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과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

 

나삼진 목사(오렌지카운티 샬롬교회 목사, 행복한 교육목회연구소 소장)
나삼진 목사(오렌지카운티 샬롬교회 목사, 행복한 교육목회연구소 소장)

2. 손양원과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

고신교회는 한상동, 주남선 등의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이로 인해 투옥된 것을 그 뿌리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시원은 1946920일 고려신학교 설립에서 시작된다. 손양원은 한상동, 주남선 등과 함께 고려신학교 기성회에 참여해 신학교 설립에 동역기 시작했다. 허순길은 손양원이 박윤선 목사의 교장 취임식과 함께 고려신학교의 총무로 봉사를 시작했다고 했다.22) 남영환은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을 하고 있는데, “손양원 목사가 남장로교회가 경영하는 여수 애양원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순천노회와 선교사의 유혹과 압력을 받으면서도 고신운동에 앞장선 것은 자신의 힘도 있었지만, 애양원교회가 손목사의 신앙에 절대순종했던 데도 가능했다고 했다.24) 이상규는 그러한 손양원에게 고려신학교 총무라는 직을 부여했으나 총무라는 이름에 합당한 일을 한 일이 없으며, “손양원 목사가 고려신학교를 위해 많은 봉사를 해 왔다는 허순길 교수의 언급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인 표현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손양원은 고신교회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았는가?

 

1) 손양원과 고려신학교 동역

먼저, 손양원은 고려신학교 설립기성회로 참여했고, 2년 후에는 고려신학교 총무로 수고했다. 그가 한상동과 주남선과 같이 옥중에서 신학교육을 꿈꾸지는 않았지만, 한국교회의 쇄신을 위해 지도자의 중요성을 잘 알아, 고려신학교 설립에 함께 했다.

설립자들은 고신의 모든 재정을 지출하면서까지 송상석을 통해 박형룡을 귀국시켰지만, 그는 4대 장로교회 선교부의 지원으로 신학교육을 하기 위해 한 학기 만에 서울로 떠났다. 이에 박윤선의 2대 교장으로 취임과 때를 같이하여 고려신학교 총무로 취임하였다. 이는 그가 고신을 지지하고 있었고, 부흥회를 전국적으로 인도하여 명성이 있었던 데다가, 두 아들이 순교한 후 원수를 용서하고 아들로 삼았던 후라 집회 초청이 급증하였다. 고신은 기성회원이었던 그를 총무로 모셨는데, 목회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한 봉사였다. 심군식은 손양원의 전기에서 손 목사는 부흥회 인도 외에도 자주 부산에 내려갔다. 부산에서 시작된 고려신학교 총무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출옥성도 주남선, 한상동 목사들과 함께 고려신학교 육성을 위해 손 목사는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라 기술한다.25) 한상동과 주남선의 전기를 쓴 작가로서 고신 초기의 역사를 해박했던 심군식이 두 설립자의 자료를 오랫동안 수집하며 그들과 오랫동안 대화했던 그의 기록을 가볍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오병세는 필자와의 대화에서 그 총무의 역할을 이사회의 총무로 실무 책임을 지고, 신학교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홍보대사와 같은 역할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손양원은 고려신학교의 정기간행물 파수군에 여러 차례 설교를 기고하며 고려신학교를 지지하고 협력했다. 그는 순교이전 파수군에 모두 네 편의 설교를 실었고, 순교 후에도 발국, 개제한 설교가 네 편 더 나타난다. 그 무렵 파수군의 편집인 안용준 교수가 손양원의 설교와 서신을 발굴하고 알리는 데 앞장섰는데, 존경받았던 그의 설교는 목회자들에게 그만큼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손양원이 순교한 후 안용준은 그의 설교 신앙과 생활을 시로 쓰기도 했다.26) 그가 수집한 손양원의 재판기록과 일기와 편지가 엮어져 2부작 사랑의 원자탄이 출간되었다. 파수군에 게재된 손양원의 설교는 다음과 같다.

