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 교수(여화여대 종교학 석좌교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아래 원고는 10월 16일 연세대 공학원 대강당에서  한목협 주최 제12차 열린대화마당에서 정진홍 교수(여화여대 종교학 석좌교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가 강연한 <다원사회 속의 기독교> 발제문 전문이다. 다원화 사회 속에서 한국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다.  

 

▲ 정진홍 교수     © 뉴스파워

1.‘다원(多元)’이란 사물의 근원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다양(多樣)’함과 같지 않습니다. 다양함이 하나의 뿌리에서 뻗은 많은 가지들을 일컫는다면 다원이란 각기 다른 뿌리를 가진 여러 나무들이 더불어 서있는 모습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다원사회라고 말합니다. 문화도 다르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우리의 의식(意識)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바야흐로 ‘다원성’은 현대를 묘사하는 지표(指標)가 되었습니다.

까닭은 분명합니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인류의 삶의 자취를 되살펴보면 그 변화가 보입니다.

비록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이른바 ‘문화권의 단절’이라고 기술할 수 있는 그러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일정한 지역적 특성이 인류의 삶을 울 지어 두드러지게 채색했기 때문입니다. 그 특성을 이루는 요소들로는 지리-생태적 조건이 필수적입니다. 이와 아울러 경험과 이에 대한 기억의 전승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조건들은 서로 상이성을 지닌 채 다른 개체의 문화를 이루면서 그 문화 간에 ‘더불어 만나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빚지 못했습니다. 거듭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묘사라는 말을 첨가하고 싶습니다만, 그러한 정황 속에서는 각개 문화와 그 속에 있는 인간의 경험은 자신을 서술하고 설명하는데서 머무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이른바 ‘타자’를 의식하지 않는 인식의 논리를 펼 수 있었습니다. ‘자족적(自足的)’이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은 하나로부터 말미암았고, 그렇게 하나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좋았습니다. 이를 우리는 ‘단원현상’이라고 지칭할 수 있고,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식을 ‘단원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그러한 현상을 ‘아는’ 것을 ‘단원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단원의 경험’에 바탕을 둔 자신의 언어를 발언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쩌면 우리의 지금과 비교해볼 때,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소박하게 사물을 승인하고 기리고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뀝니다. 왜 그런지 바뀜의 까닭을 살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앞에서 ‘문화권의 단절’이라고 서술한 그러한 사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삶을 위한 이동이 이를 촉진한 것일 수도 있고, 의도적인 자기 확장이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태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이 빚는 영향도 유념할만한 조건이 됩니다. 이래저래 ‘타자와의 만남’은 불가피한 현실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타자는 단순한 ‘인상적(印象的)인 낯섦’이 아닙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나와는 다른, 그러나 그 나름의 분명한 자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타자도 나와 동일하게 단원현상을 살아가고 있고, 단원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단원인식을 전개하고 있는 주체입니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면서 단원현상, 단원의식, 그리고 단원인식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충격을 지닙니다. ‘하나’가 ‘유일한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하나인 나’가 또 ‘다른 하나인 나’와 더불어 부닥치는 ‘하나’가 되는 불가사의한 현실과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르면 ‘하나’가 수량적인 유일성을 지칭하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총체’를 의미하던 그러한 풍토(ethos)의 자연스러움을 더 지탱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정은 ‘나’만 그러하지 않습니다. 타자를 ‘다른 자아’라고 하는 지칭이 이미 함축하고 있듯이 ‘타자’가 ‘나’로부터 받는 충격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달라진 사태 속에서의 ‘타자와의 만남’은 실은 구조적으로 말한다면 ‘나’와 ‘나’의 만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원의식으로는 도저히 승인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아무리 변화를 인정한다하더라도 단원의식이 승인할 수 있는 것은 ‘나’가 증폭된 ‘우리’ 뿐입니다. 그 ‘우리’ 안에서 빚어지는 갈등이 없지 않기 때문에 굳이 변화라고 한다면 그것을 일컬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처음을 탈색한 지금’을 ‘우리’ 안에서 겪는 문제가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그리 심각할 까닭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하나에의 수렴’이 ‘우리’ 안에서는 불가능하거나 비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와 나의 갈등’이라고 기술할 수 있는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변화는 그렇게 소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정황 속에서는 ‘나’가 스스로 ‘나인 타자’를 승인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나’를 지워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자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존재의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자의식은 나 홀로 겪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경험은 그 문화권 안에 있는 당대의 모든 실체들이 함께 겪는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정황 속에서의 만남 당사자들은 서로 그 만남 때문에 지워질 수도 있을 자아에 대한 예민한 의식을 지니고 타자와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2.
이러한 서술을 전제하고 이제 더 직접적으로 기독교를 이야기해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가 오롯하게 홀로 순수한 모습으로 있었던 때가 있다는 그림을 그리곤 합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 ‘사실’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상실한 지금을 아프게 묘사하고 겪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순수에의 동경’이라고 할 수 있을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한데서 복잡한데로 인류의 역사가 진전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움직임이 지극히 점진적이고 그 기간이 상상할 수 없이 길어 뚜렷한 전기(轉機)를 서술할 수가 없어 그렇지 ‘사실’임은 다양한 차원과 시각에서 이미 충분히 실증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어떤 것도 그것 자체로 순수하게 단원적인 역사-문화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없습니다. 앞에서도 단원문화란 상대적인 개념임을 지적했습니다만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단원문화의 시대란 실은 없다고 해야 옳습니다. 그러한 시대는 실제로는 연대기를 확인할 수 없는 ‘아득한 옛날’ 이어서 신화적 진술로만 이야기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시대를 운위한다는 것은 다만 지금 여기를 서술하기 위해 설정한 ‘실증 불가능한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난 기독교는 처음부터 홀로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타자와의 만남’을 살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타자와의 만남에서 구조적으로 ‘나’와 또 ‘다른 나’의 갈등을 벌써부터 살고 있는 기독교, 그래서 그 상황에서의 자신의 ‘생존’은 불가피하게 ‘다른 나’를 배제하는 것을 기반으로 구축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타 종교와의 견줌을 통하여 확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적 기원을 일별해보면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자신이 유대교와 다르다는 자의식, 그 종교의 한계를 고발해야 한다는 자의식,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종교를 온전하게 해야 한다는 자의식 등을 통하여 자신의 자기다움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독교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나는 ~이다’를 통해서 자신을 확인하지 않고 ‘나는 ~가 아니다’를 통하여 그렇게 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언표하지 않는 경우라도 그러한 부정적 전제가 언제나 잠재적으로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부연하면 ‘나는 ~와 다르다’에서 비롯하여 ‘나는 ~처럼 불완전하지 않다’를 거쳐 ‘나는 ~와 같이 그르지 않다’에 이르고, ‘나는 옳지만 ~는 잘못되었다’는 판단을 포함하면서 마침내 ‘나는 존재해야 하지만 ~는 존재해서는 아니 된다’는데 도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확인해 온 것입니다.

