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회 고신총회세계선교 후원교회 협의회(이하 선후협) 선교포럼이 '코로나 시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라는 주제로 5월 3일~4일 경주 켄싱턴 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손승호 선교사는 코로나 시대, 선교적 교회의 실천적 적용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손 선교사의 허락을 받아 발제문을 싣는다. 
제 11회 고신총회세계선교 후원교회 협의회(이하 선후협) 선교포럼이 '코로나 시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라는 주제로 5월 3일~4일 경주 켄싱턴 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손승호 선교사는 코로나 시대, 선교적 교회의 실천적 적용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손 선교사의 허락을 받아 발제문을 싣는다. 

 

코로나 시대, 선교적 교회의 실천적 적용1)

손승호 선교사

 

들어가면서

에이브러햄 링컨은 내게 만약 나무를 베어 넘어뜨릴 시간으로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도끼를 가는 데 45분을 쓰겠다(If I only had an hour to chop down a tree, I would spend the first 45 minutes sharpening my axe.)”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지금 어쩌면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목회자, 성도, 선교사들은 나무를 베는 시간이 아니라 도끼를 갈아야 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201912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처음 확인된 우한폐렴 혹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사태로 전 세계가 인간의 삶 모든 분야에 2년 째 지금까지 비정상 상태라고 여겨졌던 일이 정상으로 둔갑한 뉴노멀’(New Normal, 새로운 표준)’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정부의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교회의 대면예배를 제한하는 정책 때문에 한국교회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어머니 뱃속의 탯줄이 태아를 연결해주듯 한국교회는 파송된 한국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한국교회만큼 한국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도 동일한 타격을 입었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줌(Zoom) 모임이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많아졌다. 필리핀한국선교사협의회 중보기도사역위원회가 주관하는 줌새벽기도회는 20209월에 시작되었는데 출발할 때 선교사들이 잘 진행될 것인지 반신반의 하였는데 지금은 200명 가까이 참석하고 있다. 참석자들의 통계를 보면 필리핀 선교사와 필리핀 외의 선교사가 반반을 차지하고 있다. 귀한 강사들이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줄을 서고 있고 평소 같으면 만날 수 없었던 분들을 만나는 복을 필자다 누리고 있다. 지난 7개월 사이에 사건사고나 코로나 등의 질병으로 사망한 선교사들이 20215월 초 현재 27명에 달하는데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인원까지 합하면 더 많을 것이다. 복음은 주 예수께서 생명을 주심으로 완성된 것이지만 동시에 생명보다 더 귀한 복음을 전파함에는 선교사들의 생명의 대가가 또한 지불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코로나 사태가 계속되면서 하나님께서 이런 비상 상황을 통하여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본질을 회복하라는 것인 줄 알고 지나온 선교사역을 반추하며 방향을 재조정하고 있다. 역사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BCAD로 나누듯 코로나 이전과 이후를 BC(Before Corona)AC(After Corona)로 나눌 만큼 외적인 핍박이 없었음에도 교회가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를 축소/중지하기에 이르렀다. 세계교회역사를 보면 외부의 핍박으로 교회가 비자발적으로 예배를 중지한 적은 있지만 자발적으로 예배를 축소/중지한 것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목회와 해외선교를 비교하면 복음을 전할 대상의 차이 외에는 근본적으로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나 선교도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한국사회 전체에 더 잘 알려진 세계로교회의 손현보 목사가 쓴 베스트셀러인 목사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2)라는 책을 보면 교회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손현보 목사가 장년 20~30명 모이는 40년 된 어촌교회에 처음 부임하여 남녀전도회 월례회 때 설교 부탁을 받았다. 남전도회는 회원들의 회비를 거둬 1년 사업이 강아지 한 마리를 키워 부부 동반 친목 모임에 개를 잡아먹고 교제하는 것이 목표였고 여전도회는 김과 젓갈을 팔아 교회 비품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였다. 손현보 목사는 전도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의 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남녀전도회를 모두 폐지시켜 버린 것을 기술하였다.3) 우리 모두가 알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손현보 목사는 인구가 별로 없고 도무지 교회가 될 것 같지 않은 지역인데도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여 성경적으로 건강한 세계로교회를 일으켜 세웠다. 교회의 본질 회복이 이렇게도 중요하다. 해외선교의 목표도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면 선교 역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원래 의도하셨던 교회를 타문화권에 세우는 것이 건강한 선교라고 할 수 있다.

