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기념 주일 설교문

 

순교의 믿음을 지켰으나 발람의 유혹에 빠진 버가모 교회 

순교자 기념 주일 설교문

2:12-17

 

제70회 고신 총회장 박영호 목사
제70회 고신 총회장 박영호 목사

 

서론: 순교자 기념 주일에 대하여

지난 69회 고신총회에서 6월 둘째 주일을 순교자 기념주일로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간단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잘못 이해하면 이 날이 순교자를 기리고 심지어 칭송하는 날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종교개혁은 성인을 기리는 모든 날을 폐지하였습니다. 모든 성인을 축하하는 만성절에 루터 선생님이 면벌부 교리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것은 이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우리 고신교회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날이 성인숭배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고신교회는 역사적으로 순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입니다. 비록 순교자들을 지나치게 숭상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을 아예 무시하는 것도 교회에 큰 해를 주게 됩니다. 서방교회의 첫 교부라고 할 수 있는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이 땅에 심겨져서 오늘날 고신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 고신 교회가 지나치게 순교신앙을 강조했다면 요즘에는 여기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순교자들의 신앙을 어떻게 제대로 전수할 것인가입니다.

순교자 기념 주일은 순교자를 찬양하는 날도 아니고 다른 교단에 비해 우리가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날도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을 기억함으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점에서 버가모 교회는 한국교회에 큰 모범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안디바는 주님을 증거하다가 죽음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안디바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가 거의 없는데 전승에 따르면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기 때문에 뜨겁게 달구어진 거대한 놋그릇 속에서 튀겨 죽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순교자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였지만 그들에게도 큰 결점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발람의 교훈을 따라 유혹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를 향하여 우리 주님께서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충성된 증인(순교자)”

버가모는 산 위에 지어진 거대한 도시입니다. 오늘날 이 곳에 가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이용해야 합니다. 산 밑에서는 별로 보이는 것이 없지만 산 위에 가면 정말 어마 어마한 유적지를 볼 수 있습니다. 주위가 모두 가파른 절벽이나 산허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래서 고대 시기에 한 번도 이 도시는 정복된 적이 없습니다. 가서 보시면 어떻게 그 높은 곳에 거대한 돌을 가지고 와서 그곳에 도시를 세웠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버가모는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버가모 왕국은 소아지역 전체를 다 다스릴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문화도 발달했는데 이곳에 세계 제일의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최대의 도서관이 있었는데 그곳이 불타면서 버가모 도서관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는 버가모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종이의 원료가 되는 파피루스 공급을 중단시켰는데 버가모는 여기에 맞서서 파피루스를 대신할 대체인 양피지를 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버가모는 최고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 도시는 결코 좋은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도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여기서 라는 말은 임금이 앉는 보좌를 가리키고, “거하는 곳은 일시적인 거주자기 아니라 영구적인 거주지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버가모는 사단의 도시였고 사단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하게 나타나는 곳이었습니다. 반면에 버가모 교회는 이제 생겨난 지 얼마 안 되는 신생교회였습니다. 숫자로 따지면 아주 작은 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연약한 자들이 거대한 사단의 세력이 지배하는 곳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들 중에 안디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고신실하게 그분을 증거하였습니다. 여기서 충성된 증인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표현은 15절에서 예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 구절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십니다.

증인 혹은 증거라는 단어는 요한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충성스러운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메시지를 하나도 남김없이 사람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증인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헬라어로 증인을 마르투스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순교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안디바도 주님에 대해서 증거하였고 그 증거 때문에 순교하였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따름

