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프가니스탄의 현주소


끝나지 않은 전쟁


페르시아제국(현,이란)의 한 부분이었으며 이후 1747년 이란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다. 그러나 건국 후 왕권을 둘러싼 오랜 내분이 계속되면서 20세기 초 영국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서야 잠잠해졌고, 영국과의 3번의 전쟁(1838-1842, 1878-1881, 1919)으로 약해진 중앙집권체제를 틈타 다시 종족간의 분쟁이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아프간의 본격적인 비극은 1978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군사 쿠데타로부터 비롯됐다. 이후 1979년 소련 침공, 1989년 소련 철군, 1992년 이슬람 반군 무자헤딘에 의해 소련공산주의 정권의 붕괴와 내전, 1996년부터 탈레반(이슬람신학생)의 종교 독재 정권의 수립과 반탈레반군과의 전쟁을 2001년까지 감내해야 했다. 다시 2001년에는 미국의 침공을 받았으며 2004년 카르자이 정부가 세워진 이래로 지금까지는 다국적군(ISAF)과 탈레반 간의 전쟁을 겪고 있다. 결국 전쟁은 현재까지 30년째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미국 부시정권은 2001년 9.11 테러의 주체인 알카에다의 지도자 빈 라덴과 그를 숨겨주었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과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여 2개월 만에 공식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에 미국과 유엔에 의해서 승전국의 통치 이념에 따라서 임시정부를 거쳐서 2004년에는 대통령제로서 친미적인 현 카르자이 정부가 들어섰을 때, 25년에 가까운 전쟁을 마감하고 평화정착과 국가 재건설(nation-rebuilding)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나 부시가 선언했던 ‘희망의 새 시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탈레반을 격퇴한 후에 이어진 ‘네오 탈레반’의 재부상과 알카에다와의 연계 및 이와 관련한 충돌과 사건들은 아프가니스탄이 국가로서의 안정성에 대한 의심을 가중시키고 있다.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2006년 세계인권 50주년 기념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테러범도, 테러범에 대한 다국적군의 공습도 막아낼 수 없다’고 아프간의 막막한 현실을 대변했다.

사회학자들은 국민이 정부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치안확보라고 한다. 다음으로 복지, 마지막으로 발전과 자유를 요구한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전쟁으로 인한 도미노 현상이 국내의 내부적인 갈등요소와 결합하여 사회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켰으며, 외부적으로는 아프간의 중앙아시아의 십자로라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인한 지역적이고 국제적인 정치가들의 영향과 특히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하에 다국적군이 벌이는 탈레반과의 전쟁은 아프간이 안정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고 있다.

근본적으로 전쟁으로 인해 국가로서의 통합기능을 상실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내부적인 갈등요소인 인구의 40퍼센트가 사망하거나 난민으로 전락한 것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800달러(73만원)에 2005년 실업률이 40%에 이르는 그야말로 경제적인 파탄에 이른 것, 그러나 이것에 대처할 수 없는 허수아비 정부, 무장 군벌의 잔존, 난민들의 귀환에 따른 도시화 문제, 탈레반 및 알카에다 전사들의 재부상으로 인한 국제사회와의 충돌 등의 도미노 현상에 놓여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불안정한 많은 국가내외적 요소들은 곧 아프가니스탄이 국가로서의 통합 기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Ⅱ. 아프가니스탄 국가통합의 실패 요인


가. 다양한 인종적 종족주의


아프가니스탄은 1747년 이란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국가를 수립한 이래 제대로 근대국가의 체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이제껏 이어져 왔다. 또한 우리나라와 동일하게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의 경험과 냉전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회 갈등을 경험한 역사적 고통의 양상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행한 역사적 고통을 단시일 내에 극복할 수 있었던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국가통합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국민의 정체성이 있었던 반면에 아프가니스탄은 종족주의가 각 개인의 정체성의 기반이다. 강력한 인종적·종교적 종족주의가 그들의 정체성의 첫 번째 준거 틀인 것이 우리와 다르며, 대부분의 근대국가와의 분명한 차이이다.