따라서 ‘배타’와 ‘독선’은 그 언표가 지닌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이미 기독교가 스스로 기독교이기 위해 지니고 있는 정체성의 기반입니다. 달리 말하면 기독교의 배타성 또는 독선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겪는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지닌 ‘그릇된 특성’도 아니고 ‘정황적인 잘못’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예 기독교의 ‘생리’입니다. 그것 없이는 기독교가 자신의 생명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생존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인 신’과 ‘질투하는 신’이라는 모순적인 진술의 양립은 비록 그것이 신학적인 논의의 주제로는 심각한 것일는지 몰라도 문화사적으로 접근하면 조금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다원문화 안에서의 기독교의 현존을 이보다 더 현실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와 또 다른 나인 타자’와의 만남에서 야기되는 배타나 독선이 종국적으로 타자에 대한 정죄와 저주를 넘어 마침내 타자의 ‘소멸’을 의도하는데 이른다고 하는 사실에 있습니다. 기독교사는 기독교의 그 소멸의지를 어떻게 실천했는가 하는 것을 기술한 역사라고 해도 좋습니다. 교회사나 신학사는 기독교 타자소멸의도가 어떻게 집단적으로 그리고 이념적으로 실천되었고 이론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문화사도 기독교가 그러한 일을 결했던 때와 곳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배타와 독선이 기독교의 생존원리의 발현이라면 그것을 실천하고 이론화하는 일은 불가피합니다.

그런데 이를 더 직접적으로 관찰해보면 문제의 심각성은 예상외로 깊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현장은 ‘죽고 죽여야 하는 살육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은유도 비유도 아닙니다. 그대로 ‘실제’입니다.

