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의 시처럼 빼앗긴 들에 봄이 온 세계 대표적인 상징물로 자유의 여신상과 에펠탑을 들 수 있겠다.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 프랑스가 미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뉴욕에 기증한 것이며, 에펠탑은 "유럽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89년에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이 설계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의 여신상과 에펠탑은 모두 자유를 획득한 상징물인 셈이다. 이 둘은 동토(凍土)의 땅에 봄이 온지 100년이 지난 후 프랑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유의 여신상

"나 죽거든 묘비에 대통령이라고 말고 독립선언서 초안자라고 새겨다오!" 1776년 7월 4일 미합중국을 탄생시키고 50년 후, 7월 4일에 숨진 토마스 제퍼슨이 남긴 말이다. 미 독립 전쟁은 프랑스 혁명과 함께 근대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다. 독립 전쟁의 불씨는 영국이 식민지에 대한 그릇된 과세 부담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이 1763년 7년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조지 3세가 식민지에까지 왕권을 강화하여 전쟁 비용과 식민지에 대한 여러 명목으로 세금을 부과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전쟁은 당초 식민지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1778년 프랑스가 제일먼저 식민지 측에 가담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1779년은 스페인이, 1780년에는 네덜란드까지 가세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역설적으로 미 독립전쟁은 영국에서 쫓겨난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있는 대영제국의 봉건적 구질서와 세력을 쫓아낸 격이 됐다. 미 독립전쟁은 버지니아 식민지 지사, 패트릭 헨리가 "나에게 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한 말과 같이 자주 독립의 성격이 강했다. 미 독립을 기뻐한 것은 누구보다 프랑스다. 프랑스가 경제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될 만큼 심혈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혁명의 불씨가 될 줄도 모른 채 말이다. 그럼에도 프랑스가 미 독립전쟁을 지원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시민들이 권리를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독립 100주년을 맞았을 때 프랑스가 발 빠르게 자유의 여신상을 기증한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여신상"(Statue de la Liberte Eclairant le Monde)이란 이름을 가진 이 여신상은 지난 1세기가 넘게 자유의 나라, 미국을 상징하였을 뿐 아니라 아메리칸 드림의 선봉장 역할을 단단히 해왔다.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디"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아 작업 전반을 지휘하였지만 에펠탑을 설계했던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를 맡음으로 완성되었다. 이 여신상은 1884년 1월에 완성되어 한동안 파리의 명물로 세워져 있다가 그 이듬해 완전히 해체한 후 미국으로 옮겨졌다. 지금도 변함 없이 뉴욕 항구 "리버티"섬에서 오른손에 횃불을,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의 날짜가 적힌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는 자유 여신상은 세계 만방에 자유의 소중함을 말없이 대변해 주고 있다. 자유, 100주년을 기념하는 에펠탑
"그대가 불태운 것은 숭앙하고, 그대가 숭앙한 것은 불태워라" 즉 "종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채택하라"고 하는 프랑스의 속담과 같이 프랑스는 지난 과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채택했다. 프랑스 대혁명(1789년 7월14일-1794년 7월28일)을 통해 구 시대의 산물이었던 "봉건적 구체제"인 계급 제도를 끝내고 민중들이 새로운 권리를 되찾은 것이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새롭게 국가를 건설한지 불과 13년만인,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의 본질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쟁취하고자 한 점에서 미 독립 전쟁과 그 성격이 동일하다 하겠다. 그러나 정부에 대하여는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미 독립 선언서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정부를 거부하고 바꿀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고 천명하고 있지만, 프랑스 인권선언은 정부를 거부하고 바꿀 수 있는 권리보다는 정부의 권리 제한과 법 앞에서 평등한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것을 담고 있다. 이후부터 근대 여러 나라들은 두 모델의 국가형태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프랑스는 시민들이 권리를 획득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에펠탑을 세웠다. "건축의 혁명"이라 일컫는 에펠탑은 1789년에 일어난 대혁명을 기념하기 위하여 1,789개의 계단으로 만들었다. 파리에 머무는 한 누구도 에펠탑의 시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에펠탑이 있는 파리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국인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도시가 되었다. 특히 종영한 TV 드리마 "파리의 연인"으로 더욱 유명해진 이 도시는 지금 패션의 중심지로, 문학과 음악, 건축, 미술 등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

에펠탑 제 3전망대(276m)에 오르면 가장 먼저 서울까지 8,912Km라고 쓴 이정표를 발견하게 된다. 전망대에 서서 시(市)가지를 바라보는 광경은 한마디로 "죽여준다". 그런데 그곳에 마련된 공중 화장실에 갖다오면 그 기분이 그만 사라지고 만다. "화장실 한번 사용하는데 왜 이렇게 비싸!"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 나빠할 것만 아니다. 1927년, 최초로 대서양을 단독으로 횡단한 미국의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는 조그마한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싣고 뉴욕을 출발하여 파리 에펠탑을 찾았다. 그것도 5,809㎞에 이르는 거리를 무려 33시간50분을 비행하면서 말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내는 수업료는 아주 괜찮은 편이기 때문이다.