교회, 믿음, 복음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교회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낳은 천재적인 작가 중 한 명이었던 톨스토이4)도 동일한 고민을 하였다. 그는 50세까지 무신론자로 살다가 본격적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가운데 55세가 되었을 때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5)라는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그 작품에서 톨스토이가 하고자 한 말은 러시아정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인생의 궁극적 해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 온전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당시 러시아정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가르쳤는가?’라고 묻는다면 교회는 단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해석할 뿐이었고 순종과 실천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고 수동적으로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 결과 교인들의 신앙은 관념적으로 흐르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은 등한시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러시아정교회는 교인들에게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실천하지 못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괴이한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해답을 찾지 못하고 삶과 죽음의 고뇌로 정신적 방황을 하다가 교회의 허위적 가르침을 제거한 순수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하여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 받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구원의 해답을 찾은 후 이렇게 고백했다. “5년 전부터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삶은 갑작스럽게 변화되었다. 나는 내가 이전에 원했던 것을 더 이상 원치 않게 되었고, 이전에 원치 않았던 것을 이제 원하게 되었다...오른편에 있던 모든 것은 왼편에 있게 되었고 또 왼편에 있던 모든 것은 오른편에 있게 되었다...선과 악이 그 자리를 바꿨다.”6) 1884년 출판된 톨스토이의 작품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책이 137년이 지난 코로나 상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무언가를 허물고 다시 세우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코로나는 세계의 전 영역에서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고 있는데 차제에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 믿음,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점검을 새롭게 하면 어떨까? 이번 고신세계선교후원교회협의회(이하 선후협)가 주관하는 포럼이 우리의 신앙을 근본부터 다시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코로나와 관련하여 일반 사회에도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다. 또 한국교회 각 교파와 선교단체들이 코로나와 관련하여 세미나를 열며 많은 자료집들을 만들기도 하였기 때문에 필자는 짧은 원고에 코로나 사태와 선교와의 관계는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본론의 제한된 지면을 통하여 선교적 교회에 대한 고찰, 선교적 교회 운동의 근본 개념을 밝힌 앨런 허쉬의 가르침, 국내에서 선교적 교회를 개척한 예, 전통적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방향을 전환한 예,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필자를 포함하여 다른 목회자들과 선교적 교회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려고 시도하는 예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교적 교회로 방향 전환을 시도함에 있어 장애물은 무엇인지 순서대로 논하기를 원한다.

 

본론

. 선교적 교회에 대한 고찰

 

1. 미국교회를 따라 양적 성장을 추구했던 한국교회 되돌아보기

한국교회는 세계의 어느 나라 보다 미국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훈 교수(풀러선교대학원 한국학부)는 북미교회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개의 갱신운동으로 소개한 바가 있다.7) 지면 관계상 제목만 나열하고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예수운동 (1960s~1970s) 교회성장운동(1970s~1980s) 구도자운동(1980~1990s)

이머징교회운동(1990s~2010s) 선교적교회운동(1990s~현재)

미국교회에서 일어난 모든 운동들 중 가장 한국교회가 열정적으로 따라한 것은 도날드 맥가브란으로부터 시작된 교회성장운동일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 담임목회자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 그것은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헌금의 액수가 늘어나는 한 담임목사는 사퇴의 압력을 받지 않고 안전하다는 것이다. 조금 더 리얼하게 표현하면 담임목사가 설교를 성실하게 준비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목회를 열심히 하더라도 교인의 숫자가 제자리걸음 하거나 재정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교인들은 담임목사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교회 주위의 환경이 목회하기에 더 열악해져서 어쩔 수 없이 교인들의 숫자와 재정이 감소하면 담임목사는 자연스럽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의 인적.재정적 통계가 줄어들면 모든 것이 담임목사의 무능력함이 주원인이라고 인식하는 교인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의 경쟁적인 물량주의가 한국교회 안에 얼마나 깊숙하게 자리를 잡았는지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 속한 교인들에게 좋은 교회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다음과 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을 것이다. 교회의 시설이 좋고, 주차장이 넓으며,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자녀들을 둔 부모들은 주일학교가 체계적으로 되어 있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담임목사의 경력이 화려하고, 설교가 자기의 마음에 들며, 교회 내에 분열이 없이 다투지 않으면 좋은 교회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러한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과연 성경이 말씀하는 건강한 교회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속한 교인들이 생각하는 좋은 교회와 일치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적 교회라는 주제는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선교적 교회라는 주제는 성경신학, 조직신학, 선교신학과 다 연관되어 있다.