이 계기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순교사(殉敎史)를 가장 감동스러운 전승내용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생존원리인 배타와 독선이 어떻게 현실화 하는지 가장 극적(劇的)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교는 타자의 소멸을 위한 장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인의 지고한 덕목입니다. 순교는 자신에 대한 봉헌과 타자에 대한 증오를 전승하는 기제(機制)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래 왔습니다.  ‘나’를 살해한 ‘다른 자아’에 대한 증오가 증폭되도록 하는 일은 피살자를 기리는 일에서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죽음 권면의 문화’를 규범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릇 기독교의 생존은 철저하게 ‘폭력 의존적’입니다. 기독교 상징의 가장 고양된 표상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일지 않습니다. 기독교 자체 안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규범은 배교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부터 구체화합니다. 타자의 승인은 곧 자기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판단이 계율이 지닌 지엄한 권위의 첫 자리를 차지합니다. 실제로 기독교사는 배교에 대한 조치가 상식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잔혹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가 자신의 소멸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예감하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거의 공황적(恐惶的)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언어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치밀하게 정제(精製)된 언어와 정연하게 다듬어진 논리로 자신을 설명하는 신학의 체계는 근원적으로 ‘변증’을 위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타자의 현존에서 비롯하는 방어와 공격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 언어들은 소통을 의도하지 않습니다. 만약 소통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 언어들은 일상 언어이기를 고집했어야 합니다. 물론 그 언어는 ‘아는 언어’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이 일상 언어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밖에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낯선’ 언어입니다. 소통 불가능한 ‘방언’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기독교의 논거는 분명합니다. 자신의 감동을 담아야 하고, 그 감동이 비일상적인 차원에서 비롯한 것인 한, 비록 일상 언어라 할지라도 그것은 비일상적인 후광을 통해 다시 태어난 것이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특정한 개념과 논리로 자기의 언어가 발언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기독교의 언어들은 한결같이 초월, 신성, 신비 등으로 개념화 됩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언어로 자기의 ‘누리’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소통 영역 안에서, 스스로 자족(自足)하면서 자존(自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변증’은 ‘다른 나’를 향한 것이지만 대화를 의도하려는 것이기 보다 자기를 선언하고 선포하는 것으로 발언됩니다. 그래서 질책, 명령, 감동의 언어들이 그 주류를 이룹니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발언의 논리는 철저하게 동어반복입니다. 

당연하게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타자도 자기 언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나 아닌 타자인 나’의 언어인 한 ‘그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자의 언어를 익히는 것은, 그리고 그 언어로 발언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자기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러한 정황은 타자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으리라는 배려는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타자가 자기 언어를 수용해주거나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만이 이른바 소통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타자의 언어에 대한 관심은 그 타자를 부정하기 위한 수단적인 가치로 간주할 수 있을 경우에 한합니다.

