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한반도국제대학원 석좌교수
캄보디아 장로교신학교 총장
본보 자문위원
2007년 7월 19일 아프가니스탄( 이하 아프간)에서 한국 기독교인 23명이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교회는 이 사건의 영향으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교회의 선한 행동이 반대로 사회적 규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외국 언론마저도 한국 교회의 “공격적 선교”,”열심주의”가 초래한 결과라고 발표했다. 일본의 일부 언론도 비판적인 시점으로 보도를 한 듯하다. 게다가 한국의 한 교회의 동경집회가 일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도 영향이 있는 듯하다.

이번 인질사건에서 한국의 언론은 허위보도를 했다. 아프간에 가지 말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갔다-라고 추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정부의 공문서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서부터 카불까지의 국도를 이용하지 말라는 내용뿐 이었다. 그들은 정부의 명령대로 그 국도를 피해서 이동을 하였다. 심지어 일본의 한 신문은 그들이 소매 없는 옷에 부르카도 쓰지 않은 체 아이스크림을 먹는 등의 행동을 해서 현지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까지 보도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출발 3개월 전부터 문화적응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이 소속된 교회는 막대한 인질대금을 정부에게 지불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고 있다. 한국정부는 너무도 고액의 몸값을 지불했고 그로 인한 비난을 받고 있다. 요미우리 신문에 의하면 인질의 몸값은 2000만 달러라고 보도되었고, 또 그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어쨌든 한국교회는 잘못된 여론의 보도에 의해서 엄청난 시련에 처해있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이것은 중요한 교훈임과 동시에 도전이 되었다. 교훈이라는 것은 한국교회 선교가 지금처럼은 안 된다 라는 반성과 비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170여 개국에 1만 7천명의 선교사를 파송해왔다. 한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80년대 중반까지 2천명을 넘지 않았었지만, 80년대 후반부터 급성장했다. 급속한 양적 성장은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두 개의 종교의 선교적 충돌, 또는 문화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국의「이코노미스트」紙 8월 2일의 기사는 중요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한국 크리스챤과 탈레반 : 신앙의 충돌」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또한「한국 기독교와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함께 한국사회의 삼위일체를 형성하고 있다」라고 이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한국은 종교적인 열심의 결과와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으면 안되며, 탈레반은 알카에다로부터 배운 사형실행과 자살폭탄의 방법을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상황에 있기에, 양자 모두 신의 일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수행할 수 밖에 없는 의지를 굳히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선교적 열심과 탈레반의 과격주의를 비교하는 점에서 이 기사는 매우 정확한 분석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사회적으로는 좌파 그룹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으나, 다행히도 기독교인 대통령이 이번 선거로 당선이 되었다. 한국에는「반기독교 시민연합」이라는 사회단체가 존재하고 있다. 회원은 약 1만 명 정도라고 한다. 이번 아프간 사건에서도 그들은 선두에 서서 기독교의 선교를 공격했다. 이러한 사회단체는 한국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재 한국교회는 이슬람의 공격에 직면해 있다. 이슬람은 2020년까지 한국을 이슬람화 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한국에서 공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선교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많은 교회가 회교도들을 대상으로 예배와 선교를 하고 있지만, 터키와 파키스탄으로부터 온 다수의 이슬람 선교사들은 교회의 목사나 중역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전개하고 있다. 이미 국내의 많은 크리스챤 여성들이 회교도들과 결혼을 했다. 그런데 이슬람의 선교의 역사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메카를 순례하는 회교도의 숫자도 한국은 약 천명, 일본은 약 3천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일본보다 한국을 이슬람화하기 위해 전략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일본교회에도 알리고 싶다. 우리들은「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라고 고백을 한다. 일본과 한국교회는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서 상호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제화 시대에 폐쇄적 민족주의는 구시대적 유물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주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반성하는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현재, 약 1만 7천명의 선교사를 전세계 150여개국에 파송해 활동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급속히 성장했다. 특히 80년대 후반부터 선교사들의 해외파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지적된다. 한국 선교사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험의식에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고쳐야 한다고 지적되는 점을 정리하자면, ▼ 돈의 선교라는 것, ▼ 훈련 되지 않은 선교사가 많다는 점, ▼ 어학이나 행동에 있어서의 준비부족, ▼ 상호협력이 되지 않는 점, ▼ 중복투자, ▼ 문화적응에 문제가 많고, ▼ 현지 문화나 교회를 무시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서 외신이 한국교회에 충고하는 내용의 많은 부분은, 한국교회가 열광적이고, 공격적 선교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일부의 선교팀은 금지된 지역에서 용맹스럽게 노방전도를 행하거나, 방문지를 손을 잡고 둘러싸고 그 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잘 뿌려지도록 기도한다. 추운 겨울에도 한 시간에 걸친 기도하는 것이 당연시되어 필자는 추위를 견딜 수 없어서 고생을 했지만, 젊은 열정과 종교적 열심이 결합하여 젊은이들은 추위도 잊은듯 했다. 또 현지의 선교사가 신중한 행동을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는 팀도 있었다. 이슬람 국가에서 전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매우 흥미 있는 것은 이슬람 국가에서 일대일로 전도를 하면, 전도하는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하는 이슬람교도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을 Field Operation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이슬람교도와 서로 교류를 하면서 문화를 배운다.