 

2. 선교적 교회에 대한 종합적 이해8)

일반 교인들이 선교적 교회라는 단어를 들으면 해외선교와 관련되는 것인 줄 착각할 것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교를 열심히 합시다.’는 식의 해외선교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용어 자체를 바꾸어야할지도 모른다.

 

2.1. 선교적 교회의 태동 배경

선교적 교회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가장 먼전 떠오르는 인물은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이다. 그러나 그 용어는 뉴비긴이 창안한 개념은 아니다. 뉴비긴은 선교가 교회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자신이 이해하는 선교와 교회의 본질에 대해 논의하였을 뿐이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선교적 교회론’(Missional Ecclesiology)의 의미와 범주는 다르다. 전자는 선교를 교회의 본질과 중심적 과제로 삼고 선교적 정체성을 가진 교회 혹은 어떤 특성을 지닌 교회를 말하고, 후자는 전문적 신학용어로서 특정의 신학적 이론체계를 지칭한다. 선교적 교회론이라는 개념은 미국의 목회자와 학자들 사이에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8년 데럴 구더(Darrell L. Guder)와 그의 팀 프로젝트 동료들에 의하여 Missional Church: A Vision for the Sending of the Church in North America(Eerdmans, 1998)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에서 처음으로 ‘Missional Church’(선교적 교회)라는 용어가 출판물로서는 처음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의 연구는 교회성장학적 관점에서 교회란 단지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수행하시는 선교활동에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증언하는 공동체가 될 것인가 하는 과제에 대한 것이었다. 선교적 교회론은 북미에서 출발한 자성(自省)의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적 교회론의 출현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레슬리 뉴비긴이다.9)

레슬리 뉴비긴은 1936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선교사로 거의 40년을 인도 선교지에서 살다가 은퇴하여 1974년 고국 영국으로 돌아왔다. 은퇴선교사로 고국에 돌아오자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기지 역할을 하였던 영국사회가 선교지로 변한 것을 보면서 그는 충격에 빠지게 된다. 영국은 탈기독교 사회를 넘어 반기독교 사회가 되어 있었다. 선교지보다 더 선교지가 되어버린 영국은 세속적이고 다원주의적이고 복음에 반항하는 상황가운데서 복음은 사사로운 것이 되어, 교회는 사회와 문화속에서 복음을 공적인 진리(public truth)로 제시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10) 그는 새로운 선교 지역으로서의 유럽과 영국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영국의 지역교회가 복음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모든 선교지에서 물러난 현실을 보게 되었다. 특히 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지역교회나 사회영역의 선교는 너무도 쉽게 포기하는 것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꼈다. 뉴비긴은 이러한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은 기독교의 기초인 성경적 세계관과 거기서 나오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에 있다고 보았다.11) 레슬리 뉴비긴과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변화하고 있는 선교)을 쓴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데이비드 보쉬(David Jacobus Bosch, 1929-1992)의 영향을 받아 북미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The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복음과 문화 네트워크, 이하 GOCN)를 형성함으로써 시작되었다. GOCN에 관여한 신학자들이 1998년 처음으로 펴낸 책 제목이 데럴 구더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편집한 위에 언급한 책(Missional Church)이 나오면서 선교적 교회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GOCN 멤버들은 이 책을 통해 북미교회가 해외 선교를 통해 선교의 최선봉에 서있다고 자부할 것이 아니라, 지금 교회가 서있는 자리가 바로 선교지임을 자각하며,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을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별히 이들은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2.2. 선교적 교회의 의미 탐구

우선 선교적 교회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해외 선교에 힘쓰는 선교 지향적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개념이 아니다. 선교라는 말을 해외 선교사역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한국 교회의 관습 때문에 이런 오해가 발생한다. 선교적 교회론이란 오히려 이런 사역 지향적인 개념에 반대해서 교회의 본질이 선교적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는 것이고, 존재론적이며 신학적인 의미를 담은 용어이다.12)