그런데 언어를 전유(專有)하겠다는 자의식은 인간의 의식을 점유(占有)하겠다는 자의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자의 사유를 지배하고, 나아가 타자의 존재의미와 가치를 통어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기독교의 종국적인 목표는 그러한 정황을 구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언어문화의 경우 승인해야할 다른 언어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소통을 의도해야 할 타자가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있는 것은 오직 내 언어를 익혀야 하고 내 언어로 이야기하면서 ‘나’의 실존적 감동을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잠재적인 ‘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하는 ‘타자’가 있을 뿐입니다. 타자의 존재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소박한 ‘감동의 확산’이라고만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겠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다고 반응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선교의 수단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구원의 선포, 사랑의 실천’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오직 기독교의 생존방식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생존을 위한 전쟁’처럼 이루어진 기독교의 선교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드러내어 발언하지 않지만 이미 역사적으로 실증된 사실을 감히 발언한다면 선교는 ‘전투’입니다. ‘전력의 축적’이 없으면 그것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교세(敎勢)입니다. 구성원의 확장, 정치적 힘의 강화, 경제적 힘의 축적, 문화적 영향력의 진작(振作) 등이 그 힘의 내용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 힘의 속성이나 효용은 당해 기독교가 처해있는 문화-역사적 정황 안에 있는 모든 힘의 일반적인 속성이나 효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힘의 명암’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비일상적인 언어로 이를 정당화함으로서 그 힘이 ‘비일상적인 힘’이라는 것을 자기와 타자에게 각인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다릅니다. 거룩함, 절대성, 진리다움, 온전함, 영원성 등은 그 힘을 수식하는 전형적인 언표들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힘의 수행자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그러한 힘으로 자처합니다. 따라서 승리는 기독교의 지엄한 목표입니다. 패배가 소멸이라는 인식은 처음부터 전투의 장에서 승리만을 지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타자 배제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절대 권력’으로 전제하지 않으면 이를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승리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방주’는 오직 하나이고, 그래서 그 ‘하나라는 사실’때문에 필연적으로 그것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물위에 떠있는 배는 다만 한 척 뿐이라는 것, 도대체 배는 오직 한 척 뿐이라는 이 비현실적인 묘사는 실은 타자도 ‘힘의 실체’라는 분명한 인식에서 출발한 반응입니다. 수면 위에 떠다니는 수많은 다른 배들의 현존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배타적 자기주장’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배척해야 할 대상을 승인하는 데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타자가 있어야 가능한 선언인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배타적 독존(獨存)을 주장하는 것은 아예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그래왔습니다. 그렇다면 승리를 지향하는 선교의 진정한 모습은 그것이 생존을 위한 선언이고 실천이라고 할 때 비로소 납득되는 현상입니다. 생존은 논리적 정합성(整合性)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생존은 어떤 조건이라도 상관없다는 의미에서 ‘무조건적’으로 추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존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한 이러한 긴박성은 현실적으로 승리를 위한 과정의 정당성 여부를 상당히 간과하도록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생존을 위한 충돌의 자리에서 ‘다른 힘’과의 긴장, 갈등, 충돌, 싸움뿐만 아니라 충돌 대상을 포함한 상호간의 유착, 협조, 의존, 빙자 등도 현실화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지닌 타자배제의 원리는 필연적으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배제 원리의 당위성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다는 자기주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나 ‘상황적’입니다. 적어도 실제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차원에서 이를 승인하는 발언은 들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있습니다. 교회는 이를 수행하고 있는 사회적 실체이고 기독교인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자기의 책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모습으로 자신의 감동을 확산하면서 전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왔기 때문입니다.
 
3.
이제 오늘의 현실을 살펴도 괜찮을 자리에 이른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만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기독교 이외의 이른바 종교들을 종교 아닌 종교라고 해도, 그릇된 종교라고 해도, 곧 망할 종교라고 해도,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종교들’의 숲 속에 있습니다. 도대체 종교가 여럿이라는 현상은 인식의 문제도 아니고, 해석의 문제도 아닙니다. 종교개념을 재규정하면 걸러지고 사라질 그런 현상도 아닙니다. 그것은 소박하게 말해서 ‘피부에 닿는 일상’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불리든 그러한 종교가 종교인 것은 그 종교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삶의 경험이 표상화된 것이고,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종교라 했기 때문에 있는 현상입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종교가 있다가는 사라지고, 없는데 생겼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신이 탄생했고 또 퇴거했는지 모릅니다. 신이 있는 자리에는 신도(信徒)가 있었는데, 신도가 없어지면 신도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신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이를 경험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사실’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경험없이 발언된 어떤 ‘말씀’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다원성 속에서 있었습니다. 다원성은 기독교에게 전혀 새로운 사태가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기독교는 수많은 종교 속에서 비롯했고, 또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있습니다. ‘나 아닌 타자로서의 나’인 타 종교들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교회도 신도도 자기 확인을 지금 기독교나 교회나 신도가 하는 그러한 언어로, 조직으로, 의례로, 행동으로 하지 않았으리라고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의식(意識)은 근원적으로 다원현상에서의 자기 변증을 통해 구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배타와 독선은 기독교의 당연한 규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자신이 이미 다원성 속에서 출현했고 또 있어왔다는 사실을 승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제 다원성이 더 이상 지금보다 분명할 수 없는데도 여전히 단원의식의 순수에 대한 향수 속에서 실은 자기가 경험한 적이 없는 ‘단원문화 안에서의 자신의 현존’이라는 어떤 이미지를 구축하든가 회복해야 하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독교의 자기인식과 문화인식은 몇 가지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규범적인 판단을 전제한 다종교현상에 대한 부정입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이른바 그 현상을 ‘타락의 징표’나 ‘종말의 징후’로 읽습니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만날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 두려워해야 할 일이 마침내 움터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당혹스럽고 절망적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사태와의 비장한 조우는 승패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자발적인 자기 소멸’이라고 해도 좋을 피안에의 동경 속에서 이 사태의 비극성을 벗어나려 합니다. 자기 생존을 그렇게 확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현실적으로 그 주체들의 비극적 종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타자배제의 원칙을 새삼 강화하고 더 치밀하고 과감하게 준비된 전투의 장에 나아가는 태도도 또 다른 반응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아니’라는 데서부터 존재자체를 지우겠다는 선언에 이르는 간극을 오가면서 그 마디에 적합한 행위를 구체적으로 실천합니다. 순교사화(殉敎史話)는 그 행동의 전범(典範)이 됩니다. 이 의식의 지평에는 인식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정직하다고 스스로 확인하는 고백만이 언어화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고백한 사실을 인식의 내용으로 수용하기를 타자에게 강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만난 상대에 의하여 다른 귀결에 이르기도 합니다. 승리할 경우도 있지만 패배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멸의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무릇 인식의 거절이 자학이듯 이 경우도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배타와 독선을 부덕한 것으로 여기면서 타자의 현존을 포용하고 관용하려는 반응도 있습니다. 다종교 현상은 거절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이 입장은 소박하게 긍정합니다. 타자배제의 원칙이 상호간의 소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자를 승인하고, 수용할 때 비로소 자기 생존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승리의 참 모습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종교현상은 동질동량(同質同量)의 종교가 병존하는 사태를 일컫지 않습니다. 힘센 종교도 있고 힘없는 종교도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기가 타자에 비해 강자(强者)라는 사실이 확인될 때만 현실성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관용은 근원적으로 덕목이 아니라 ‘힘의 존재양식’입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다종교현상에 대한 무관심한 반응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실은 만남 도식(圖式)의 완성을 위해서는 설정할 필요가 있지만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사태입니다.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유지한 채 이루어지는 타자와의 공존이란 의도적으로 그렇다고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다종교현상은 간과하면 보이지 않는다거나 의도적으로 주시하면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태도는 실은 사태를 회피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태의 회피는 진단의 거절과 같은 것이어서 치유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의 다른 모습에 불과합니다. 