파쉬툰족이면서 아프간의 창립자인 아흐마드 압달리(Ahmad Abdali) 시대 이래로 탈레반이나 현 대통령 카르자이가 파쉬툰족 출신인 것 등,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질적 지도자는 늘 파쉬툰족 출신이었다. 아흐마드 압달리는 타직족, 하자르족, 우즈벡족과 같은 다른 부족이 절대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각 부족은 자신들의 부족장에 의해 통치되고 그 부족장들이 모여 ‘로야 지르가’(Loya Jirga)를 통해서 국가를 운영한다는 부족연방제가 합의되어 시행된 이래 지금까지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다른 정치체제가 시도되지 못했다. 로야 지르가 체제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아프가니스탄이 경제적으로 목축단계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부족 통치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했으며, 민족국가 의식을 획득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나 다른 외세로부터 보호와 침략당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아프간 인이라고 생각하는 법이 없다.

소련 침공에 저항했던 무자헤딘도 서로 단결하여 싸운 적이 없으며, 각 부족이 자기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저항했을 뿐이었다. 늘 그들은 타직족이냐 우즈벡족이냐, 하자라족이냐 아니면 파쉬툰족이냐로 갈등했다.

이러한 많은 부족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적인 요인과 작용하여 주변의 외세 및 강대국과 결탁해 그들의 이권을 위한 분쟁을 일으키는 전통이 생겨나게 했다. 그것은 아프가니스탄이 비록 국민국가라는 체제 아래 묶여 있지만, 본질적으로 국민국가라는 외투를 쓰기에는 너무 다양한 종족과 문화로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는 것이다. 그나마 불안한 다민족 다문화 공동체들의 국민국가의 외투도 1978년 공산주의 쿠테타와 1979년 소련의 군사침략에 의해 그 균형이 완전히 깨지면서 내전은 더욱 심화되게 된 것이다.

2004년 카르자이 정부가 들어섰으나 ‘카불 정부’로만 인정될 정도로 여전히 종족적 군벌들이 중앙통제를 무력화하고 군벌들 간에 경쟁을 하고 있어 지방은 불안정한 상태이다. 아프간 남부와 파키스탄의 서북부 변방에서 재부상하고 있는 파쉬툰족 중심의 네오탈레반 세력들도 친미적인 카르자이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그 지역에서 종교적 민족적 저항을 게릴라전의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듯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이 근대국가로서의 혼란한 정세와 내전 및 탈레반의 부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인종적 종교적 종족주의가 주요 원인인 것이다.


나. 유목적인 경제적 구조의 특수성


특수한 지형적 환경은 특수한 사회질서를 형성한다. 험난한 산악 국가의 경우 중앙권력의 통치력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고 중앙 권력의 영향력은 더욱더 약화된다. 이러한 경우 충성심은 지역적인 범위에 머무르거나 혹은 가족이나 촌락의 범위로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그보다 상급 단위인 정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거나 들린다 해도 정부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되기 쉽다.

그 예로 1978년 이전과 소련 공산주의 통치하에서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지방 관리들은 지방민과는 따로 떨어진 집에서 살았고, 다른 복장을 입었고 자신의 출신지 언어로만 말을 했으며, 종종 그 마을 사람 가운데서 지정된 한 명의 개인을 통해서만 마을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곤 했다. "농부들과 정부파견 지방 관리들 사이의 관계는 '뿌리 깊은 상호 경멸'이라는 말로 특징지을 수 있다."

현대화된 통신체계가 채 정비되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국가와 개별 부족 사회와의 간극이 무한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지형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의 지역은 험한 산맥과 사막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형태를 띤다. 국토의 75퍼센트가 산악지대이며, 그 중 7퍼센트만이 농업에 적합한 토지이다. 따라서 농사를 짓기보다는 목축하기에 적당한 산악지대 이다. 전 아프간 부족은 지리적 장벽이라고 할 수 있는 협곡에 갇혀 있으며, 각 종족에 대한 믿음은 협곡만큼이나 깊다. 아프가니스탄의 농부에게는 협곡이 그의 세계이며, 가뭄이 들지 않을 때 유일한 생계수단은 목축이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부족적 규범이다.

