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흔들리던 젊은 엄마에게 복음의 능력이 임했다

정서환 작가 / 새하늘교회 집사
정서환 작가 / 새하늘교회 자매

어려운 상황이 올 때마다 성경이 주는 메시지를 받아먹으며 살았다.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는 귀한 은혜임이 틀림없지만 겨우 그거 하나 이해하며 이어간 신앙생활이었다. 그랬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 실제라는 사실 앞에 서게 되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나를 지배하고 있던 각 영역의 죄를 어떻게 깨뜨렸는지 또 주님이 그것을 어떤 상황 속에서 말씀하셨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1. 내 신앙생활을 엉망으로 만들던 종교다원주의

기독교를 종교라는 점에서 폭넓게 봤을 때, 성경은 그때그때 사람의 어려움에 길잡이 역할을 하며 다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일 때가 있다. 성경의 그런 역할처럼 타종교 역시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도구들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 왜 꼭 기독교이냐고 물었을 때 이런 관점의 대답은 한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로 빠지기 쉽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들을 분별할 열쇠를 주셨다.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자는 보고 들을 수 있게 부활사건을 예비하시고 이루셨다. 이것은 왜 나는 꼭 기독교인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주었다. 십자가의 대속사건과 부활사건은 나의 종교다원주의를 무너뜨렸다.

 

2. 나는 무엇을 붙든 신앙이었나

두 번째로는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왜 복음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다. 성경은 자체가 귀하고 진리지만 우리는 또 그곳에서 귀감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 헤맨다. 성경을 학문으로 접근하지 않는 이상 나 같은 일반 성도들은 인간적인 선에서, 또 감성적인 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기적, 따스한 성령님의 보호하심 등 내가 취하고 싶은 부분을 취하기 쉽다. 또 반대로 절대 감정에 취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리라, 인간이 아닌 하나님을 보는 신앙을 하리라 마음먹어도 복음을 통한 참된 회개와 구원 없이는 그 곤두선 생각들이 믿음 생활을 엉망으로 만든다.

복음이 부재한 신앙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출발선을 만들지만 진정한 회개와 그것을 유지하려는 힘을 제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세상과 분별된 무언가를 얻었지만,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알지 못한 것이다. 복음은 내게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제공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나를 믿는 것인지 헷갈리는 인본주의적 신앙을 주님은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의 복음으로 무너뜨렸다.

 

3. 복음으로만 생각의 기원인 세계관들이 무너진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물리적인 부활사건은 인간을 오염시키는 세계관을 멸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요즘 교회의 리더모임 후에 하고 있는 북 스터디를 통해 우리 생각을 지배하는 세계관들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적 세계관, 프로이트 세계관, 마르크스의 세계관 등을 보며 나는 이것이 성경적 세계관과 단순 비교분석을 넘어 이러한 세상의 세계관들이 성경의 구원은 물론이고 인간들만의 구원 역시 이루지 못함을 느꼈다. 그리고 결국 답은 하나님이었고 복음이었다.

왜 사람들은 종교와 믿음은 끝없이 의심하면서 자기 생각의 근원을 탐구하거나 의심해보지 않는 걸까? 그것은 내가 믿음을 통해 삶의 평안과 확실한 변화를 경험했듯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관이 나름의 방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것이 갖는 한계를 이겨낼 만한 충분한 이점을 가진 것은 아닐까? 종교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더 많은 인간을 선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지 않을까? 특정 사상을 주창했던 인물들의 주장이 견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던 시절의 내 모습이다.

우리는 많은 세계관에 의해 영향받는다. 인간의 잠재의식 탐구와 본능 해소의 기준 제시, 이상향 추구와 교육을 통한 도달 등.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할만한 요소를 나름 갖고 있다. 종교 없이도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맹점이 있다. 사람은 전체주의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했고, 각각 삶에 드러나는 문제가 같은 모양이 아니라는 것과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상의 최후는 모두 악하게 끝났고 오염된 채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4. ‘사상은 인간의 욕망이지 사건이 될 수 없다.

세상을 움직인 핵심 사상들과 심지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까지 넣어 표를 만들었을 때 큰 교집합이 존재할 것이다. 인간의 문제들은 비슷한 방법을 통해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딱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사건이다.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하나님의 예언 성취이자 역사다. 이 복음은 교육이 아닌 구원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킨다. 아래부터 점진적으로 깨부수는 사상의 본질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역사의 시작이다. 사상은 인간의 욕망이지 사건이 될 수 없다. 온갖 물음과 욕망의 시작, 이성적인 흐름, 나름의 성과, 영감, 인간사의 영향력에 맞서 주님은 유일한 해결책으로 복음을 주셨다.