만남 자체를 온전하게 하려는 노력도 보입니다. 나는 나대로 그대로, 다른 나는 다른 나대로 그대로, 그렇게 만나 각기 자기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반응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대화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만남을 묘사합니다. 경청은 발언보다 귀합니다. 배타와 독선은 이미 버려진 ‘덕목’입니다. 다름은 그름이 아니라는 전제 위에서 대화란 독백의 교환이 아니라는 규범도 지니고 있습니다. 대화가 끝나면 변화된 자기를 피차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대화의 목표가 됩니다. 그러나 가장 성공적인 경우 이 대화를 통한 자기 상실은 불가피합니다. 또 그래야만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대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만 지적 유희이거나 고액의 투자를 하고도 실속이 없는 사치스러운 관계를 향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상실을 전제하거나 성취한 대화란 사실상 없습니다.  



아예 종교적 정체성을 가리고 삶의 자리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주체로 만나 그 다원적인 종교현존의 상황을 넘어서고자 하는 반응도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으로서의 동질성을 전제하는 휴머니즘의 발현이기도 합니다. 다종교 상황 속에서의 종교인에 대한 밖으로부터의 기대가 ‘종교인’이 아니라 ‘성숙한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유념하면 이러한 만남은 현실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를 배제한 종교 간의 만남이라는 역설을 내장합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문제로부터의 일탈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그러한 반응이 ‘인간을 통한’ 접근이라는 방법론적 태도라 할지라도, 또 만약 참으로 그러하다면, 그것은 인간을 빙자한 비인간적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도구화되기 때문입니다.

 