인종적 부족주의 문화는 산악지형과 깊은 계곡에 뿌리박은 목축경제와 목축문화를 생겨나게 했다. 아프가니스탄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약 23,000개의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촌락들은 전통적으로 자치 통치의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 주들은 자급 체제에 의해 유지된다. 그래서 몇 몇의 지역 지배세력과 수도인 카불은 각기 다르게 행진하는 듯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러한 지형적·생태적인 이유는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복잡한 정세와 경제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실마리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부족주의가 지속되는 것은 유목적 경제구조와 관련된다. 유목적 경제구조는 다시 부족주의를 생산하는 기반이 되며, 부족주의는 내분을 초래했고 지속적인 내분은 아프간인들이 국가적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 어려워 21세기에도 아프가니스탄이 근대국가 단계로 진입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아프가니스탄 국민이라는 더 큰 집단적 정체성에 흡수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이전에 이미 끊임없는 분쟁의 기원은 부족간의 갈등으로 기인했다.

결국 30년 간의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국제시장에서 교환할 것이라곤 손쉽게 수익을 올릴수 있는 마약밖에 남지 않았다. 세계에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생산물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은 국제사회에서 스스로 고립되어 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려는 근대화의 노력과 개혁도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이 났다.


다. 경제적 파탄으로 인한 마약 무역의 성행


가령 이란에서 출신 종족에 관계없이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것은 지난 세기 동안 이란의 경제구조를 바꾸어 놓은 원유 때문이었다. 농업국가였던 이란의 경제에 원유가 들어옴에 따라 경제구조가 바뀌고 이란의 국제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즉 천연자원을 수출하고 공업국가의 제품을 들여오게 되었다. 이란은 2000년 유가 상승으로 100억달러의 순이익을 남겼다. 국제경제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며 다른 나라의 공업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선택권을 가지고 근대적인 문화를 형성했고 현대적인 국가로 발전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무엇보다 사회경제적 구조를 변화시켰고 전통문화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형성하기도 했다.

장기적 내전으로 인해 별다른 수입원이 없는 아프간에 있어 유일한 수입원은 아편이다. “아편은 아프간의 석유로 불린다. UN 마약 및 범죄국 통계에 따르면 2000년 탈레반 통치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의 75%를 공급했고, 2007년에는 92%를 공급했다. 전 국민의 80%가 농부인 아프간 인들은 상당수가 아편을 재배하고 있다. 전세계 아편의 92%가 아프간에서 생산되고 있음을 보면 아편 재배가 보편화돼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프간 국민총생산(GN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편 농사는 탈레반 집권기에 금지됐다. 하지만 탈레반의 몰락 이후 아편밭은 다시 생겨났다. 이제 탈레반은 아프간 민중들의 일상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농부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아편 추수에 몰두하고 있다. 어제는 금기시했던 것도 오늘은 허용된다. 아편 재배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활동자금을 대고 있는 탈레반은 이제 이 문제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오히려 탈레반의 주요 자금줄이다. 그래서 2002년 11월에 미국과 북부동맹이 탈레반 정권을 축출한 뒤 오늘날까지 마약 생산은 늘어만 가고 있다. ‘아편은 내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교도)가 사용하는 것이므로 재배해도 괜찮다’는 명분을 펴서 아편재배를 묵인했다. UN의 2007년 8월 27일의 발표에 따르면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는 헬만드주 양귀비 재배가 2006년에 비해 45% 증가했다고 한다. 탈레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남부 헬만드 및 칸다하르에 소재한 아편공장에서 제조된 모르핀이나 헤로인은 아편보다 훨씬 비싼 값에 전 세계, 특히 미국 및 유럽 등 서방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미국은 이렇게 아편이 탈레반, 나아가 세계 테러 조직들의 돈줄로 이어지고 있다며 근절 정책을 펴고 있고, UN도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마약범죄단속부와 공조해 매년 봄 양귀비 수확에 맞춰 현지 경찰을 동원한 ‘양귀비밭 소탕작전(Drug Eradication)’을 벌인다. 그러나 양귀비밭 소탕작전을 벌이는 정부와 나토군에 대항해 RPG(휴대형로켓포)로 공격하기도 한다. 막대기로 양귀비 줄기를 내리치는 방식으로는 역부족이며 월급이 60달러(약 5만원)로 박봉인 경찰은 양귀비 재배를 묵인하면서 뇌물을 받는다. 탈레반 세력은 마약소탕작전을 펴는 정부군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해줌으로써 민심을 얻고. 파키스탄 접경지역인 낭가하르, 쿠나르, 누리스탄 3개 주를 접수하고 이곳에서 활동하는 마약밀매 세력을 비호하고 커미션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농부는15~20평의 밭에서 한 번에 양귀비 6㎏을 거둔다고 했다. 양귀비 1㎏이면 3200아프가니이고, 이것은 64달러에 해당한다. 총 수익은 384달러(약35만원)에 불과 하나이의 3배 큰 밭에서는 1000달러 이상의 소득이 가능하다. 낭가하르주의 양귀비 밭은 4000헥타르를 상회한다. 한 달에 100달러 미만의 수익으로 살아가는 농부들로서는 큰 수입원이 되기 때문에 밀이나 감자 등 다른 합법적 작물보다 양귀비 재배가 10배 이상의 수익률을 낼 수 있다. 따라서 아편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이렇게 생산된 아편은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게 가정상비약 및 만병통치약 역할을 한다. 양귀비 열매의 즙에서 나온 갈색의 아편 덩어리는 재래시장에 어디에 가도 쉽게 살 수 있다. 지방은 1그램에 약 1달러이고, 카불은 약 4달러에 아편을 구할 수 있다.