1_ 파수군에 게재된 손양원의 설교

번호

제목

게제 호수

내용

1

성경대로 살자(1)

4, 7-11

 

2

성경대로 살자(2)

5, 7-9

 

3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

6, 31-34

주기철 순교기념예배 설교

4

한국에 미친 화벌의 원인

10, 6-12

 

5

구주의 성탄을 맞이하는 나의 감사

58, 25-27

 

6

나의 감사

68, 22-25

 

7

부활 주님의 5대 특은

73, 15-22

 

8

설교초: 추수의 감사

123, 15-17

 

 

2) 손양원과 고려신학교 재정적 후원

고려신학교가 설립된 후 손양원은 애양원교회 성도들과 함께 재정적인 협력을 했다. 고려신학교 초기 헌금자 방명록에는 손양원과 애양원교회 성도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 명단은 김태권(500), 보육원 선생(400), 차종석(2,000), 송재국(1200), 서인순(1,200), 강두례(1,200), (1,000), 김철연(400), 박봉이(100), 박상준(500), 이은재(300), 이끗순(300)등이었고,27) 김진수(500), 안인라(1,000), 김윤심(1,000), 정명남(700) 등은 일시금이었던 것으로 보아 작정헌금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28) 또 그는 개인적으로 1949111일자로 3,000원을 헌금하였고, 77일에는 강두례(1,000), 차종석(2,000) 두 사람도 헌금했는데,29) 손양원이 고려신학교 총무로서 한 일이 아무 것도 없거나, 그 수행이 제한적이고 정신적인 후원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30) 손양원은 고려신학교 설립 기성회원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였고, 그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지지한 것을 본받아 애양원교회 성도들과 병원의 직원까지 고려신학교를 위한 헌금에 동참했던 것이다.

 

3) 손양원과 한국교회 쇄신운동 변증

손양원은 고려신학교와 총회가 갈등하고 있을 때, 고려신학교 일원으로서 고신당국자들의 선서문발표에 참여했다. 19499월에 발표된 이 문서는 호소와 공약선언: 대한예수교장노회 총회와 각 노회와 성도들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문서에 포함되어 있는데,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한명동, 손양원, 송상석 등 고려신학교의 핵심인물 여섯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된 글이다. 해방 후 첫 경남노회에서 출옥성도 주남선을 노회장에 선출하고 이어 고려신학교를 인가하는 등 교회 쇄신을 도모했으나, 친일세력들에 의해 이듬해 뒤집어지고 말았다. 이에 교회와 평신도들이 강력히 항의하고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면서, 김길창 등 친일교권주의자들이 경남노회를 분리시켰다. 총회전권위원회는 노회를 분리해 나간 이들을 책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경남노회가 고신을 중심하여 이교파를 수립한다라는 억설과 중상적 허위선전을 시작되면서,31) 52회 노회 결의로 문서를 발표하기로 하였다.32) 이 문서에서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가 이교파 수립을 계획한 일이 없음을 일곱 가지로 선언하고, “총회파에서 고려신학을 잘라 내친다 해도 우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을 준수하고 나갈 것이며, 고신책임자들은 전권위원이나 상회의 잘못을 항의하는 것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33)

이 문서가 나온 것은 제35회 총회(1949. 4. 23, 새문안교회)에서 경남노회 문제 처리를 위한 전권위원회를 파송하였고, 전권위원들은 총회가 부여하지 않은 권한으로 1949621일 각각 극소수가 참여하여 경남노회를 경남노회, 경서노회, 경중노회로 분할하고 그 결과를 통지하면서 이교파와 이교파 지지자들의 모략과 선전에 속지 마시오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당시 총회전권위원들은 총회와 갈등하는 경남노회를 분할해 쉬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경남노회의 대표성을 갖고 총회 지도부와 관계가 깊은 김길창 목사 일파가 3월에 노회를 분리하여 이탈해 나간 시점이었다. 경남노회로서는 총회전권위원회가 교권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그 권한을 남용하여 경남노회로서는 그 처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고, 반대파에서는 이교파 수립이라는 소문을 내기 시작, 전권위원회가 이를 공개적으로 공시하는 단계가 된 것이다. 이후 고신총로회가 조직된 1952년까지 3년 이상 경남노회가 총회의 외면과 박해가운데서 총회에 항의하고 투쟁하면서 고신이 이교파 수립을 목표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 고려신학교 총무로서 손양원도 동참했던 것이다.