이현모 교수(침신대)는 선교적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13) 선교적 교회는 해외 선교보다는 오히려 교회 갱신 운동에 더 관련되어 있고 교회의 성육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성에 근거해서 교회를 정의하는 것이다. 칼 바르트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actio Dei)이시고 이 하나님의 행위의 결과로 성부가 성자를 보내시고 이어서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이 보냄이라는 개념이 바로 선교의 원래 의미이다. ‘mission’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missio’에서 유래한 말로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missio Dei)이시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즉 교회를 보내셨다는 의미이다. 주목할 만한 성경구절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18-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0:21-23). 성부는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보내시고, 삼위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셨다. 요한복음의 말씀들을 살펴보면 우선 보내심과 선교의 근원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즉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본질적 사역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선교를 하나의 일, 또는 과업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교회는 보냄을 받은 존재로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은 교제(코이노니아)를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동시에 요한복음 2023절에서는 죄사함의 일을 세상으로 교회를 보내는 일의 중요 과제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현모 교수는 이어서 크레이그 밴 겔더의 책 선교하는 교회 만들기: 지역교회를 향한 도전14)의 내용을 소개하며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여섯 가지 교회관을 더 단순화시켜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후로 교회는 세 가지 유형을 거치게 된 것을 소개하였다. 첫 번째 유형은 제도화된 교회(established church), 두 번째 유형은 자발적 교회(corporate church)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은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이다. 이 세 유형들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유형은 제도화된 교회라고 불렀는데 다른 학자들은 기독교세계를 뜻하는 크리스텐덤(christendom)15) 개념의 교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크리스텐덤은 교회가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권력과 결탁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를 말한다. 그 최고점은 중세였고 종교개혁을 거쳐 18세기까지 이어져 왔다. 그리고 계몽주의 등장으로 사양길에 접어들어 결국 20세기 말엽에 사라지게 되었다.”16)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으로 말미암아 그 이전에 기독교는 핍박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걸고 믿음을 고백했으나, 로마 제국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핍박이 없이 자유롭게 교회의 회원 신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로마 제국 내에서는 선교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정치, 사회, 문화, 종교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교회는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 선교는 크리스텐덤의 경계를 넘어서 이방인에게 전도하는 일로 간주되어서, 교회의 많은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크리스텐덤적 사고의 교회는 점차 세 가지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1)사람들의 매력을 끄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좋은 프로그램, 웅장한 예배당과 음악에 호소하여 교회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오기를 기대한다. (2)교회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이분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교회 밖의 세상은 악한 곳이고 교회 안에는 거룩한 곳이며, 신앙생활은 악한 세상에서 벗어나서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 된다. 가정과 일터에서 영향을 미치는 삶은 신앙과 상관없고 교회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모든 신앙의 삶은 교회를 중심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3)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사제 중심적인 리더십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사제들이 더 높은 권세를 가지고 평신도들은 이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두 번째 유형은 제도적 교회에 대한 갱신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자발적 교회 개념이다. 이런 교회개념의 출발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교단들이 생기게 되면서 교회는 신앙생활의 목적에 부합한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주로 기능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개신교회는 교회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예배의 필요와 공동체에 속할 필요를 느껴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란 자기 개인의 신앙적 필요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교회는 이런 필요를 채워주는 기능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점차 개인의 사적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면서 기독교는 공적 영역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좀 더 효과적으로 신앙인들의 개인적인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가 건강하고 좋은 교회란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제자 훈련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감성적인 예배, 상담 등이 강조되고 전도와 선교는 교회 프로그램 중의 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많은 선교적 교회론 지지자들은 이런 교회의 특징을 축소주의라고 지적한다. 축소주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의 통제 가능하고 관리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유혹을 말한다. 데렐 구더에 의하면 복음은 개인 구원에 초점을 맞춘 메시지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복음전도와 제자화 과정은 이런 구원을 다루는 영적이고 종교적인 연습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구원을 통하여 얻는 유익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증인이 되는 것이어야 하는데, 죄 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축소되어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게 되었다. 그러자 복음의 의미와 복음의 유익을 전하는 선교의 의미도 따라서 축소주의 성향을 보이게 되었다. 결국 기존 기독교권 내에 존재하는 교회들은 외국 선교만을 생각할 뿐이지 자기의 지역적 영역 안에서는 선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선교는 교회 기능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선교의 주체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 내부의 여러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서 선교를 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교회가 원하면 선교를 최우선 순위에 둘 수도 있고, 원하지 않으면 아예 선교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복음은 공적 진리로서의 공공성을 상실했다고 뉴비긴은 지적한다. 교회와 신앙은 개인주의 문화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신앙은 사유화되어 개인적 경건으로 축소되었다. 물론 과격한 에큐메니컬 그룹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교회를 배제해버리고, 그리스도 중심적 구원론을 벗어나려고 시도하며, 개인의 구원에는 무관심하며, 인권 문제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의 교회론은 자발적 교회 유형의 틀 안에 갇혀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할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인 선교적 교회는 앞의 유형들이 가진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등장한 개념이다. 교회는 여러 문제들을 발견하면 대안적 프로그램들을 제안하려고 하였지만 잠시 후에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킬 뿐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대안적 프로그램의 제시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의 기능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그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로서 선교를 회복하자는 것이 선교적 교회론이다. 선교적 교회는 교인들 중 몇몇 사람들에게만 선교를 일임하지 않고 모든 교인들이 보내심을 받은 자로 인식을 한다.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고 선교보고를 받는 곳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간증하는 곳이다. 선교를 국내와 해외로 지역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사회나 우리 사회도 이미 이교도와 세속화의 영향으로 선교의 현장이 되었다. 선교적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선교를 몇몇 사람에게 일임하기 보다는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보내심을 받은자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 교회의 목적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나라를 섬기는 것이라면 회심과 구원은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삶의 현장에서 복음이 구현되어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