부모들은 콩알 크기만한 아편 덩어리를 아이들의 소화불량이나 두통에 물이나 분유에 섞어 먹여, 아이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편에 중독된다. 산모도 고통을 참으려고 아편을 먹는 경우가 있어, 중독이 된 산모로부터 태어난 아이는 생후 곧 사망하곤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인구 3000만 명중 92만 명이 마약중독자로 알려져 있다. 78%가 남자, 15%가 여자, 7%가 어린이라고 한다. 북부 바닥샨주의 ‘이슈카심’ 지역의 한 마을은 주민 전부가 아편을 복용해 중독자가 됐다. 카불 시내의 후미진 곳에서는 새벽녘부터 아편중독자들이 쭈그린 채 헤로인을 흡입하거나 주사를 맞는다. 또한 남이 버린 것을 주사기를 쓰는 경우가 많아, 마약중독을 넘어 에이즈(AIDS)를 확산시키고 있다. 카불의 마약중독자 재활센터인‘네잣센터’의 압둘 파타 하미디는 “탈레반 시절인 2001년에 4만5000명이던 마약중독자가 2007년은 6만명으로 늘었다”며 “HIV 양성환자는 58명이며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도 5명”이라고 말했다. 오랜 내전과 탈레반 통치로 인한 피폐한 경제와 교육의 부재가 마약을 시장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게 하는 상황이 마약중독 현상을 악화시키고 있다


라. 아프가니스탄 난민 문제


소련 침공 후 발생하기 시작한 아프간 난민은 탈레반 시절을 거치면서 700만으로 불어났다.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에서 팔레스타인 다음으로 많은 난민수와 실향민(IDPs)를 가진 나라다. UN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이 발표한 '2006년 세계 난민 동향'에 따르면 아프간 난민은 210만 여 명으로 72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팔레스타인(430만 명)에 이어 두 번째로서, 전 세계 난민인구 23%를 차지하고 있다. 또 파키스탄에 108만 명, 이란에 92만 명 등 대부분의 난민들은 아프간 접경국의 국경지대에서 캠프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2002년부터 난민고등판무관(UNHCR)이 이들의 지속적인 본국 송환을 도와서 많은 아프간 난민들이 이웃나라 이란과 파키스탄으로부터 아프간으로 들어오고 있다. 2005년 통계에 의하면 한 해 동안 290만의 인구가 돌아왔다. 그러나 이렇게 본국으로 들어온 난민들은 식량과 주거의 문제로 카불 등과 같은 대도시로 집중되고 있어 새로운 빈곤 문제를 가중시키고 있으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집과 땅이 없어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워 갈 수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아프간 정부는 난민들이 탈레반과 같은 파쉬툰족이 많은데다 빈민층이어서 탈레반과 연계될 가능성이 높다며 귀국을 반기지 않는다. 반면에 또한 파키스탄은 2007년 2월에 난민 캠프가 탈레반의 근거지로 활용되고 있다며 2009년까지 모두 돌려보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아프간 민초들은 이래저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있다.