이렇게 손양원은 고신교회 설립자들과 오랫동안 동역했고, 신앙적인 깊은 유대감을 가졌으며, 고려신학교 설립과 육성에 함께 동역하였다. 총회와 경남노회간의 갈등으로 이와 유사한 형태의 성명서가 고신이 총회에서 단절되기까지 몇 차례 더 나왔지만, 손양원이 순교한 후라 함께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순교하지 않았다면 고신의 입장과 함께 했을 것이고, 1951년 고신이 총회로부터 단절되고, 1952년 총로회가 발회될 때 그가 고신교회에 동참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것은 손양원의 순교 후 총회측에 속한 애양원교회를 떠나 고신을 지지하는 성광교회를 개척하여 고신에 머문 정양순의 한결같은 입장이나, 막내딸 손동연도 애양원교회와 손양원 삼부자의 묘소를 통합측 역사유적으로 독점하는 것을 불편하게 보고 있는 것은 그같은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양원은 교파에 치우쳐 사역하지 않았다.34)

 

4) 손양원과 고신교회와 두 아들의 순교

손양원은 고신교회의 설립자들과 깊은 유대와 교류가 있었다. 이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피의자 심문조서에 의하면 증인 이모, 금모씨의 심문조서에서 그들은 손양원이 주장하는 교리는 당시 부산에서 최상림, 한상동, 주남서, 윤술용 등의 주장하는 교리론과 동알한 신앙심이라 대답하고 있다.35)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같은 신앙과 같은 경건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평소 고려신학교와 그와 함께 하는 교회나 성도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사역했다. 부산지방 청년신앙운동에서 1949년에 한부선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청년신앙운동에 참여하였던 미군 병사가 헌금한 100달러로 요한복음 소책자를 가지고 시내 5만호에 축호전도를 하였고, 마지막에는 손양원을 강사로 부흥전도집회를 가졌다.36) 이같은 일은 이듬해에도 있었다. 손양원은 그의 일기에서 그 집회에 대해 4만호에 복음을 전하고, 500여 명의 결신이 있었으며, 3천 명이 전체집회에 회집하는 역사가 있었다고 적고, 이를 아내와 애양원교회 교우의 기도와 부산고려신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의 기도의 열매로만 믿고 나는 더욱 신께 감사드렸다.”37)

그리고, 여수순천사건으로 그의 두 아들이 19481021일에 순교했을 때, 애양원교회는 이인재를 강사로 부흥회중이었다. 이인재는 해방 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다니던 신학생으로서 평양과 경남을 왕래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경남의 한상동과 평안도의 주기철과 이기선을 연결했던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인재는 동인과 동신의 장례식을 집례하고 설교하였다. 이인재는 두 아들을 잃고 상심하였던 정양순을 위로하여 회복하게 했고, 상심한 손양원에게는 순교를 갈망했던 자신들 대신 순교한 두 아들의 순교자의 영광을 언급하며 그의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38)

 

5) 마지막 가던 길과 순교의 기림

손양원의 장례식은 고려신학교에서 주관했는데, 이는 손양원이 생애 마지막까지 고신교회와 어떤 관계를 가졌던가를 잘 보여준다. 손양원 목사 순교 후 장례식은 보름만인 1013일에 엄수되었다. 장례식이 이렇게 늦었던 것은 여수 지역의 치안 문제와 함께 고려신학교 인사들이 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손양원의 순교 후 소식이 고려신학교에 알려졌고, 장례 일정이 1013일로 정해짐에 따라 박윤선과 오종덕, 학생과 여성도등 30여 명이 함께 1010일 부산 부두에서 여수로 향하였다. 이들은 여수 부두에 내려 미평까지 30리 거리를 손양원의 순교자의 길을 생각하며 걸어서 갔다.39)

손양원의 장례식은 노회 대표가 아니라 고려고등성경학교장 오종덕이 사회를 보고 박윤선이 순교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으며, 애양원 성가대와 고려신학교 학생들이 각각 특별찬송을 불렀으며, 애양원 대표, 노회 대표, 기독신문사 대표가 조사를 하였다.40) 목사가 별세하면 노회가 장례식을 주관하는 것이 통상의 관례이고, 또 손양원과 나덕환이 절친한 관계였지만, 손양원 장례식은 노회 관계자나 나덕환이 아니라 고려신학교 인사들이 장례식을 집례한 것이었다.