 

2.3. 선교적 교회 논의의 필요성17)

서구교회는 한때 크리스텐덤이라고 불리며 사회의 중심을 차지했으나 지난 백년 사이에 심각한 퇴보를 경험하며 지금은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세속화된 서구 기독교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기독교의 핵심 세력은 남반부로 옮겨가고 있다. 서구교회가 이렇게 쇠퇴한 원인은 무엇인지 다각도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두고, 과학에서 오는 지식은 공적 진리(public truth), 종교나 신앙에서 오는 지식은 사적 진리(private truth)로 분리시켰다. 이처럼 지식의 이원화가 일어남으로 공적 진리는 모두가 인정하고 공유할 수 있지만, 사적 진리는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되었다. 따라서 서구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 진리로 선포하기에는 무기력하게 되었고, 신앙생활은 사유화되어 단순히 개인적 영성으로 축소되고 대신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 고립된 존재가 되었다. 이제는 크리스텐덤의 위엄은 존폐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교인들의 헌신도는 떨어지고 교회 안에서 조차 제자도는 강조할 수 없게 되었고 예배의 감동은 사라졌다. 이제 교인들은 교회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고려하는 종교적 소비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어두운 세상과 싸울 힘을 잃고 동성결혼의 허용, 종교다원주의, 맘몬주의를 수용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 틈을 비집고 기승을 부린 것이 교회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물량주의, 긍정적 사고와 기복 신앙(health & wealth gospel)을 통하여 죄는 지적하지 않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우리가 익히 들어본 휴스턴에 위치한 레이크우드교회(Lakewood Church)의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이다. 그의 저서인 잘되는 나긍정의 힘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사람이 잘 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는 것이 마치 복음인양 오해하게 만들었다. 생명력을 잃어가며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마당에 기복주의와 번영신학은 갈급한 현대인들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심각하게 질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서구교회 보다 나은가? 한국교회도 벼랑 끝에 몰린 것은 서구교회와 비슷한 형편이다. 2020124일 목회데이터연구소 주간리포트에 따르면 충격적인 데이터를 접하게 된다. 본인이 믿는 종교에 대한 호감도에 있어서 천주교인의 천주교 호감도’ 76, ‘불교인의 불교 호감도’ 71, ‘개신교인의 개신교 호감도’ 62점으로, 개신교인의 자기 종교 호감도가 가장 낮게 나타나, 종교의 자부심 측면에서 타 종교에 비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무종교인의 종교 호감도 역시 개신교21(불교 49, 천주교 46)으로 이슬람교(16)를 제외한 주요 종교 중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뉴스에 기독교와 관련된 부정적인 기사가 뜰 때마다 댓글에 한국교회를 폄하하는데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는 기독교대신 개독교라는 신조어를 사용한다. ‘개독교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천주교와 구분하기 위하여 개신교 기독교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욕을 심하게 할 때 자를 붙인다. 예를 들어 상황이 엉망진창이 되었을 때 개판이라는 단어를 쓴다. 일반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비하해서 개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상이 교회를 불신하여 교회를 향한 기대와 요구를 포기하였기 때문에 듣기도 민망한 개독이라는 말로 기독교를 폄하하는 것이다.18)

