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극의 버마족과 카렌족: 카렌의 사도 코타뷰

 

전호진 교수(미얀마개혁장로교 신학교 학장)
전호진 교수(미얀마개혁장로교 신학교 학장)

카렌족 지도자의 주장에 따르면, 미얀마 사태는 장기화할 전망이다. 현 미얀마 사태는 약 200년 전의 미얀마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 버마족 정부군과 대치하는 가장 강력한 종족은 카렌족으로, 오랜 역사의 부산물로 결코 단순하지 아니하다.

버마족의 노예 카렌족

카렌족은 버마족의 노예로 엄청난 수난을 당하였었다. 카렌족 사도 코타뷰 저자 메이슨(Francis Mason, The Karen Apostle: Memoir of Ko Tha-Byu, 1843: 미국 침례교 선교사로 고타뷰와 함께 선교한 증인임)의 저서를 일부 소개한다:

선교사 보드만이 카렌족을 처음 대하자, 한 카렌족 지도자는 자기들은 천한 종족 중 더 천한 종족으로 소개하였다고 한다. 19세기 초기 미얀마와 태국 간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카렌족은 미얀마가 이기면 미얀마의 노예가 되고, 태국이 이기면 태국의 노예가 되었다. 특히 미얀마의 노예가 되면 가족들도 각각 흩어져 끌려가서 서로 볼 수 없었다. 남자들은 보트 젓는 일부터 꿀 밀랍 채취, 도로 청소 등 험한 일에만 동원되었다. 여자들은 강제로 추행당하고 창녀로 팔렸다. 미얀마 귀족들은 그들에게 코끼리의 어금니, 코뿔소 뿔, 버마족이 좋아하는 모든 종류의 채소를 바치라고 요구하였다.

최근 미얀마 내 카렌 난민들: 집 읽은 난민들 갈수록 증가
최근 미얀마 내 카렌 난민들: 집 읽은 난민들 갈수록 증가

 

책 가지고 왔어요.

이러한 고난의 카렌 인들에게 이상하게도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 창세기의 이야기와 너무나 유사하다. 문자가 없음에도 구전으로 전해진 노래 하나를 소개하면,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그의 생명은 길고

하나님은 불멸하시고 그의 생명은 길다.

영겁의 세월(Kulpa)에도 죽지 않고

그의 위대한 속성은 불멸이지.“

카렌족들이 기독교를 잘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잃어버린 책의 전설이다. 내용은, 하나님이 7형제를 만드신 후 한 권의 책을 막내인 백인 아들에게 주었다. 형제들 간의 시기로 백인 동생은 그만 책을 가지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보드만 선교사가 카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자, 한 원로가 다짜고짜 책 가져왔소하였다. 장로들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또 다른 전설적 충고는 만약 육지에서 손님이 오면 슬퍼하고, 바다에서 오면 기뻐하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버마족 사람을 경계하고, 서양인들이 오기를 기대하라는 것이다. 전 세계의 많은 종족 중에 창조와 홍수의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위 내용같이 창세기와 유사한 것은 희귀하다. 그래서 캄보디아의 C&MA 선교사들은 동남아의 일부 종족에 퍼진 이 구전을 근거로 인도차이나의 기독교 선교역사를 5~6세기부터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와 접촉한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1825년 영국과 버마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여 미얀마가 영국 식민지가 된 것은 카렌족들과 기타 소수 부족들에는 해방이었다. 아시아 서구 식민지 이론은 다른 각도에서 평가가 필요하다.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자 많은 카렌족이 공무원, 군인 등 고위직에 등용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1948년 미얀마가 독립되자 미얀마인들이 카렌족들에게 보복하기 시작하였는데. 보복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카렌족들은 비교적 성실하고 책임성이 강하다.

 

카렌의 사도 고타뷰
카렌의 사도 고타뷰

 

카렌의 사도 고타뷰

카렌은 복음의 준비된 자들로 평가한다. 카렌의 첫 수세자는 강도, 살인자였다. 자기 스스로 30명 이상은 죽였다고 친구에게 실토하였다. 박해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되는 것에 버금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으니, 그가 바로 고타뷰였다. 그는 빚으로 버마인의 노예였는데, 저드슨이 카렌 구도자들을 통하여 소개받고 빚을 갚아주고 샀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어 전도 여행의 조력자로 동행하게 하였다. 본래 거친 성격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인내한 것이 열매를 맺어 일 년 후에 세례를 주었다. 그 전에 세례를 요구하였지만, 영적, 인격적 변화를 확인한 후 세례를 주었다. 전도의 초기였지만 선교 원칙을 준수하였다. 그 전에 성경과 요리 문답을 가르치고 변화를 점검하였다. 그는 세례를 받자 바로 전도자로 변신, 전도하기 시작하는데, 기적에 가까운 전도의 열매가 나타났다. 거의 집단개종에 가까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50세에 개종하여 12년 동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무학자로 버마어가 서툴렀지만, 카렌어로 설교는 설득력과 감화력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보드만의 전도설교보다 고타뷰의 설교를 더 듣기 원하였다고 보드만이 실토하였다. 메이슨은 그의 사후 다음과 같이 그를 존경하는 글을 남겼다.

그는 이후에 충실하고 성공적인 선교사였으며 카렌 민족의 기독교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탁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세례 받은 날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타보이에서 시암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파 되지 않은 지역에서 복음전파 하는 일을 절대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전도로 수백 명의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Ko Thah-byu의 이름은 망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라나는 세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때 "매우 평범한 능력"이 무엇을 성취 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합니다.”

 

선교적 교훈

카렌족 교회와 한국교회는 19세기 선교의 모델이다. 복음의 수용성이 높은 민족, 자립한 교회, 스스로 전도한 교회. 카렌 선교는 처음부터 사람과 공동체를 변화시키었다. 카렌족도 한국과 같이 개신교 신자 인구를 20~30%로 본다. 카렌족은 불교도는 아니었지만 샤머니즘으로 우상을 많이 섬겼다. 그러나 다 버렸다. 초기부터 고타뷰 같은 헌신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현지인들이 열심히 전도하지 않을 때 교회 부흥은 불가능하다. 선교사들이 아무리 언어를 잘하여도 잘 훈련된 현지인 사역자와 비교할 수 없다. 동남아 교회의 문제점은, 현지 신자들과 사역자들의 뜨거운 열정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 5월 20 캄보디아 선교사 30여 명이 캄보디아교회 자립을 주제로 한 학위논문 발표에서, 자립 저해 요소로서 캄보디아 신자들과 목회자들의 전도 열정 부족이 한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동남아에 신학 지원자가 감소하는 추세라고 한다. 개척할 때는 많은 데 사람이 없다. 이번 주 북태국의 유일한 인가학교인 맥길버리 신학교 목회학 석사과정 입학시험이 있었다. 20명 지원자 전원이 거의 학부를 졸업하고 목회하는 자들이고, 최근 대학졸업자는 필자의 간사인 카렌족 여학생 한 명뿐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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