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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 오고 있다"

더 이상 중동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 이슬람교가 전파되고 이태원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진지가 벌써 오래 되었다. 그런데 근년에 이르러 이슬람 신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정부와 기독교계가 긴장하고 있다. 정부로서는 국제적인 역학관계,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크게 신경 쓰이는 부분이고, 교회로서는 이슬람을 마지막 선교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오히려 역선교상황이 일어나고 있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는 별로 호의적이지가 않다. 이슬람이라 하면 많은 경우 테러를 연상하게 되어 일단 경계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슬람을 이해하고 바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차츰 호의적인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반미 감정을 가진 좌파들은, 우리 정부가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이슬람에 대해 어정쩡한 외교적 태도를 취한다며 비판하고, 더욱이 한국기독교가 근본주의적인 태도로 이슬람을 향해 공격적인 선교를 한다며 비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이슬람은 더 이상 중동 문제가 아니다.

이데올로기화 된 이슬람 근본주의
근본주의라는 말이 기독교 신학에서 처음 사용될 때는 18,9세기에 일어난 자유주의 신학과 구별해서다.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임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적 부활, 나아가서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을 부인했을 때, 이런 것들은 기독교 신앙의 한 부분이나 지엽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근본임을 천명하고 이를 지키려고 했던 신학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이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주로 종교적, 이념적 열광주의를 일컬을 때 사용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사용한다면 이데올로기화 된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이데올로기란 쉽게 말하면 정치권력화 된 이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종교도 정치권력과 결탁되고, 이것이 대중에게 강요될 때 우리는 그런 종교를 가르쳐 이데올로기화 된 종교라고 한다.

이데올로기화 된 종교로서 가장 두드러진 예가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종교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우선 종교와 정치가 하나이다. 그들의 목표는 이슬람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완전한 신정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원리주의자)은 이런 신정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성전(聖戰 jihad)으로 인식하고, 지하드에서 순교하는 것을 최상의 영광으로 여긴다.

과격한 이슬람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는 가장 과격한 이슬람 선교단체이다. 이들은 반대자들을 죽이고 제거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다. 9.11 테러를 지휘한 오사마는 “미국인들과 그 동맹자들 -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을 살해하라는 계율은 모든 나라에서 수행할 수 있는 모든 무슬림이 따라야 할 개인의 의무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런 과격한 이슬람을 이데올로기로 보기보다 민족주의에 따른 일시적인 반미감정으로 설명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현대에 와서 이스라엘과 그리고 그 배경이 되고 있는 미국과의 갈등에서 이슬람의 과격성이 더 노골화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슬람의 과격성을 단순히 반 이스라엘 감정이나 반미감정으로 치부할 수 없다.