한국교회는 공공성을 잃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초유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틀을 바꾸어야 하는 수준인 패러다임 쉬프트가 아니라, 기초를 허물고 새로 지어야 하는 패러다임 트랜스포메이션을 강요받고 있다. 교회가 존재 목적을 심각하게 묻지 않고 외형적 성장과 물질적 축복, 성장지향주의, 교회의 건강성을 신자의 수, 헌금의 정도, 건물의 크기 등으로 측정하는 자본주의적 성공제일주의는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대형교회의 세습은 재벌과 비슷하게 공적 공동체인 교회를 사유화시킴으로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질책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 2018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교회 전체 교인의 약 20%에 해당하는 200만 명19)가나안성도들을 양산하고20) 이단의 세력들에 교인들을 잃어버린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질문해 보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형편 가운데 한국교회는 진정한 복음의 회복과 교회 공공성의 회복 및 하나님나라에 입각한 성경적 교회론의 회복이 필요한데 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대안으로 선교적 교회 운동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2.4. 선교적 교회의 정의21)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선교적 교회 운동은 해외 선교나 국내 선교를 더 많이 하자는 운동이 아니다. 선교 중심적 교회 혹은 선교 지향적 교회는 선교를 강조하고 선교사를 많이 후원하고 교회가 선교의 주체가 되어 열심히 선교를 위해 헌신한다. 선교예산을 해마다 올리고 교회의 여러 부서가 선교를 위해 서로 희생하며 협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교회를 선교적 교회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교회가 선교에 큰 비중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선교가 교회의 여러 사역 중 하나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선교의 주체가 교회라는 인식이 강할수록 교회는 선교를 통제하고 필요에 따라 선교에 들어가는 노력을 늘리거나 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선교적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재검토하고 새롭게 하자는 것이다. 선교와 교회의 관계를 새롭게 하자는 것인데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한다. 삼위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신다(20:21). 죄로 타락한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교회를 보내셔서 사용하신다. 삼위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동참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그분의 사역에 동참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라는 것이다. 신학자 에밀 부루너(Emil Brunner, 1889-1966)의 말처럼 불이 타오르며 존재하듯, 교회는 선교함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교회가 자기중심적 패러다임을 바꾸어 세상을 섬기자고 절실히 호소하는 운동이다. 또한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하자는 것인데 교회를 위해 선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올바른 성경적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선교적 교회는 헌신된 자를 파송하고 온 성도가 후방에서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성도가 세상으로 파송을 받아 선교적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사역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역으로 반드시 연결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송민호 목사(토론토영락교회)는 선교적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선교적 교회란 온 성도가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아 구속적 삶을 살며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동참하는 교회이다.” 이 문장의 세부 설명을 송민호 목사는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1)온 성도란 일부 헌신된 성도만이 아니라 전체 성도가 참여하는 교회를 말한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으로 세상을 섬길 수 있도록 훈련하여 파송하는 것이 필요하다. (2)세상 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은 교회의 사도성을 회복함을 말한다. 교회 담장 안에서 성도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서로 격려하고 양육을 받아 교회 안에서도 섬기지만, 성도가 치러야할 영적 전투인 실전은 교회 담장 밖인 세상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끊임없는 교회 안의 사역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다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필요한 사역을 십시일반으로 성도들이 나누어 하도록 한다. 대신 성도의 비축된 시간과 에너지는 직장과 지역사회를 사역지로 생각하여 그곳에서 섬기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3)구속적 삶을 살며란 회복의 삶을 말하는데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했다는 전제조건을 깔고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해 파괴된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모든 피조물 사이의 회복을 말한다. 인간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의도적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영적 등 모든 차원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화해와 회복의 삶을 살며 미움과 분열로부터 해방을 누리고,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 언약 백성에게 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4)하나님의 선교란 선교의 주체가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미 세상에서 회복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을 인정하고 교회가 스스로 일을 찾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겸손히 참여하여 쓰임 받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우선 선교가 우리의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교는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니고 선교는 철저히 하나님의 일이고 그분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시는 것이다. 다음은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고, 또 이 땅에서 성육신적으로 사신 겸손함을 가지고, 성령의 음성을 따라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나와 다시 세상으로 들어간다. 주일 예배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고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도의 교제로 위로 받으며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자리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려고 한다. 이런 삶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내적 움직임과 세상을 향한 외적 움직임이 있다. 성도는 세상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위해 노력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신의 안정과 평안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이다. 로잔 언약(1974)은 이 부분을 잘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그리스도 역시 그의 구속받은 백성을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이 소명은 그리스도가 하신 것 같이 세상 깊숙이 파고드는 희생적인 침투를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울타리를 헐고 비그리스도인 사회에 스며들어가야 한다. 교회가 희생적으로 해야 할 일 중에서 전도가 최우선이다. 세계 복음화는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할 것을 요구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목적의 바로 중심에 서 있으며,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하나님이 지정하신 수단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전하는 교회는 스스로 십자가의 흔적을 지녀야 한다(6항 상반부).22)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셨으므로, 그 보내심에 응하기 위해 희생적 침투를 해야 한다. 교회가 복음을 들고 의도적 개입을 하려면 먼저 교회가 비장한 각오를 하고, 교회의 울타리를 헐고, 세상으로 침투하려면 십자가의 흔적을 스스로 져야 한다. 성도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는 편한 곳이라기보다 사명감으로 불타는 곳이다.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성도들이 모여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고, 또다시 힘을 얻어 세상으로 출발하는 곳이다. 즉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도성23)을 실천하는 것이다. 송민호 목사는24)교회의 유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 중에서 지금은 사도성의 회복이 강조되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가 없어졌을 때 교인들이 슬퍼하는 교회라기보다는 지역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과 단절되거나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개입을 해야 한다...선교적 교회는 모이는 숫자가 아니라 교인 각자가 파송된 곳에서 얼마나 선교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기준으로 교세를 측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임을 명심하고, 단순히 교회생활과 개인의 영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교회 밖의 사회의 영성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는 온 성도가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확신 아래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를 삶으로 보여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2.5. 선교 지향적(중심적) 교회와 선교적 교회의 비교

