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장로님은 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까?” 만일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이런 저런 이유로 내가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는 고백이 내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열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골에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두 남동생과 같이 지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학교에 곧장 가지 못하고 한 해를 집에서 보낸 뒤 중학교에 올라갔는데,먼저 믿기 시작했던 작은 누님이 나를 교회로 인도했다.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는 사천 삼한교회가 내가 어릴 때 신앙교육을 받은 교회다. 땅의 아버지를 여의고 하늘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확신과 기쁨은 고등학교 때에야 체험했다.



계명대에서 4년간 가르친 후 1990년 서강대로 옮겨온 후 내가 주로 관여해 온 단체는 기독교학문연구회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다. 흔히 기학연과 기윤실로 알려져 있는 이 두 단체는 기독교대학 설립동역회와 더불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주도해 온 단체다. 신앙과 지성과 삶,이 셋이 서로 따로 놀지 않고 통합적으로 하나된 모습으로 살자는 운동이다.



내가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네덜란드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신 교단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고신측 학생신앙운동인 SFC 26회 동기수양회 때 당시 제일 영도교회에 시무하시던 석원태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나는 목회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곧장 고려신학대학에 입학해 2년을 다녔다. 여기서 네덜란드 개혁 신앙 전통을 알게 되고 차영배 교수님 도움으로 네덜란드어에 입문했다.

그래서 결국 신학대학을 떠나 그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어를 공부할 수 있었던 외국어대학으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그곳에서 손봉호 교수님을 만났다. 이 분들을 통해 소개받은 카이퍼와 바빙크,도예베르트와 반퍼슨을 읽으면서 나는 신앙과 삶과 학문을 서로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지향하는 태도와 문화와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배웠다.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과학적 설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투영이 아닌가. 만일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각자 그 짐을 짊어져야지 어떻게 예수에게 그 짐을 대신 맡길 수 있는가.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생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서 반론의 여지 없이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답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도인 나에게 왜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기독교 신앙만큼 이치에 맞고,지적으로 만족스럽고,도덕적으로 신뢰할 만하고,감정적으로 포근한 것은 없다고….



오늘의 사상계를 지배하는 자연주의,포스트모더니즘,세속적 인본주의가 만일 참이라고 가정해보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며 모든 것은 물질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자연주의자들은 말한다. 참과 거짓,선과 악,옳은 것과 틀린 것은 사회적 약속이거나 인간 정신의 산물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장한다.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가치 척도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 주장들이 참이라면 기독교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고 영향력을 끼쳤던 러셀의 결론이 맞을 것이다.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원인들의 산물이며 사람의 출생,성장,사람이 가지고 있는 희망과 두려움,사랑과 믿음은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어떠한 정열도,어떠한 용맹도,어떠한 강렬한 사유와 감정도 내세에서는 개인의 삶을 보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세대의 수고와 헌신과 영감과 번쩍이는 천재성도 태양계의 종말이 오면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다. 결국 아무런 근거,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허무주의’가 결론이다.



기독교 신앙을 수용할 때 우리는 세속적 세계관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몇 가지 근본적 사실을 알게 된다. 예컨대,이 세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의도와 계획과 목표가 있는 세계이며 우리 자신은 한낱 원자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이고,참과 거짓,선과 악도 단순히 사회적 약속이나 인간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의 본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들이다.

또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기 때문에 우리의 열정,노력,수고와 헌신이 헛되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근거일 뿐 아니라 지식의 근거이며,도덕의 근거이며,현재와 미래의 근거다.   허무주의는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극복된다. 이것이 크리스천 철학자로서 나 자신이 예수 안에서 소망을 갖는 이유가 될 것이다.


   


                                               ◇ 강영안 교수는

1952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외대와 벨기에 루뱅대학,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을 졸업했고 칸트 철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 철학과 교수이며 철학연구소 소장과 교양학부 학장을 겸하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로 섬기고 있으며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강교수의 철학이야기’ 등 9권의 저서가 있다. 서양철학 수용 이후 현대 한국 철학에 관한 책이 최근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예장고신 두레교회 장로이며 새로 분립 개척한 김포두레교회를 돕고 있다. 

                                                                                               국민일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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