나아가, 손동인과 동신이 순교했을 때나, 손양원이 순교한 후 그들을 기리고 이념화하는 작업은 고신교회에서 이루어졌다. 애양원교회 집회를 인도하면서 동인, 동신의 순교를 보고 장례식을 집례했던 이인재는 학창에 매친 십자가의 두 열매파수군창간호에 기고하여 전국교회에 알렸다.41) 또 고려신학교가 중심이 되어 동인,동신을 기념하는 인신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그들의 순교를 기렸다. 고신교회의 기관지 파수군10호에서는 손양원의 순교 1주년을 맞이하여 표지에 그의 사진을 싣고, 순교 직전에 남긴 미발표 설교 한국에 미친 화벌의 원인을 특집으로 준비했고, ‘손양원 목사 입옥시문을 함께 실었다.42) 이후 계속하여 손양원의 옥중서신을 비롯하여 다양한 글을 개제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였다. 안용준은 손양원 목사의 옥중편지나 심문조서를 정리하여 파수군에 발표하였고, 이를 엮어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그의 전기를 펴냈다. 파수군에 개제된 손양원 관계 기록은 다음과 같다.

_2 파수군에 게재된 손양원 목사 관련 기록

번호

제목

게제지

비고

1

그의 신앙과 생활

7, 20-22

 

1

흘러간 옛 꿈

8, 22-27

 

2

흘러간 옛 꿈 (2)

9, 28-31

 

3

손 목사님의 입옥 시문

10, 20-25

 

4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13, 27-38

 

5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2)

14, 16-22

 

6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3)

17, 22-28

 

7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4)

19, 23-31

 

8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5)

20, 17-27

 

9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6)

21, 27-35

 

10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 (7)

22, 21-29

 

11

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1)

64, 66-75

 

12

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2)

65, 54-68

 

13

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3)

67, 56-66

 

14

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4)

68, 60-68

 

15

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5-2)

74, 59-68

 

16

고 손양원 목사 체형조서(7)

75, 65-

 

 

6) 순교 후 남은 가족들

손양원이 순교한 후 총회측에 속한 부목사가 애양원교회의 담임이 되면서 남장로교 선교부의 영향을 받는 교회는 손양원과 신앙적인 입장을 달리했다. 그리하여 정양순은 손양원과 고려파 신앙을 잇기 위해 1952년 이후 성암교회가 설립되었다.43) 그로 인해 교회에서 나오던 생활비까지 끊어지게 되었고, 자녀들은 교육과 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처절하게 생존해야 했다. 정양순은 성암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한상동의 소개장을 가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모금에 나섰으며, 3년만에 교회당이 건축될 수 있었고, 그때 정양순으로부터 훈련받은 이들이 다수가 목회자가 되어 교회를 잘 섬기도 있다.44)

손양원이 순교한 후 유족들의 삶은 힘겹고 고달팠다. 자녀들이 다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교육문제가 당면과제였다. 안용준이 중심이 되어 대한기독교순교자유가족원호회를 조직하여 순교자 유가족을 돕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고신교회가 중심이 되어 시작했기 때문에 총회파의 협력을 받는 것이 어려웠다.45) 당시의 교회들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기념사업으로 나오는 헌금이 조금씩 전달되었지만, 생활비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46) 다행히 손동희는 음악선교사 마두원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울 수 잇었고, 한명동의 소개로 부산남교회 성도 가정에서 피아노 교습을 하면서 생활하였으며, 명향식이 피아노를 마련해 주어 세 자매는 밤낮으로 연습해 피아니스트로 성장할 수 있었다.47) 손동연은 경희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손동희는 당시 총신을 다니다가 고신으로 옮겨와 3년을 공부하고 교단적인 갈등 가운데서 학부를 마치지 못했는데, 고신대학교 개교 50주년 때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손동희의 아들 박유신은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손양원의 신앙유산을 잇고 있다.(계속)


미주

22) 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1996. 87.

23) 남영환, 한국교회와 교단: 고신교단사를 중심으로, 서울: 소망사, 1988. 352.

24) 이상규,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서울: 생명의 양식, 2016. 334-335.

25) 심군식,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생애, 서울: 영문. 1994, 32.