마. 탈레반의 발생과 네오 탈레반의 부상


1) 탈레반의 등장

소련 공산주의가 침공했을 당시 미국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공산주의의 확산이라는 차원에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고, 특히 아프간 주변지역 남아시아 정치의 안정을 크게 해치는 것으로 판단했다. 미국은 본질적으로 반공산주의적인 이슬람이 정치화할 경우 점차적으로 양극화되고 있는 냉전 세계에서 모스크바에 대항할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간주했다. 이에 미국은 적극적으로 파키스탄을 지원했고 이에 안보적 위협을 느낀 인도는 파키스탄과 더욱 심한 군비 경쟁에 들어가면서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남아시아가 1980년대 들어 큰 긴장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때에 파키스탄의 난민들 사이에서 고아출신의 파쉬툰족울 중심으로 탈레반이 성장하게 되었다.

탈레반(Taliban)은 현대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성격의 권력이다. 1994년 칸다하르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신학생 출신 게릴라 집단 정도의 미미한 권력이었던 것이 2년 만에 24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최고 권력으로 등극한 것이나, 집권 후 권력을 행사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여러 면에서 중세 사회에서나 있음직한 극단적 정책을 사용해 전 세계의 지탄을 받은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의 인도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초토화되어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탈레반은 쫓겨난 후에도 아프간 남부의 칸다하르(Qandahar)를 중심으로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행사하면서 새로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20세기 초 영국과 러시아의 제국주의의 팽창에 대해 완충국가로서의 역할을 했던 아프가니스탄은 뒤를 이어 미국과 소련의 이념대립의 완충국으로서의 상호 견제와 협력의 관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제국주의와 이념의 대립에 대해서 완충국이라는 설정은 끊임없는 외세의 간섭을 일으켰고, 이러한 과정에서 부족지도자들은 외세와 결탁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워갔다. 그리고 소련이 물러가면서 아프가니스탄은 결국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소련전쟁 전의 아프간인들은 목축인들 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협곡을 지키기 위해서 무자헤딘이 되었으나 소련이 퇴각한 후에도 목축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조직된 여러 부대는 분파들과 세력들의 개인적 충성심에 바탕을 두고 싸웠고 인접 6개국과 미국과 러시아가 각자 무장집단 중에서 용병을 채용했다. 새로 등장한 생존의 이 직업이 그럴듯하고 경제적으로도 매력적이다보니 새로운 고용이 창출되었다. 그러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고 이때 사상자가 소련 침공 때보다 많았다.

이 종족간의 내전으로 국가는 더욱 분열되었으며 국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탈레반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였다. 탈레반은 이슬람의 두 강대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이 지구상의 초강대국 미국과 연계해 제작한 작품이며 정치적으로는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위성 정부였다. 그들 개인적으로는 파키스탄의 무자헤딘을 길러내는 학교에서 훈련받은 굶주린 난민 출신의 청년들이었지만, 처음에는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학교에 들어가 나중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입지를 확보하며 졸업했다. 농촌 지역과 파키스탄 국경의 난민 캠프에서 징집되었던 굶주린 젊은 청년들에게는 종교적인 거룩한 명분이 생존의 힘이었기에 자발적인 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탈레반의 이데올로기의 근거는 데오반디즘(Deobandism)이다. 데오반디즘은 하나피학파의 분파로서 아프가니스탄에도 역사적으로는 존재했으나, 그 교리에 대한 탈레반의 해석은 무슬림세계에서는 그 유래가 없는 독특한 방식이다. 20세기 초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국가가 운영하는 현대적인 마드라사를 건설하기 위해서 데오반드파와의 협력을 시도했다. 그래서 1933년 데오반드파 울라마는 카불을 방문하여 당시 아프간 국왕인 자히르 샤와 이 문제를 논의하고 본격적으로 데오반드파 마드라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 마드라사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데오반드파 마드라사는 1947년 처음 창립된 이후 매우 빠르게 발전했다. 데오반드파는 JUI(Jamait-I Ulama-i Islam)라는 순수한 종교적 운동단체로 설립되었으나 1962년 NWFP(North West Frontier Provice)의 지도자에 의해서 정당으로 전환되었다.

