탁했다가 고향인 경북 청도로 내려가서 7년간 살았다. 이후 이만희씨는 백만봉씨가 1977년에 세운 재창조교회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백만봉씨는 장막성전(유재열)에서 솔로몬이라 불렸는데 재창조교회를 만들면서 자기를 자칭 영부, 심판주, 재림주다 라고 하였으며, 이만희씨는 솔로몬(백만봉)의 열두 제자로 활동하였다.

솔로몬(백만봉)도 유재열(장막성전)씨가 주장하였던 시한부종말론을 주장 하였다. 그러나 역시 1980년 3월14일 종말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만희씨는 솔로몬(백만봉)과 다툼을 하고 이탈하여 홍종효씨와 더불어 신천지교회를 세우게 된다. 위에서 살펴보듯이 이만희씨의 영적인 계보는 이단종파 사람들과 상당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위에서 살펴보듯이 이만희씨의 이단계보는 김백문-문선명(통일교), 박태선(천부교)-김종규(호생기도원)-유재열(장막성전)-이만희(신천지)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신천지 집회 장면 / 사진=엠박뉴스 갈무리

 

신천지의 배경

이만희씨는 1931년 9월15일 경북 청도군 풍각면 현리에서 태어났다. 17세때 서울 성동구 금호동 형의 집에 기거하면서 건축업을 하던 중, 전도사에게 이끌려 경복궁 앞 천막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환상과 신비체험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 이후 전도관 박태선씨의 신앙촌에 있다가 1967년 2월 재산을 빼앗기고 사기를 당했다며 이탈하여 장막성전을 이끌던 유재열씨의 집회에 참석한 후 그를 따르게 된다. 1971년 9월7일에는 40개 항목의 혐의로 유재열씨와 신도 김창도씨를 고소해 법정에 세우기도 하였다. 1977년에는 장막성전에서 ‘솔로몬’(영명)으로 통하던 백만봉씨를 추종하며 ‘솔로몬 창조교회’ 12사도조직의 하나로 있었다. 그 이후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규합해 경기도 안양에 신천지 중앙교회를 설립했다. 설립초기에는 이만희씨와 홍종효씨 두 사람을 각각 ‘두 증인’ ‘모세와 아론’으로 지칭하며 이만희 씨가 설교했고, 홍종효씨가 예배의 사회와 기도를 맡아 교회를 이끌었다. 홍종효씨는 1987년 사소한 문제로 이만희씨와 결별한 이후 자신만이 ‘진짜 예수’라고 주장하며 서울 홍제동에 증거장막성전을 세워 활동하였다. 이만희씨는 과거 유재열의 장막성전을 답습하여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하여 자신의 피를 뽑아 새 언약(새 언약서 뒷면에는 피로 그은 십자가가 있다)을 맺고, 이를 통해 영적 이스라엘 나라의 선민이 된다며 추종자들에게 ‘사령장’을 나누어 주었다. 이만희 씨와 신천지는 장막성전 유재열씨의 줄기이다. 당시 자칭 보혜사 성령, 어린양이라 불렸던 장막성전 교주 유재열 씨는 1966년 17세의 나이로 장막성전이란 단체를 세워 교주로 등극하면서 장안의 화제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유재열 씨는 1975년 9월, 한 사기 사건과 관련되어 교도소 출감 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듯 1981년에 홀연히 잠적을 감추었다. 당시 동아일보(1975년 9월 6일자)는 “서울지검 영등포지청 김성남 검사는 6일 대한기독교장막성전(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2리)이라는 종교 단체를 만들어 신도들의 재산을 사취하고 폭행, 공갈 등을 해 온 교주 유재열(26), 부교주 김창도(41), 집사 임종대(46), 비서 박용만(26) 씨 등 4명을 사기 공갈 무고폭력행위 등 처벌에 과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유재열 씨의 잠적은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겼다. 지금도 잠적이유는 의구심으로 남고 있다. 유재열 씨의 잠적으로 당시 청지기교육원 원장이었던 오평호 씨가 장막성전을 이어받아 장막성전을 이삭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기성 교회로 간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 후 핵심 추종 신도들은 반발하고 나섰고, 급기야 삼삼오오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각기 또 다른 집단을 형성했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유재열 씨의 뒤를 이은 장막성전이라고 표명하며 독자 노선을 펼치게 되었다. 이만희 씨(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가 바로 그중에 한 사람이다. 이만희 씨 외에 홍종효(증거장막성전), 심재권(무지개증거장막), 정창래(성남장막성전) 등도 서울과 근교에서 각각 활동 영역을 정하였다. 이런 면에서 보면 유재열 씨의 장막성전은 없어진 것이 아니며, 몇 사람에 의해서 장막성전의 ‘그 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유재열 이후 세워진 그 계열의 단체들은 단체명에 ‘장막성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자칭 재림예수 유재열 씨가 세운 ‘장막성전’의 본뜻을 계속 살리겠다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그들의 조직은 1인 교주 체제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과, 교주만이 성경의 요한계시록 등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중 대표적인 이가 바로 이만희 씨(신천지)다.

이만희 씨는 유재열 씨를 ‘배도자’로 오평호 씨를 ‘멸망자’로 이만희 씨 본인은 ‘구원자’라고 하고, 1980년 3월 이만희씨가 세운 신천지가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이만희씨는 유재열씨를 비판하다가 명예훼손혐의로 고발되어 1980년 10월, 성북구치소에 98일간 수감되었고 3년6개월간 집행유예기간을 보냈다. 이만희씨는 3년6개월의 형기를 요한계시록 11장11절의 ‘삼일반’과 다니엘 7장25절의 ‘한때, 두때, 반때’를 뜻하는 것이라며 자신이 증거의 실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만희씨는 1981년 집행유예로 출감이후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청계산과 관악산을 다니며 집행유예기간이 마칠 때 까지 산에서 모임을 가졌다. 1984년 2월7일 집행유예기간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경기 안양시 비산동 동산아파트 지하에 1984년 6월3일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정식으로 예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24일에는 ‘신천지 성헌’을 발표하면서 이 성헌에 1984년 3월14일이 신천지 창립일로 기록하고 있다.

이만희 씨의 이단성은 그의 자료에서 잘 나타난다. 신천지의 이름으로 이만희 씨가 활동했던 초기에 그는 ‘새하늘 새땅’이라는 홍보물(발행인 이만희)을 곳곳에 뿌린 적이 있다. 그는 이때 자신의 이단 사상을 밝히 드러내 보였다. “신천지에 와야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본인은 증거하노니 말세에 약속한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진리의 성읍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전이므로 만방은 이곳으로 와야만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약속이다”(새하늘새땅, 1991년 1월)하였다. 또한 그는 “신천지에 오지 않으면 이단이 된다”는 주장까지 하였다(새하늘새땅, 1990년 11월). 신천지(이만희)는 한국교회 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었다(통합/1995/이단, 합동/1995/신학적 비판 가치 없는 집단, 고신/2005/이단, 기성/1999/이단 등).

 

나가는 말

‘역사는 반복된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이만희 씨가 주장하는 것도 본인의 주장이라고 하기 보다는 이미 앞서 나타났던 이단들의 주장의 일부이다.

신천지 이만희 씨는 박태선(전도관)의 직접적인 계열의 사람은 아니고 간접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만희씨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곳은 박태선(전도관)의 영향을 받은 유재열(장막성전)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항상 이단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 이후 그 어떤 계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계시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모든 자들은 종교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계속>

 

※기고문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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