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정의 위기는 곧 중우정치의 등장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독재적 민중 경계
- 법치의 파괴, 대중영합적 결정, 선동가들의 득세...중우정치의 현상
- 그리스도인들 부터 다양한 정보 수용시 분별할 수 있는 안목 길러야

민주정이 고도의 발달기를 거쳐 위기를 겪게 되고 퇴락의 조짐이 보일 때, 겪게 되는 것이 중우정치이다. 중우정치란 시민중심의 다수결 유형을 가진 민주주의가, 법치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종다수(從多數)에 의해 지배되는 유형을 의미한다. 이는 법률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지 못하는 국가에서 대중을 선동하는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민중이 폭군이 되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소위 '독재적 민중'이 등장하게 되며, '다수의 난폭한 폭민'들이 이끄는 정치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

플라톤은 민주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면서 중우정치의 출현을 경고했었다. △ 민주주의는 대중적 인기에 집중하고 요구에 무조건 부응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지니며, △ 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고려하지 않는 불의를 지니고 있으며, △ 엘리트주의를 부정할 가능성을 지니며, △ 개인이 절제와 시민적 덕목을 경시하고 방종으로 점철되어 의무나 법질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있으며, △ 정치권력의 주체인 대중의 인기에 부합하기 위해서 인기영합주의자들이나 대중선동가들이 대중적 지지를 얻어 국가를 움직일 수 있고, △ 그렇게 인기를 얻은 자들이 점차 권력을 독점하며 민주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독재정으로 변환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자유의 과잉은 노예상태의 과잉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가운데 두 사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다. (사진=네이버 지식백과)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가운데 두 사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다. (사진=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우정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여섯가지로 제시한다. 이는 플라톤이 지적한 문제점과 일맥상통한다.

첫째, 민중정치가 발생하는데, '독재적 민중'이 등장한다. 이는 개인적인 권력이 아니라, 집단적인 권력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부류가 발생하는 것다.

둘째, 새로운 형태의 독재 권력이 등장하는데, 더 이상 법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재적인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즉, 외형은 민주정인데도 군주정의 다른 형태인 독재정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셋째, 선동정치가 대두된다. 민주주의의 변형에서는 측근 정치와 선동정치가 판을 치게 되는데, 선동가들은 국민을 선동하고 조종함으로 그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쳐 국정을 좌우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하여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선동정치인은 독재정에서의 아첨꾼과 동일하거나 유사하다"고 말한다.

넷째, 공직자들의 권위가 추락한다. 민중의 목소리가 크고 그들의 힘이 강하다보니, 공직자들이 원칙대로 판단하고 결정내리지 못한다. 심지어 국가 공직자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비판가들은 '시민들이 결정하게 하라'며 주창한다.

다섯째, 법치의 실종과 헌정이 붕괴된다. 법 대신 민중의 목소리가 중요하고 관리들의 판단 대신 시민들의 결정이 비중을 차지하면서 민주주의 사회는 법치가 사라지며 헌정파괴가 일어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주의가 정부의 한 형태일지 모르나 모든 것이 국민들이 내리는 결정들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라면, 그것은 그 말의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도 아니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만드는 법령이란 단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에만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선동정치가들의 채략이 횡행한다. 민주정에서 민중선동가들은 부자들에 대하여 거짓정보를 흘려 민중들이 결속되게끔 한다거나, 민중으로하여금 그 부자들에게 대항하도록 그들을 공적으로 선동하게끔 하는 것이다. 이로인해 부유한 상류층의 사유재산을 재판을 통해 몰수하고, 민회(民會)를 위해 수당을 주고, 재정이 남아돌면 돈을 대중에게 나눠주는 경향까지 보인다.

중우정치를 넘어선 민주정을 향한 제언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군주정과 민주정이 조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는 페르시아의 군주정과 아테네의 민주정을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정에서는 극단적 자유의 구가를 피해야 하고 군주정에서는 독재적 억압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도한 통치자의 극단적 행위와 고삐풀린 독재적 민중 간의 중도를 발견해야 했다. 이런 방식을 통하여 그는 현실정치의 이상을 군주정과 민주정의 어떤 중간 위치에서 찾으려는 듯 하였다.