7세기부터 시작된 이슬람의 역사는 그야말로 투쟁의 역사였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행해진 전쟁들과 대내적 혁명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코란과 칼은 항상 함께 갔다. 지금도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우익 이슬람과 세속적 이슬람 간에 치열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물론 이런 과격한 이슬람의 등장에는 기독교의 책임이 크다. 7,8세기의 중동지역 역사를 살펴보면 이슬람교의 발생이 농민혁명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8세기에는 지금의 아랍지역을 기독교가 석권하고 있었다. 당시는 봉건제후 시대였는데, 농민들은 소수 지배계층의 노예에 불과했다. 농사를 지어 7:3으로 나누었는데 10중에 7은 제후나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했고 그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데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그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기독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불만은 곧 기독교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고, 이 때 일어난 아랍지역의 농민혁명은 바로 반기독교적인 종교혁명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곧 중세기로 이어졌는데, 중세기의 기독교가 국가권력과 결탁되면서 소위 이슬람과 비슷한 신정 국가적 형태를 지니게 되었고, 그래서 이슬람과의 직접적인 대결구도에 들어갔다. 특히 로마 교황들이 이슬람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한다며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는데, 철저히 실패로 끝난 이 운동은, 본래부터 반기독교 세력으로 일어난 이슬람을 더욱 과격하게 만드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미국과 이슬람
현대에 와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더욱 과격하게 된 데는 미국의 책임이 크다. 미국이 힘을 가지고 오만한 자세로 세계 모든 문제들에 개입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력을 휘두르기 시작함으로써 반미감정이 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거기다 안타까운 것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로 표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미국 전 대통령 부시는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중동국가들과 미국과의 대결이 단순히 국가적인 대결이 아닌 종교적인 충돌, 문명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심정적으로 부시 정부를 지원했던 많은 기독교인들을 아주 당황하게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사실상 국가이기주의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들의 주장대로 세계 평화와 정의를 위해서 했다 할지라도 전쟁은 기독교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부시가 이 전쟁을 종교적인 신념으로 시작했다면 역시 그의 신앙은 이데올로기화 된 근본주의라고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격렬한 반미주의자들도 더 심하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축포를 쏘며 기뻐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이슬람 사람들이다. 그러나 유럽과 남미, 중국과 우리나라에서까지 이를 축하(?)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미국이 그렇게 당한 것은 자기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고, 테러범들이 오만방자한 미국을 이렇게 응징해 준 것이 너무나 속 시원하다는 것이다. 이렇다면 이들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가진 이데올로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반미감정이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없애버린 것이다. 선악의 문제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될 때 그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좌든 우든 하여간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종교의 기본적인 목적에 반하는 일이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악한 일이다. 우리는 생명을 존중한다.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 어떤 명분으로도 그것을 해할 수 없다. 우리가 사형제도까지도 반대하는 이유는 종교든 국가든 생명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을 대리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원주의와 다원화
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사물의 객관적 절대성을 부인하고, 이를 판단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 철학이다. 쉽게 말하면 소위 사상적 관용주의라고 할 수 있다. 종교를 예로 들면, 기독교만 구원의 진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그런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격적이고 유일한 메시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메시야적인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어느 종교를 믿어도 궁극적으로는 같은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아주 관대하고 포용적인 사상이다. 현대 민주사회는 다원화 사회인데, 다원주의는 현대사회에 매우 적합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다원화와 다원주의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다원화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관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말하지만, 다원주의는 진리의 절대성과 인간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아주 위험한 사상이다. 예를 들어 한국은 종교 다원화 사회이다. 불교, 유교, 기독교, 샤마니즘까지 어울려 있는 사회이다. 종교적인 갈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종교전쟁이라든지, 종교적인 심각한 갈등은 없다.

여기에 비교해서 아랍 국가들은 종교획일주의 사회이다. 그들은 이슬람이 관용적이고 사랑이 많은 종교라고 짐짓 변명하지만 이슬람 사회에는 다른 종교들이 발붙일 틈이 없다. 만일 무슬림 한 사람이 개종을 하면 그의 가정과 이웃으로부터 추방을 당한다. 그리고 온갖 사회적인 위협과 테러의 대상이 된다. 아랍지역의 선교사들은 피살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아랍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방화를 당하거나 폭탄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아랍지역은 종교 다원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다원화와는 다르다. 이는 진리에 대한 가말리엘적인 방관이다. 진리에 대한 적극성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앙고백이 없는 영적인 무책임이다. 이것이 평화로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자신의 영적인 운명에는 전혀 무책임한 일이 되고 만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주체의 상실이다.

주체는 죽었는가?
서강대학교의 강영안 교수가 쓴 책들 중에 『주체는 죽었는가』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이 책의 결론은 현대철학에서 주체는 죽고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진리에 대한 인격적인 자기결단이 없는 포스트 모던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주위에는 이외로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대단히 너그러운 분들이 더러 있다. 종종 부인이 혼자 교회에 나오는 가정의 남편들을 보면 이외로 협조적이고 좋은 분들이 있다. 종교는 자유가 아니냐며, 부인이나 아이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고, 혹 부모나 형제들이 핍박이라도 하면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도 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은 방관자로 남아있다. 그들은 종교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진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생명을 주는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이야말로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앙세계에는 중간지대가 없다
진리는 그 속성상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단을 요구한다. 신앙세계에는 중간지대가 없다. 선택과 결단이 요구된다. “신이 있다”라고 한다면 이 진리가 우리와는 아무 관계없는 단순한 지식으로서만 존재할 수는 없다. 그에 대해서 우리는 뭔가를 결정해야 한다. 믿는다든지, 거부한다든지, 아니면 무시한다든지.

그저 폭넓고 신사적이고, 그래서 언제나 넉넉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끝날 수는 없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신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복음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고 주장하는 예수님 앞에서 “내가 이 예수를 어떻게 하랴”고 고민하고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단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신앙을 빙자하여 사람을 미워하고 해치는 잘못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선악의 구별을 무책임하게 유보해 버리거나, 모든 진리를 상대화시키고 자신까지 무책임한 관용에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나 지신의 주체적인 판단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

코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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