송민호 목사는 선교를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여기는 선교 지향적 교회의 선교관과 선교란 삼위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사역이라고 생각하는 선교적 교회의 선교관을 아래의 표로 비교하였다.

 

<1. 선교 지향적 교회와 선교적 교회 비교1>25)

송기태 선교사(인터서브 코리아 교회 관계팀)가 선교적 교회와 선교 중심적 교회의 6가지 요소를 구분해서 그 둘의 개념이 어떻게 서로 다른지를 제안한 내용을 필자가 아래와 같이 표로 요약하였다.26)

<2. 선교 지향적 교회와 선교적 교회 비교2>

2.6. 선교적 교회의 잘못된 강조로 말미암은 위험성

한국교회는 기독교권에서 비기독교권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선교적 교회를 잘못 강조하면 종래의 선교 개념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지역 자체가 선교지가 된다는 생각만을 고집하다 보면 타문화권 선교(cross-cultural mission)에 대한 중요성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선교적 교회를 실천하려고 하다가 타문화권 선교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할 것이다. 실지로 해외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이 부분을 매우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계속)


▲ 미주

1) 진주삼일교회에서 2021.2.1.()~3() 23일간 .신약에 나타난 선교(적 교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2021년 한국동남성경연구원 윈터세미나에서 필자는 선교적 교회라는 제목으로 기조강연을 하였다. 그 원고가 선교적 교회에 대한 이론 중심의 강의였다면 이번 발표는 선교적 교회의 실천적 적용에 초점을 둔다. 대신 원고의 일부분은 중복됨을 미리 밝힌다.

