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북한에 사는 박 선생은 돈을 좀 더 벌기 위해 남한 DVD를 팔다가 당국에 붙잡혔다. 그때 박 선생의 남편 김 선생은 중국으로 도주했고, 당에서 일하던 다른 가족들은 박 선생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사건 담당자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보안상 이들의 이름은 생략한다.

박 선생이 석방되자 북한으로 다시 돌아온 남편 김 선생은 하나님과 성경에 관해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에서 만난 한 가족이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김 선생은 가족과 함께 식사할 때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때 나는 남편이 미쳤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박 선생은 한국 VOM(이하 순교자의 소리) 사역자에게 전했다.

 

담대한 믿음으로 전도한 김 선생은 결국...

박 선생 말에 의하면, 김 선생은 자신의 담대한 믿음으로 인해 온 가족이 가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20명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

"당시에는 남편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내 사건이 겨우 종결됐는데, 왜 또 식구들을 위험에 빠뜨리려고 하는지 말이에요"

결국 누군가가 김 선생의 활동을 당국에 신고했다. 어느 날 밤, 당국자들이 부부의 집에 찾아와 두 사람을 체포했고, 김 선생은 곧바로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 박 선생은 남편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박 선생은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 나는 아직도 몰라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한 누가 남편을 신고했는지도 결코 알 수 없었다.

두 부부가 체포되었을 당시, 박 선생의 삼촌이 북한 보위부 요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박 선생이 남편의 기독교 신앙 때문에 강제수용소에 보내질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삼촌은 조카가 노동 교화소로 가도록 도와주었다.

박 선생의 감방 동료 한 사람이 감방 벽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쓰고는 박 선생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다. (당시 상황을 재연한 사진).
박 선생의 감방 동료 한 사람이 감방 벽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쓰고는 박 선생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다. (당시 상황을 재연한 사진).

중국 감옥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다

노동 교화소에 있은 지 6년이 넘었을 때, 마침내 박 선생은 석방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혹독한 환경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더 열악한 상황을 맞이했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석방된 후, 박 선생은 탈북을 결심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머문 지 한 달 만에, 박 선생과 함께하던 탈북민 일행은 경찰에 신고를 당하고 말았다.

경찰이 나타났고, 시민권이나 비자 같은 신분증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 감옥에 끌려갔어요.”

감옥에 있는 동안 박 선생은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구금되어 있던 조선족 여성을 많이 만났다.

"우리가 다시 북송되었을 때, 교회나 기독교를 접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우린 틀림없이 죽었을 겁니다. 그래서 조선족 여성들은 저와 함께 지냈던 한 달 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많아요.”

박 선생이 말대로 시간이 지나자 조선족 기독교인 여성이 치약을 손에 쥐고 감방 벽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썼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처음 본 거라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그 조선족 여자가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소재 한국 순교자의소리 사무실에서 순교자 연대표를 어루만지며 남편을 기억하는 박 선생.  
서울 소재 한국 순교자의소리 사무실에서 순교자 연대표를 어루만지며 남편을 기억하는 박 선생.  

 

남편이 걸었던 길을 걷고 싶어요

이후 석방된 박 선생은 한국에 있는 조카들에게 연락했고, 그들은 브로커를 주선해 박 선생이 한국에 건너오도록 도왔다. 그녀는 한국에서 다른 탈북민을 통해 순교자의 소리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곧이어 순교자의 소리가 운영하는 유티(Underground Technology 기초 제자훈련 학교)에 등록했다. 순교자의 소리 현숙 폴리(Hyun Sook Foley) 대표에 따르면, 유티학교는 1년 과정의 프로그램으로, 북한어로 된 조선어 성경을 사용하여 탈북민들이 기독교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북한 지하교회 방식으로 훈련하고 있다. 현숙 폴리 대표는 박 선생의 고백을 이렇게 전했다.

남편이 걸었던 길을 걷고 싶어요. 남편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입니다.”

박 선생은 남편이 처음 기독교 신앙을 전해주었을 때 그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당시 나는 남편과 똑같은 눈으로 보지 못했어요. 그때 내가 지금처럼 영적인 눈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 내 관심은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사랑하는 조국에 충성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전해준 복음을 받은 지 10, 박 선생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박 선생은 많은 탈북민이 순교자의 소리 유티 학교에서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코로나 이전에 촬영한 사진)
박 선생은 많은 탈북민이 순교자의 소리 유티 학교에서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코로나 이전에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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