그러면서 플라톤은 올바른 민주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특징인 자유와 평등이 과잉되는 경우를 인식해야 하고, 중용과 절제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즉, 민주정이 독재정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중도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시민들이 과도한 자유와 평등의 시행을 요구하지 않으며, 법질서를 분명하게 준수해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들을 대변하는 정치지도자를 내세울 때 자체적인 검증절차와 견제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시민의식 및 정치의식의 상승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민중의 힘으로 등장한 정치 지도자는 민중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위한 정책 구상이나 발전을 도모해야 하고, 민중을 계도하고 이끌 정도의 민중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해야 함을 밝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무엇보다 선동정치에서 온다고 보았다. 선동정치는 중우를 만들고 중우들은 선동가들을 떠받들므로 결국 스스로의 주권을 포기하게 되는 결과가 발생하며 독재정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중우'는 '선동에 의해 움직이는 민중'을 말하는데, 선동가들은 이런 민중을 자극하여, 한편으로는 부자와 같은 기득권자를 비판하거나 공격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의 정치적 입지를 견고하게 하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민중들에게는 술수와 현혹의 태도로, 기득권자들에게는 비난과 협박, 공격의 자세를 취한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내심으로 정작 민주주의를 자신들이 붕괴하고 권력을 독점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의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선거권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행정장관을 뽑는 선거권을 전체 시민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부족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인위적인 선동에 대해서는 중한 책임을 물어야 하며, 나아가 법적 장치를 통하여 엄한 처벌이 수반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바르게 분별하는 시각을 갖춰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일하게 민주정의 위기가 찾아올 때, 대중선동으로 인하여 중우정이 발흥하게 될 것을 예측했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 분명한 법치의 실행, 시민들의 의식 향상, 국익과 공익을 함께 추구하는 정신, 양적 민주주의를 통해 대중귀족정, 혹은 대중독재정이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 결국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어떠한 사안에 대해 매체나 대중에 의해 경도되지 않는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선동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혹 한 사건에 대해 일부 매체로 인해 잘못된 시각을 갖게 되었을 때, 다른 정보로 인해 그 사실에 대한 다른 접근이 이루어진다면, 자신의 잘못된 시각을 인정하고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9일, 한파에 거리서 발견된 3살 여아…"도와주세요" 라는 제목으로 보도를 한 SBS (사진=SBS 뉴스 다시보기 갈무리)
지난 9일, 한파에 거리서 발견된 3살 여아…"도와주세요" 라는 제목으로 보도를 한 SBS (사진=SBS 뉴스 다시보기 갈무리)

한 예를 들어, 얼마 전에 '한파 속 내복 차림 3세 여아'의 사건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정인이 사건으로 인해 들끓고 있었던 대중의 시선이 여기에 집중된 것이다. 이 기사를 처음 내보낸 언론은 아주 자극적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추운 날에 아이가 내복차림으로 밖에 장시간 방치되었고, 내복은 대소변으로 젖어있었다고 보도가 되었다. 이는 곧 수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되어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그 아이의 어머니 A씨는 비난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이는 언론이 지나치게 부풀려 사건을 보도한 것임이 드러났다(혼동스러웠던 '내복 아이'보도, 그날 무슨 일 있었나).

일단 아이의 나이는 만 4세여서 어느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태였다. 또한 A씨는 구청에서 전일제 자활근로를 하며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사건 당일에 아이가 보육기관에 가기 싫어해서 집에 혼자 두고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A씨는 일을 하면서 틈틈히 영상 통화와 일반전화를 통해 아이와 소통을 했고, 실제로  한 보도에 따르면 A씨는 퇴근하는 5시까지 20-30분 간격으로 아이와 통화를 했고, 이때까지 약 34번 연락을 취했다. 마지막 통화때 아이가 대변이 급하다고 말을 하자 화장실 사용법을 알려줬고, 스스로 뒷처리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본인이 퇴근하고 있었기에 집으로 가서 마무리를 하려고 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씨는 퇴근을 하고 집에오면서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아이는 A씨에게 5시 6분부터 10차례 전화시도를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뒷처리를 깨끗하게 하지 못해 집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최초의 신고자도 "아이가 엄마를 만났을 때 너무 반가워해서 길을 잃었다는 생각만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고, 조사 과정에서 A씨는 자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수입이 줄어들더라도 반일제 근무로 옮길 수 있는지 문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이 사건은 해프닝처럼 발생한 사건을 최초 보도 언론이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자극적으로 보도를 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수많은 기사가 보도되는데, 그 안에 제대로 된 팩트체크 없이, 혹은 일부 아주 작은 부분의 사실에 많은 부분을 과장하여 기사를 작성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 가운데 정보를 접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정보의 타당성과 적합성을 따져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분별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동가들에 의한 선동에 휩쓸리며, 그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분별하는 그리스도인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분별'은 헬라어 '도키마제인(dokimazein)'으로 '시험하다, 조사하다, 승인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론 바울은 이 구절을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할 것을 도전하고 있지만, 무엇인가를 '분별'해야 하는 것, 즉, 어떠한 사건이 그러한 것인지 '시험하고, 조사하고, 승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시대를 바라볼 때, 이 시대 이면에 역사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을 분별하고, 또한 한 사건에 어떠한 선동적 요소가 있는지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선동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멀게는 미국산 소고기 광우병 사건에서부터, 가깝게는 월성원자력 피폭량에 대한 이야기까지, 우리가 주의해서 '분별'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선동되어 살아가는 우민이 될 것이고,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분별 할수만 있다면, 진정한 민주정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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