▲ 강연하는 정진홍 교수     © 한목협

4.
문제는 타자 배제의 원리와 그를 덕목화한 ‘배타’와 ‘독선’이 분명하게 기독교의 생존원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는 더 이상 적합성을 지닌 기독교의 생존원리일 수 없다는 자각이 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진술한다면 배타와 독선은 오히려 기독교의 생존원리가 아니라 파멸 또는 소멸원리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조짐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들이 빚는 증오와 저주와 살육의 현장에서 기독교는 결코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는 그 자각이 반응한 이러저러한 양태들이 그러한 자각을 구체화하고 실천하는 실제적인 것으로는 충분한 적합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기독교의 고뇌는 바로 이러한 정황에서 일고 있습니다. 다종교 상황을 절망적인 타락의 징후로 여기는 일, 배제의 원칙을 더 강화하는 일, 강자의 자의식에서만 가능한 관용을 베푸는 일, 무관심한 채 공존을 의도하는 일, 대화를 하면서도 자기 변화를 유보하는 일, 인간을 빙자해 종교를 가리는 일 등을 어느 것도 온전한 해답으로 제시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응의 어떤 것도 그것이 ‘해답의 시도’인 한 여전히 이를 더 성찰하고 심화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판단의 자리에 서면 그 반응들의 의도와 연결하여 이들을 가정문의 틀에 넣어 그것이 지닌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만약 종교다원현상을 종말의 징표로 읽는다면 그것은 우울한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 누리의 비롯함을 담보하는 징표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재생일지 흔히 일컫는 새로운 영성의 출현을 담보하는 것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의 기독교의 참상을 더 이상 지속하게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만은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만약 타자 배제의 원칙이 고백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천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를 통해 고백의 내용을 곧 인식의 내용으로 환원하면서 범하게 되는 과오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고백을 네 고백으로 여겨야 한다는 억지를 부리지도 않을 수 있을 것이고, 종국적인 승리를 지향하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백이 자기 정직성을 준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자기를 향한 발언이지 타자의 인식을 당위적으로 규제하는 폭력일 수 없다는 사실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실은 증오를 전승하는 제도를 존중하는 한에서만 기려지는 것임도 당연하게 천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타자에 대한 관용이 도덕적 성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의 불균형 속에 있는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덕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다종교 상황 속에서의 종교 간의 만남에서 기독교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범한 위선의 과오에서 더 가벼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용서해야 하는 주체가 아니라 용서받아야 하는 주체임을 자인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줄 것이고, 이를 통해 ‘약한 종교’에 대한 배려를 현실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현존하는 타자에 대해 무관심한 채 그와 더불어 공존할 수 있다는 자기의 발언이 실은 불가능한 현실을 서술하면서 결과적으로 자기를 기만하는 것에 이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다면 다원현상에 대한 정직한 인식을 더 구체적으로 의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왜 어떻게 있으며 그것과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하는 것에 대한 총체적 성찰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찰은 나 자신의 현존에 대한 분석적 인식을 도모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것입니다.

만약 대화가 결과적으로 대화 이전의 자아와 이후의 자아의 변모를 전제하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성숙을 이루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화는 기획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이고,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당위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다종교현상은 이미 대화하는 종교들의 장을 묘사하는 것이지 나열되어 있는 종교 간의 이상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방법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종교에 의하여 수식된 자아를 벗어버리고 인간과 인간이 만난다고 하는 것이 다종교간의 만남에서는 오히려 문제의 극복이 아니라 회피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을 승인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인에서 인간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서 기독교인으로 나아가고 다시 그 자리에서 인간으로 나아가는 순환적 역설을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도 종교인도 모두 잃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 그 둘을 그렇게 분리할 수 있다는 사실자체가 실은 그러한 반응에 대한 적합성이 없는 서술이라는 것을 발언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술한 다원현상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들을 좀 더 천착해본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다원현상과 직면하면서 당혹스러움을 겪고 있는 기독교를 향해 다음과 같은 고언(苦言)을 감히 발언할 수 있습니다.

배타와 독선을 버리고 그로 인해 초래될 자기상실을 경험하자는 것이 그 하나이고, 고백의 언어를 인식의 언어와 더불어 발언하자는 것이 그 둘 이며, 자신이 힘의 실체임을 비일상적인 언어로 수식하는 일을 삼가자는 것이 그 셋이며, 증오의 전승을 단절하자는 것이 그 넷입니다.

의도된 자기 소멸의 경험이 어떤 사태를 빚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새 누리와 이어질 것입니다. 인식의 언어를 수반하는 고백의 언어가 어떤 의미를 낳을지 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언어가 지적 부정직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리라는 예상은 분명합니다. 절대적이고 신비한 후광을 걷은 힘이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힘이 위선을 벗어버린 모습일 것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순교의 기림을 저어하는 일이 어떤 분노를 야기할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왜곡된 자의식을 벗어나게 해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종교다원현상과 직면하여 수행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메타노이아’가 그것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죽어 되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올라 자신이 제물이 되어 그렇게 자신을 불사르는 일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기적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출처: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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