JUI는 NWFP의 파쉬툰족 지대에 수백 개의 마드라사를 세웠고, 이곳에서 파키스탄의 젊은이들과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에게 무료 교육과 음식, 피난처와 군사훈련을 제공했다. 1988년 파키스탄에는 8,000개에 달하는 마드라사(등록되지 않는 것만도 25,000)가 있었으며 이곳에서 50만 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파키스탄의 교육체계가 점차 붕괴됨에 따라 이러한 마드라사는 교육 혜택을 받고자하는 가난한 소년들의 더욱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 마드라사의 대부분이 시골 지역이나 아프가니스탄 난민촌 지역에 있었고 원래의 데오반드파 학교의 개혁주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율법학자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또한 그들은 파쉬툰족의 종족 규범인 파쉬툰 왈리를 토대로 이슬람법을 재해석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탈레반은 데오반드파를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데오반드의 교육과 개혁의 전통을 왜곡했다. 그들은 의심이라는 개념을 죄라고만 받아들이며 논쟁은 이단으로 간주했다. 순수한 이슬람혁명을 위한 탈레반의 모델은 서방과 대화의 무조건적인 거부로 나타났고 심지어 무슬림세계와의 화해도 반대한다. 결국 탈레반은 자신의 정치체제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세력과도 대화를 거부하는 이슬람극단주의 운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탈레반의 처음 주장은 아프가니스탄의 해방과 이슬람혁명을 수립하기 위해 봉기했다고 주장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법과 질서를 회복시키고 나면 모든 권력을 새로 구성된 정부에게 이양할 것이라고 선언했으나 미국에 의해서 무너지기 전까지 종교 독재정치를 했을 뿐이었다. 1996년 이후 다른 종족 그룹들의 참여를 배제한 채 파쉬툰족을 중심으로 한 탈레반만이 유일한 대표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탈레반이 아프간 권력 최상층에 급부상할 수 있었던 요인은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 무자헤딘 지도부가 보여준 타락과 무능력 때문이었다. 아프간 인들은 무자헤딘 지도부에 대해 총체적으로 불신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오랜 내전으로 인한 전통적 부족지도부 조차 사실상 소멸되었고 신뢰할 만한 사회지도 층이 궤멸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이슬람부흥운동을 주장하는 탈레반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별다른 정치적 저항 없이 보다 부족적이면서 민중적인 조직을 건설할 수 있었다.

유리한 환경을 활용하여 탈레반은 칸다하르 출신을 중심으로 관리되는 비밀사회를 만들었다. 결국 탈레반 출현이라는 역사적 현상은 두 냉전세력의 대립구도라는 강요된 외부정세와 내부적인 무정부 상태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생겨난 종교독재적인 극단적인 해결책이었다.

2) 네오 탈레반의 부상

탈레반의 지역사령관인 무하마드 사비르는 턱수염을 기르고 갈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터번을 썼으며 어깨에는 베이지 색 숄을 두른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AK소총과 로켓추진 발사기(RPG)로 무장한 전사들을 사열했다. “1년 전에는 대낮에 이렇게 모일 형편이 안됐다.”고 사비르는 말했다. 40대 중반인 그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반미 성전운동을 벌일 각오다. “이제는 훤한 대낮에도 모인다. 사람들은 우리(탈레반)가 권력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고 말했다.