인간이 내린 결론에 의한 행동과 확실한 증거와 순종에 의한 행동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사상사실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교회 사모님께서 자꾸 복음이면 다 됩니다라고 하실 때마다 그것이 가능한 영역이 있고, 현실적이지 않은 영역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나친 승리주의가 거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계속 입술로 복음이면 다 되는데. 왜 인간은 광야에 머무는 걸까라는 생각만 든다.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사실 지금까지 말한 내용들은 복음을 정확히 알고 있고,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훌륭한 성도들에겐 너무 당연한 것들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광야를 오랫동안 헤맸다. 나의 우상을 세웠고, 불평했고 비판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붙들었으나 주님의 진리를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이유를 얻지 못한 신앙생활을 했다.

 

5. 나는 불안한 젊은 엄마였다.

내 삶을 나누고 싶다. 친정엄마와의 식사 도중 그런 말을 들었다. “엄마는 네가 결혼하고 사실 힘들었어. 네가 너무 어리고 불안해 보였어. 게다가 학생 신분에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겪는 걸 보며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근데 지금 보면 너는 네 아들과 같이 크는 거 같아. 네 아들이 아니었으면 네가 이렇게 단련될 수 없었을 거야.” 불안감이 많은 나를 보며 엄마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나는 결혼도, 육아도, 출산도, 학업도 모두 불안했다.

아이가 너무 좋았지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그 괴리감이 너무 힘들었다. 무언가에 몰두하지 못 하게 하는 가정과 아이가 지쳤다. 내가 도태되는 것 같았다. 아이로 인한 모든 문제에 신경이 곤두섰고 여유를 갖지 못했다. 나를 괴롭히러 온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목표, , 하루하루가 바쁘고 조급한데 내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상황이 나아지고 나이가 좀 들어도 습관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을 원망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과민해서 아이한테 지친 게 아니라 죄를 짓고 있었다. 주님이 허락하신 아이를 순종으로 양육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살려고 주님을 붙들었다. 허벅지를 쳐가며 기도했고 울고 교회 사람들에게 묻고 도움을 청했다.

 

6. 세상에 흔들리던 젊은 엄마에게 복음의 능력이 임했다.

엄마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 나는 아직도 못나고 어려운 거 투성이야. 그래서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뛰어난 통찰과 지혜를 주진 않으셨지만 내가 길을 이탈할 때마다 다시 등을 돌려 주의 길에 머물게 하셨다. 그래서 내 선택은 최고의 선택이 되고 나는 지혜의 자리에 머물 수 있었다.

내가 주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입맛에 안 맞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찌르고 민낯을 들춰내며 짓밟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페미니즘에 빠져 매일 그런 책들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있지 않았을까? 지적 허영심에 사로잡혀 종교인들을 시각장애인 취급하며 조롱하고 업신여기지 않았을까. 파도 같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나를 아무 곳에나 방치하지 않았을까? 세상이 가르쳐준 그 생각들에 취해 죄를 구별하지 못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자식에게 헛된 욕망을 투영하고 내 멋대로 끌고 가려 하지 않았을까? 남편을 공격하고 성경을 공격하지 않았을까? 사실 다 조금씩 해본 거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주의 손길 아니면 살아갈 수 없던 20대의 한순간 한순간이 감사였다. 나는 20대를 전부 결혼과 육아로 보내서 매번 무언가 들통 난 인생’,‘손해 보는 인생’,‘맞지 않은 옷을 입은 불편한 인생을 사는 거 같아 서럽고 억울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죄를 하나하나 벗고 있는 것이었고, 구별된 길을 가는 것이었다. 죄를 직면하니 불편했던 것이고 진리 안에 머물다 보니 내 작은 죄도 도드라져 보인 것이다.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나님 다원주의와 인본주의적 신앙인이 되지 않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거나 누군가를 짓밟아야 산다는 악한 진화론적 세계관을 멸하게 하심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아름다운 본능을 제멋대로 해석한 프로이트적 세계관을 버리고 주님이 친히 마련한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게 하심 감사합니다. 하나님, 길들여진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삶의 많은 영역과 내 아이의 미래마저 분별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사실 아직 너무 어렵고 힘듭니다. 이것을 분별하고 진리를 찾아 고개 들게 하심 감사합니다. 끝까지 저를 붙들어주세요. 하나님, 나는 고작 내 자식이 나를 힘들게 한다면서 주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은혜로 응답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진리를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은 제가 걸어갈 순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주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주님은 이런 나에게 돌려 말씀하시지 않았다. 믿을만한 증거와 길을 예비하셨다. 그래서 나는 또 지독한 내 본성에 의해, 옛 습성에 의해 돌부리에 넘어지고 울고 쓰라리겠지만 내 믿음이 꺾이진 않을 것이다. 나는 붙들어야 할 것을 찾았고, 이제는 그것을 죽을 때까지 또 내 아이들의 유업으로 남겨야 하는 확실한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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