2) 이 책은 60쇄 이상, 120,000권 이상 발행이 되었다.

3) 손현보, 목사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서울: 도서출판 누가, 2012), 13-21.

4) 그의 본명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이다.

5) 톨스토이,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홍창배 역. (서울: 바다출판사, 2020), 7-344.

6) 톨스토이,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7-8.

7)

http://m.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290(2020.11.28. 접속)

8) 필자가 지금부터 논의하는 중요한 내용은 2011216~18일까지 판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제5회 설악포럼에서 발표된 것들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설악 포럼은 20048선교한국대회 기간 중 아침마다 열렸던 선교사 모임에서 그간 한국 선교가 답습해온 서구 선교의 틀에서 벗어나 변화된 선교 환경에 맞는 선교의 구조를 모색해 보자는데 의견을 모으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2005년 처음으로 설악포럼을 열면서 서구 선교의 유산과 현재의 선교적 상황에 대한 다각도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5회 설악포럼의 주제는 선교적 교회론이었는데 기존의 교회론에서 간과해온 교회의 선교적 본질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9) 황영익, 레슬리 뉴비긴과 칼빈의 선교적 대화(의정부: 도서출판 드림북, 2015), 46-48.

10) 지성근, “교회의 존재양식을 묻는다: 선교적 교회론” in “5회 설악포럼 자료집” (http://missionpartners.kr/main/gmb_board_view.php?no=1140&page=2&search=&page_no=51&category_no=&admin_page=&site_Number=1&GM_mobile=&sm_no=&search_option=&cls=) (2020.11.28. 접속)

11) 신현수, 선교적 교회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1), 173.

12) 이현모, “교회론의 변천을 통해 본 선교적 교회론 이해” in “5회 설악포럼 자료집http://missionpartners.kr/main/gmb_board_view.php?no=1143&page=2&search=&page_no=51&category_no=&admin_page=&site_Number=1&GM_mobile=&sm_no=&search_option=&cls= (2020.11.28. 접속)

13) 이현모, “교회론의 변천을 통해 본 선교적 교회론 이해

14) Gelder, C. V. 선교하는 교회 만들기: 지역교회를 향한 도전. 최동규 역. (서울: 베다니출판사, 2003), 77-113.

15) 이 단어는 ChristKingdom의 합성어이다. 영어 발음은 크리슨덤이지만 이미 학자들이 크리스텐덤이라는 단어를 쓰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크리스텐덤’(Christendom)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국가나 사회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기독교세계(Christian World)라는 말과 동의어이다(https://www.facebook.com/hwpbooks/posts/ 2758737220809019/2020.12.2. 접속)

16) Frost M. & Hirsch, A. 새로운 교회가 온다, The Shaping of Things to Come. 지성근 역.(서울: IVP, 2009), 38.

17) 송민호,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전통적인 교회에서 미셔널 처치로(서울: 도서출판 나눔사, 2020), 38-48.

18) 양광모, 고백 에클레시아: 6평 카페의 기적 같은 이야기(경기도 구리시: 선율, 2018), 28-30.

19) 21세기교회연구소와 한국교회탐구센터는 2018104~16일 가나안성도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를 실시해서 826명의 응답을 얻었다. 기독신문, 20181129(http://www.kidok.com/ news/articleView.html?idxno=112706)(2020.12.1. 접속)

20) ‘가나안성도는 교회를 안나가에서 나온 신생어이다.

21) 송민호,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전통적인 교회에서 미셔널 처치로, 52-56. 114-121.

22)

https://www.lausanne.org/ko/content-ko/covenant-ko/lausanne-covenant-ko

(2020.12.1. 접속)

23) 오해하면 안되는 것은 사도성신사도운동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신사도운동은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도적 특성 중 은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 세상에 드러나야 할 하나님나라의 역동성 중 극히 일부분인 이적, 특별한 은사나 신비한 능력을 강조한다. 개인의 아픔이나 치유에 치우친 운동이 신사도운동인데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사도로 부르고 그 운동은 사도성의 참된 의미의 풍성함을 축소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24)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9828(2020.11.28. 접속)

25) 송민호,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 전통적인 교회에서 미셔널 처치로, 120.

26)

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2823(2020.11.28.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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