2001년 패퇴한 이후 사라졌다고 믿었던 탈레반은 남부 4개 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일정 정도 유지하여 오고 있다. 남부지역의 파쉬툰 족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 지역의 파키스탄의 소수민족 거주지에서 재결집하여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네오 탈레반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카르자이 중앙정부의 권력공백 및 정부의 무능과 혼란에 불만을 품고 생겨났다. 카르자이 정부는 도시를 떠나면, 특히 남쪽으로 가즈니와 다른 여섯개의 주 그리고 다른 분쟁지역에서는 거의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래서 카르자이 정부, NATO, 미국정부, 국제사회가 한결같이 경제성장과 안정을 약속했음에도 제대로 되지 않는 데 크게 실망한 주민들도 이들을 지원한다.

부활하는 네오 탈레반들은 반미성전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성전 지휘관으로서 일단 아프가니스탄과 국경 근처의 파티스탄에 들어온 뒤 고국에 남아 있던 동조세력의 힘을 빌려 수백명의 새 전사들을 양성했는데 상당수는 돈을 주고 뽑았다. 연령대도 다양하여 이들 가운데는 10대 청소년도 있고 55세의 중년들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새로운 탈레반의 움직임이 기존 탈레반 정권에서 나타난 극단적 형태의 데오반디즘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 전통주의 노선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재부상하는 탈레반에서는 기존 전통주의 노선의 엄격한 코란 해석에서 벗어나는 사례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는 더욱 폭력적이고, 일부는 유연한 양상을 나타내는 등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기되고 있다. 이러한 탈레반의 양상을 총칭하여 ‘네오 탈레반’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최근 탈레반 내에도 이슬람 샤리아에 대한 유연한 해석이 일부 감지되고 있으며, 기존의 물라 오마르가 이끌던 호전적 과격투쟁 노선을 견지하는 세력과, 소수이지만 개혁적 사고를 강조하는 세력이 함께 공존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류이며 강성 기조 노선을 추구하는 오마르를 대리해 온 물라 다둘라의 호전적 투쟁 노선은 2005년 이후 납치, 자살테러, 급조폭발물테러 등의 형식으로 구체화되었으며, 반면 온건 노선은 기존 탈레반 정권 당시의 문제점을 인식, 일정 부분 카르자이 정부 및 타지크 군벌들과 협조해야 탈레반의 세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으나 강경파에 비해 뚜렷하게 열세로 나타난다.

2005년 이후 탈레반 조직 재정비와 맞물려 알 카에다의 투쟁 노선을 도입한 다둘라는 기존 탈레반 투쟁 전술을 전면 수정하고 탈레반 창시자 오마르를 잇는 강경 지도자 반열에 오르게 된다. 알카에다의 2인자 아이만 알 자와히리 및 이라크 알 카에다 지도자였던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 등이 ‘탁피리스트’ 노선을 받아들였고, 이를 물라 다둘라가 계승하면서 탈레반의 폭력투쟁이 격화되게 되었다.

*탁피리스트 노선*

이슬람 근본주의의 이론적 근거인 와하비즘은 비록 강경한 노선을 견지하고 있으며 과격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슬람 가이드라인에 의한 투쟁을 추구하는 반면, ‘탁피리즘’은 반 이슬람 행태에 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투쟁 노선을 주장하고 있다. 즉 이슬람의 이념에서 일탈하는 모든 세력과 원인자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고 단호한 응징을 통하여 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해야한다는 주장이다. 탁피리스트 노선을 채택하면서 2005년부터 탈레반의 전술은 알카에다의 전술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자살 테러단을 도입하여 현재 500명 이상의 자살테러자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5월 나토군과 아프간군의 합동작전에 의해 다둘라가 사살됨에 따라 강경 투쟁 노선을 이끌어갈 지도자의 공백상태가 지속되었고, 이에 따라 온건파 탈레반의 입지가 조금씩 강화되면서 탁피리즘에 반대하고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온건파 네오 탈레반은 파쉬툰족에만 한정된 아프간 통일노선을 탈피해 타직, 우즈벡들과 공존할 수 있는 구조에 대한 가능성, 즉 남북 양자구도를 인정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다둘라의 죽음 이후 동생인 만수르 다둘라의 세력획득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파쉬툰 지하디스트의 강경 노선이 강화되고 있다는 설도 있으나 현재까지는 강온 양면 혼재 국면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양상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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