독립과 자유를 서로 교환하다

프랑스로부터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로 받은 뉴욕은 그 보답으로 프랑스에게 또 다른 자유의 여신상을 보냈다. 이것은 뉴욕에서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진 후 3년만의 일이었다. 이것은 뉴욕 시민들이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기증한 것이다. 이를테면 독립과 자유를 찾는 것에 대한 기념으로 여신상을 서로 교환한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여신상은 뉴욕에 있는 것과 모양은 같지만 크기는 뉴욕에 있는 큰언니(?)여신상을 1/4로 축소하여 만든 것이다. 파리 시는 작은 여신상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이 되는 1889년 11월 15일에 센느 강 "백조의 섬"에 세웠다. 그런데 처음에는 대통령이 집무하는 "엘리제궁"을 향해 등을 돌려 세울 수 없다는 이유로 지금과 달리 에펠탑을 바라보게 했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과는 등을 돌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자유의 여신상이 서로 등을 돌리고 난 이후 미국과 프랑스가 서로 아옹다옹하는 일이 많아졌다. 지금도 프랑스는 여전히 독일이나 영국과는 달리 소련 붕괴 후 자신들이 미국의 패권주의에 제동을 거는 유일한 서방국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배짱은 미 독립전쟁에 공과를 인정해 달라는 의미도 있지만, 대혁명 이후 미국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한 탓이자 미국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견지한 드골 정치의 유산 덕택이다. 프랑스는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기간 내내 미국을 규탄했다. 당시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은 프랑스가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60년대 초,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자 프랑스는 즉각적인 철수를 주장하면서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1967년, 극기에야 프랑스는 한때 우방국이었던 미국과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든지 센느 강에 있는 동생(?)자유의 여신상을 뉴욕에 있는 언니(?)여신상의 얼굴과 마주보도록 현재와 같이 방향을 180도로 돌려놓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것마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동구권이 와해된 이후 두 나라는 각 국 국방예산이 감축되면서 경쟁은 더욱 심화됐다. 정치적인 관계와 맞물려 민간 여객기인 에어버스와 보잉, 미라주전투기와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F18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미군이 이라크 전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도 프랑스가 사사건건 물고늘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두 나라는 여전히 데면데면한 관계인 것을 감추지 않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과 에펠탑이 만들어 낸 "에펠탑 효과"

처음 에펠탑이 건립되었을 때 반응은 아주 냉소적이었다. "쓸모 없는 괴물 같은 탑" "파리의 수치"등의 맹렬한 비난을 쏟아 붙기도 했다. 특히 예술인들은 거대한 철제구조물이 고풍스러운 파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 놓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지금 에펠탑은 천박한 흉물이 아니라 파리시민들은 에펠탑을 "파리 서정의 극치"라고 자랑할 정도로 프랑스의 명물이 되었다. 일찍이 20세기를 빛낸 건축가 "르 코르비지"가 에펠탑에 대하여 예견한 "직감과 과학과 신념의 결실이자 용기와 인내의 딸"이라고 칭찬한 그 말이 적중되었다.

이런 엄청난 변화를 "제이존크"는 "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라고 불렀다. 즉 어떤 대상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그 대상에 대해 점차 우호적인 반응을 보여 호감이 높아진다는 이론이다. 세계에서 에펠탑이나 자유의 여신상보다 "에펠탑 효과"가 큰 것도 없을 것이다. 관광지로서는 말할 것도 없으며, 그보다 독립과 자유를 열망하는 약소국가들로부터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오게 했다.

"에펠탑 효과"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아시아만 해도 인도와 파키스탄,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비롯 수십 나라가 독립하였고, 아프리카에서는 무려 53개국 이상이 독립했다. 중동의 많은 나라, 동구권까지 모두 주권을 회복하는 영광을 안았다. "에펠탑 효과"는 한국의 근대사에도 여실히 나타났다. 3.1운동, 8.15 해방, 4.19, 광주 항쟁 등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북한은 아직 "에펠탑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제이존크"의 "에펠탑 효과"이론이 사실이라면 머지 않아 북한에도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본다.

- 필자 / 김학우[kmadrid@hanmail.net]
- 스페인 마드리드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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