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영 박사(사랑의 교회 집사, 가천대 의대 외과학교실)

복음주의 운동은 복음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믿는 대다수 신자들을 관리하고 사회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중적인 활동을 벌이는 데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반지성에 가까운 스탠스로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학문 구축에는 실패, 이는 하나님의 자연계시에 대한 지적 연구를 소홀히 한 결과였다.

18세기 말-19세기 초에 미국에서는 공화주의, 민주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도덕적 계몽주의라는 미국적 이상을 기독교적 신념과 철저히 일치시킨 독특한 형태의 기독교를 대중에게 제시했고 이는 미국에서 가장 우세한 종교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계로 달려간 복음주의자들은 허둥대다가 실패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치활동이 오히려 복음 증거를 가로막고 주님의 영광을 가렸다. 로날드 사이더 등의 소위 진보 복음주의 학자들은 이 실패 원인을 복음주의 정치철학의 부재에서 찾았다. 그는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레이건을 미국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모델을 롤모델로 삼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료선교사들이 의료와 교육 그리고 복음, 세 가지를 갖고 조선에 들어오면서 기독교 전파가 이루어졌는데 이 땅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하던 무속신앙과 결합하여 독특한 형태의 한국 기독교가 자라나게 되었다.

기독자유통일당 등 우리나라 기독교 정당은 그동안 당명을 바꿔오며 국회입성을 도모해왔다. 하지만 이들이 건네는 아젠다는 '동성애와 이슬람 문제'라는 교계의 정서를 정책의 전면에 내세우는 수준이다. 기독교 정당이 기독교의 기본 정신과 보편적 가치를 정치에 온전히 투영하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이러한 제한적 이슈에 지나치게 매달린 것이 소수의 표를 결집시킨 반면, 전반적인 지지를 유도하는 데에는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교계가 복음주의 운동 즉, ‘예수님만 잘 믿으면 천국간다’에만 집중한 나머지, 목회자 양성도 믿음 좋은 목회자, 인품 훌륭한 목회자 양성과 같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자질 등이 교육의 최종 목표(end point)였고, 교회내 리더양성도 복음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가 사회내 어떤 비전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기는 커녕, 복음만 강조함으로써 현재와 같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흔들리는 이 시국에도 교회는 아무 힘을 쓰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의 복음의 복은 '내 복을 비나이다'와 같은 기복의 의미로 쓰여지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사회적 배경 속 우리나라 기독교 정당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복음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와 공부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만든 정당이 맞는가? 또한, 복음주의 정치 실패의 역사를 극복하고 해결할만한 아젠다가 있는 정당이 맞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을 동시에 살아가야 하는 크리스천들에게 복음주의 리더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음주의를 세상 속에서 실현하고 사회제도적으로 행동화 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부터 시작해야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모든 물음을 명확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려 했고 이는 그의 사상이 지닌 포괄성 때문이기도 한데, 그는 평생 끊임없는 지적 활동을 통해 당시의 수많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 기독교적인 답을 제시했다. 복음주의자들은 과학, 철학, 역사, 정치학, 예술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계몽적인 방법론을 채택해왔는데, 이는 부흥운동과 함께 성령의 영역에서조차 합리성과 과학적 예측가능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세상과 삶 전체에 대한 지속적이며 종합적인 기독교적 사고를 거의 활용하지 않는 신앙형태를 만들어왔다.

해리 블래마이어즈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세속적인 지성과는 달리 사회적, 정치적, 혹은 문화적 생활에 밀접하고도 현저한 영향을 미치는 생명력 있는 기독교적 지성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세계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엄격하게 개인적인 행위만을 주로 다루는 매우 협소한 사고의 영역 이외에도, 세속적 지성에 의하여 구성된 준거틀과 세속적 가치 평가를 반영하는 판단의 틀을 수용하여 지성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기독교적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크 A. 놀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라는 저서에서 부흥 운동과 국교 분리(국가와 교회의 분리)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배경 하에, ‘실용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원리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게 된 정황에 대해 이렇게 고찰하고 있다. 사회 속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메시지가 가장 효과적인가?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을 회심시켜 교회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결과에 대한 중압감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연, 하나님과 사회, 하나님과 아름다움, 혹은 하나님과 인간 지성의 형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나 에너지가 거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도 끊임없는 체제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공산주의를 몸소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자유는 거저 주어지며 응당 내재된 본성, 당연한 것인 inborn nature로 착각하고 한 세대를 살았다. 그래서 체제 위협을 인식 못한 채 현재의 역사를 자유민주주의 체제내의 좌우익 debate 수준으로 보고 이는 건강한 싸움이라고들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이 위험을 못 느낀다. 관심이 없는 경우도 태반이다. 전세계가 공산주의 적그리스도의 쓰나미를 경험하고 있다. 기독교적 지성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이 시대에 복음주의 지성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어떻게 정치활동에 참여해야할까. 단순히 기존 기독교 정당을 국회입성만 시키면 해결되는 문제인가? 한국 교계 내에서의 활발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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