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성 (전, 고려신학대학원장)
김순성 (전, 고려신학대학원장)

요즘 우리 사회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비상식이 난무하고 거짓이 진실처럼 둔갑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유튜브 동영상의 보편화로 온갖 거짓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면서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여기에 이성과 합리, 순리(順理)와 상식이 사라지고 독선과 아집, 독단과 편견이 그 집단에 독버섯처럼 퍼져간다. 부끄럽게도 비상식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춤추고 있다. 아니 부끄러움도 모른 채 오히려 세상을 앞지르고 있다. 최근 교단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자괴감이 든다. 총회가 결의한 것을 비웃듯 제멋대로 행동해도 정당한 치리가 작동되지 않는다. 교단 전통과 헌법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무용지물일 뿐 제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에 바쁘다. 총회와 노회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지고 윤리가 장바닥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웃 교단에서나 보던 일이 이제 고신 교회 안에서도 당연한 일이 되고 있다. 비상식, 몰상식이 누룩처럼 퍼지고 있다.

최근 고신포럼의 이름으로 유인물이 전국교회에 배포되었다.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 건설, 고신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개최한 포럼 내용이었다. 발제 내용 중에는 시의적절하면서 유의미한 것도 있다. 인구변화 추세에 근거하여 향후 15년 후 교회학교의 소멸에 관한 통계 분석자료라든지 현장성 있는 목회자 후보생 훈련을 위한 실천적 대안 제시 그리고 코로나 시대의 전도전략 등은 교단의 미래를 향한 깊은 우려와 함께 건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총회 차원에서 후속적인 논의와 시행이 뒤따라야 할 중요하고 시급한 주제라 생각된다. 발제문 속에는 눈먼 고신, 빼앗긴 고신이라는 제목의 방대한 분량의 발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얼핏 제목만 보면 교단을 향해 무언가 예언자적 내용을 시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주제에 걸맞게 자기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오늘의 고신 교회를 향해 무겁고 따끔한 질책과 자기반성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어떻게 이런 수준의 내용이 고신포럼의 이름으로 발표되고 전국교회에 유인물로 버젓이 배포되고 있는지 참으로 의아하다.

누구든지 자신이 속한 교단을 향해 자기주장이나 소신을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내용과 수준, 그리고 논의의 장이다. 적어도 포럼이라면 최소한의 논리와 격식, 수준을 갖춘 글이어야 한다. 또한, 그 주장이 객관성과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주최 측이 정한 주제와도 맞지 않고 기본 논리와 상식에도 못 미치는 수준의 발제 내용에 누가 귀를 기울이며, 여기에 무슨 설득력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더 심각한 것은 그 주제가 고신을 앞세우고 포럼이라는 공론의 장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포럼의 주제가 공적인 성격을 띠고 공론화될 때 거기에는 중대한 책임이 따른다. 발표되는 내용이 교단의 위상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과 고신의 정체성은 아무나 뛰어들어 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적어도 그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신학자가 동원되어야만 비로소 책임 있는 논의가 가능한 일이다. 고신 교회의 위상이 걸려있는 그 큰 주제를 그 분야를 전공한 신학자도 아닌 일개 목회자에게 맡겨 논의하게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게다가 최소한의 양식도, 논리도, 윤리성도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수준의 글을 전국교회에 배포하는 것이 과연 상식 있는 집단의 모습인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포럼이며, 무엇을 위한 포럼인가? 혹시라도 이웃 교단이 이 글을 본다면 고신 교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하다.

고신의 정체성을 아무나 함부로 논해서는 안 된다. 그 실체를 제대로 알고 책임 있게 논해야 한다. 해방 직후 장로교 내에서 전개된 고려파 진리 운동은 그 핵심이 신학이 아니라, 영성이다. 신사참배에 관한 신학 논쟁이 아니라 바른 신앙과 삶이 동기가 되어 시대정신과 싸웠던 영성 운동이다. 신사참배 강요의 위협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죽기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했던 그 시대 남은 자들의 몸부림이 고려파 진리 운동이요, 그 신앙과 영성 위에 세워진 신학교가 고려신학교이다. 진정으로 한국교회다운 신앙과 신학을 원했기에 해방 직후 신사참배로 무너진 장로교단 신학교를 재건하면서 그 이름을 조선(朝鮮)’신학교가 아닌 고려(高麗)’신학교로 명명한 것이다. 바른 신학, 바른 생활, 바른 교회를 지향했던 고신(高神)의 선배들이 목숨 걸고 추구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라는 고신 이념을 예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 경외의 태도를 주목해야 한다. 적어도 초창기 고신의 선배들은 신학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하나님 앞에서말하고 행동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다. 작은 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회개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 정신으로 일제 신사(神社) 앞에 무릎 꿇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한국교회를 향해 당당히 회개를 외쳤다. 그때 교회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면 한국교회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아는 법이다. 개혁주의, 정통 신학을 앵무새처럼 외친다고 고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개혁주의 정통 신학을 말하는 자가 없어서 한국교회가 이 모양인가. 신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삶이 따라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이 따르지 않는 자는 그 누구도 고신을 논할 자격이 없다. 그런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신학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훼손할 뿐이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가. 누구든지 포럼을 앞세워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세력 확장을 도모하는 일이 적어도 고신 교회 안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런 행위 자체가 고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한다. 겉으로 바른 신학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그 모임이 정치화되고 교권과 결탁하여 교단 신학자들을 향해 신학 사상검증 운운하는 순간 이 땅에 고신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고신 교회는 정신 차려야 한다. 소위 개혁이든 보수든 목회자이든 신학자든 누구를 막론하고 고신을 말하려는 자는 먼저 자기 모습부터 살펴야 한다. 오늘의 고신 교회가 회개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처음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신을 말할 자격이 있고, 캄캄한 밤을 더듬고 있는 한국교회와 이 땅에 소망의 빛을 던질 수 있다.

 
 
※ 기고자의 '나의 주장'은 본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이 글은 기독교보 5월 15일자 1144호 2면 시론에 게재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필자가 코닷에 제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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