26) 안용준은 손양원이 남긴 수필을 시체로 만들었다. 파수군19507월호, 21.

27) 고려신학교 설립 찬조원 방명록. 부산: 고려신학교, 1946.

28) 서인순과 강두례는 1948년에 각각 1,000원을 헌금한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고려신학교 회계록(1946-1948)에는 강두례(1,000), 차종석(2,000)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강두례는 최소 33,200, 차종석은 최소 24,000원을 헌금하였다.

29) 이상규, “손양원 목사와 고려신학교”,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335.

30) 이상규는 1946년 개교 초기의 자료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상규,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334, 335.

31) “호소와 공약선언: 대한예수교장노회 총회와 각 성도들에게 드리는 말씀”, 1949. 9.

32) 경남노회 제52회 촬요(1949. 9.).

33) 고신당국자들의 선서문2, 1949. 9.

34) 안용준, 앞의 책, 544.

35) 안용준, 앞의 책, 541.

36) 학생신앙운동 20년사. 18-19. 이상규, 나삼진외,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 학생신앙운동사, 서울: SFC, 2013.

37) 손양원의 194963일 일기. 안용준, 앞의 책, 364.

38) 손동희, 앞의 책, 237-238.

39) 심군식, 앞의 책. 109.

40) 손동희, 앞의 책, 330. 심군식, 앞의 책, 108.

41) 이인재, “학창에 매친 십자가의 두 열매”, 파수군창간호(194812), 27-32.

42) 파수군10(195110월호), 6-12, 20-25.

43) 신풍교회 홈페이지, “교회 역사”, http://pkist.net/s/; 손동희, 앞의 책, 338-339.

44) 손동연, 결국엔 사랑, 서울: 헤럴드북스, 2018. 176, 188.

45) 안용준, 앞의 책, 550.

46) 손동희, 앞의 책. 338.

47) 손동희, 앞의 책, 339-340

 

참고문헌

 

손양원,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손양원, 서울: KIATS, 2009.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기 기념 좌담회, 기독교보, 2020. 5. 30.

경남노회 제27회 정기노회 촬요”, 1945. 12.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촬요(26-65),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연대 미상.

고려신학교 설립 찬조원 방명록, 부산: 고려신학교, 1946.

김승태, “손양원의 초기 목회 활동과 신사참배 거부항쟁”, 한국기독교와 역사34, 2011.

남영환, 한국교회와 교단: 고신교단사를 중심으로, 서울: 소망사, 1988.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회 기념 화보, 우리 교단의 어제와 오늘, 1971.

문성모, “손양원 목사의 설교”, 한국교회 설교자 33인에게서 배우는 설교, 서울: 두란노, 2012.

박혜련, 목사의 딸, 서울: 아가페북스, 2014.

손동연, 결국엔 사랑, 서울; 헤럴드북스, 2018.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서울; 아가페, 1996.

심군식, 박윤선 목사의 생애, 서울: 영문, 1996.

심군식,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생애, 서울: 영문, 1994.

안용준, 사랑의 원자탄(11), 서울: 신망애사, 1977.

이근삼, 개혁주의 신학과 한국교회, 서울: 생명의 양식, 2007.

이근삼, 기독교와 신도국가주의와의 대결, 서울: 생명의 양식, 2008.

이상규, “해방 후 손양원의 생애와 활동”, 해방전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5.

이상규, “손양원 목사와 고려신학교”, 교회쇄신운동과 고신교회의 형성, 서울: 생명의 양식, 2016.

이상규, 나삼진 외,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 학생신앙운동사, 서울: SFC, 2013.

이인재, “학창에 맺힌 십자가의 두 열매”, 파수군194812월호.

이현찬, 칠원교회 100년사, 함안: 대한예수교장로회 칠원교회, 2009.

정성구, “손양원 목사의 설교”, 한국교회 설교사, 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1986.

차종순, 애양원과 사랑의 성자 손양원, 서울: 키아츠, 2008.

최병택, “손양원과 구라선교: 애양원교회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34, 2011.

한부선, “찬사”, 총회 20회 기념화보: 우리 교단의 어제와 오늘, 1971.

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1996.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1996.

www.agoragen.com/?p=5993(2020117일 출력)

www.pkist.net/s/(신풍교회 홈페이지)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