버가모 교회는 정말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사단의 거대한 세력 아래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절을 참조해 볼 때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버가모 교회는 믿음의 싸움을 싸울 수 있었습니다.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증거하는 교회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순교를 각오한다고 해서 그 교회가 최고의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버가모 교회의 신실함을 칭찬한 후에 우리 주님은 그들의 죄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발람에 관한 이야기는 민수기 22장부터 25장까지에서 자세히 진술되어 있습니다. 4장이나 되는 길이가 보여 주듯이 발람 사건은 민수기에서 매우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부수고 마침내 모압 땅에 이르렀습니다. 모압 왕이었던 발락은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발람이라는 거짓 선지자를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어서 발락 선지자를 책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발람은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넘어뜨릴 술책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미인계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장소는 싯딤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모압의 큰 신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제사를 성대하게 베풀고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압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반하였고 신전에서 그들과 음행을 즐겼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었고 신전에서 그들이 하는 대로 절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크게 진노하여 그들에게 염병을 일으켰습니다. 무려 24,000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백성들의 두령들을 잡아서 성막 앞에 목을 매달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압 신이었던 바알브올에게 유혹된 자들을 찾아서 죽이라고 명하였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슬픔에 잠겨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시므온 족장이었던 시므리가 미디안 여인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고스비라는 미디안 종족의 두령의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거하는 막에 들어가서 모압 땅에서 했던 그대로 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불신자의 풍습을 밖에서 배우고 나서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칼을 뺀 사람이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였습니다. 바로 막에 들어가서 창으로 그 남자와 여자의 배를 뚫었습니다. 그제야 염병이 그치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었고 그것을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었습니다.

발람의 예에서 보듯이 우상숭배와 음행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버가모에는 거대한 신전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주기적으로 큰 향연이 벌어졌습니다. 술과 음식이 들어간 후에 춤과 음악이 나왔고 그다음으로 퇴폐적인 행위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파티가 벌어질 때마다 초청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그것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특별히 나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것을 추천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그룹들이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니골라 당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 한 분파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점에서 버가모 교회와 에베소 교회는 비교가 됩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미워했고 이 때문에 우리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책망하시는 주님

버가모 교회를 주관하시는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비느하스와 같이 용맹스러운 전사입니다. 그에게는 날선 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선 검이 입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16절에도 그대로 등장합니다. “그 오른손에는 일곱 별(일곱 교회의 사자)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여기서 말하는 검은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검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아주 생소한 것만은 아닙니다. 에베소서 617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절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하지만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라는 것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은 이 지상에 계실 때와 같이 당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은 상대방을 쓰러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으로 누구와 싸우십니까? 회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만, 여전히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음행과 우상숭배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우리 주님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의 중요한 기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설교는 분명히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기는 그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을 통해서 만나라는 것은 생명의 떡을 의미하고 주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의 말씀은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의 말씀은 그야말로 죽음의 칼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그 검으로 싸우실 때 누가 감히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의 검 앞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방법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회개의 시간을 많이 주지 않습니다. 주님은 칼을 들고 속히 임하겠다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음행과 우상숭배의 죄는 쉽게 교회 안에 퍼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두면 누룩처럼 교회 전체에 퍼질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비느하스를 기억하게 됩니다. 비느하스는 아론의 손자이기 때문에 아론의 대를 이어가야 할 대제사장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통곡하고 있는데 미디안 여인을 이스라엘 안에 끌어 들여서 쾌락을 즐기려는 것을 보고 비느하스는 전혀 기다리지 않고 창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들을 처단하였습니다. 그 결과 염병이 그쳤습니다.

좌우의 날선 검이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 공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전사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든든하지 않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해서 싸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로 만드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의 사역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결론: 순교정신은 회개운동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님과 같이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충성스러운 증언을 할 때 우리의 대적들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버가모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사단의 영향력이 곳곳에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죽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상당한 손해는 감수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증인으로 사는 삶이고 이 점에서 버가모 교회의 지도자 안디바는 아주 귀중한 모범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숭배와 순교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일제강점기의 우상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우리의 선배들을 순교를 감내하였습니다. 오늘날 그와 같은 우상숭배는 없지만 수많은 대중매체들이 이방 신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대중음악이나 동영상을 통해서 음란한 문화들이 우리의 자녀들과 청년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서로 경쟁하면서 더욱더 자극적인 음란한 문화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순교의 전통을 가진 교회라고 하더라도 발람의 유혹에 빠진다면 주님의 엄중한 심판으로부터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고신교회는 진리운동이자 회개운동에 기초해 있습니다. 회개는 전 인격이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인격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세상의 유혹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성을 더욱더 미워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더욱더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복음의 약속이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기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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