이렇게 말해도, 선교지에서의 이러한 열심은 환영받지 못한 채「문화침략자」가 된다. 일본에서도 한국인 선교사는 7000명을 넘는다. 일부의 선교사들은 일본의 교회의 신자들과 노방전도를 하기도 한다. 최근 캄보디아 정부의 종교국(Ministry of Cults and Religion)은「외국종교관리시행」(Concerning the Re-enforcement in Implementation of the Management of Pagan Religion)에 관한 문서를 발행했다. 이 문서는 최근 타종교 신자들에 의한 바람직하지 않은 활동이 눈에 뜨인다는 지적과 함께 종교시설의 세울 때는 반드시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정하고, 교회나 종교지역의 주변주민의 피해가 될 정도의 음량으로 방송이나, 종교를 목적으로 하는 금전의 사용을 금지하고, 타종교의 강요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종교 지도자들이 불교나 승려들에 대해서 존경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타종교를 비난하거나 매도하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 유인물을 나눠주거나 전도하는 것은 종교시설이나 학교 안에서만 가능하도록 했다. 따라서 노방전도는 금지되었다.(이상, 공문은 2007년 6월 26일 발행된 것임)

캄보디아 정부가 이러한 공문서를 발행한 이유들 중 한가지는, 과격한 한국의 선교여행팀중 한 명이 앙코르와트의 사원에 올라서「하나님, 이 사원이 무너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것을 정부 당국자들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케이신문의 비판은 유감

산케이신문은 온누리교회의「러브소타나」 동경 집회 이후, 한국 기독교 선교에의 열심을 한국인들의 문화적 기질이라고 단정지었다. 이하는 산케이 신문의 보도를 일부 인용한다.

어째서 인기인가? 팽창하는 한국 기독교, 인맥사회와 국민성<산케이신문 2007년 9월 20일자>
아프가니스탄의 한국인 봉사단 인질사건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의 실태에 내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는 인구의 약 1/3, 1500만 명도 넘는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최근 한류스타까지 동원해서 한국 기독교회의 대일 포교 이벤트가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왜 기독교가 인기인가. 그들은 왜 포교에 열심인가. 배경을 심도 있게 살펴봤다. 한국에는 현재, 3만 이상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교회관계자의 말).「서울 및 수도권에서는 커피숍보다 많다」라고 하는 말까지 들려온다. 이번 아프간의 봉사활동에서 화제가 되었지만, 해외파견 선교사는 70년대는 100명 아래였던 것이 요즘은 1만 명을 넘어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라고 한다.

한국인의 이런 기독교의 열심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한국의 교회를 경험했던 일본인이 모두 하나같이 놀라는 것은,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형태와 신도들의 무아, 도취형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세계 최대라고 하는 체육관 같은 교회가 있어서, 노래나 음악과 함께 이벤트식의 대규모의 선교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전에 일본에서 한류스타까지 동원했던“선교이벤트”에서 2만 명 이상을 모았던 교회는「과거를 묻지마라」,「함께 힘을 모아 일본구원」을 강조하면서 일본에서의 포교를 위해 열성으로 타오르고 있다.「한국인은 어떤 일에도 금방 열심이 되어, 열정적으로 보일 정도로 정열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해서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싶어하는 성격」이 있어, 그것이 신앙과 포교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공격적 성격”은 미국 기독교의 영향이라는 설도 있지만, 한편으로는「미국 기독교에서는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교회관계자)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국내적으로는 거의 포화상태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래서 해외진출이 활발하게 되어, 기독교의 불모지대라고 말해지고 있는 일본에서의 최근의“도전”은 그것의 일환으로 보여지고 있다.


물론 산케이 신문은 비기독교적 시점으로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일본 포교를 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지는 않다. 한국 교회도 이벤트 선교 집회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첫째로,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선교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유래한다. 세계 모든 종교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선교하고 있다. 일본의 종교는 대체적으로 선교가 약하다. 그래도 일본불교의 한 종파인 일련정종(日蓮正宗)은 한국에도 신자가 있다. 나는 오사카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일본을 사랑한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노골적으로 친일파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이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이념이나 종교를 갖지 못하는 사실에는 유감이다. 일본산 자동차가 전세계를 달리지만, 불행히도 일본은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세계적 가치관과 이념이 없다. 그렇기에 일본은 Pax Japonica를 이룰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한국 기독교 인구는 카톨릭 신자를 포함해서 1200만 명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선교의 열심이 사라졌다고는 말하지만, 아직도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는 국가이며, 아직도 미국은 선교대국이다. 한국교회의 선교이론과 정신은 미국에 의지하고 있다.
셋째로 물론 한국인들은 일본인에 비교하면 정열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장점도 있지만 단점이 더 많다. 그러나 최근 일본의 냉철한 지성과 한국의 열심이 만나서 성장하고 있는 교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 일본교회가 한국교회의 전도 열심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넷째로 일본의 교회 지도자 중에는 일본에서 한국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소수의 한국인 목사들이 일본의 농촌교회나 목사가 없는 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으며 선교비는 한국교회가 부담하고 있다. 이것은 좋은 협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미전도종족 선교의 시대이다. 30년 전 70만 명의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한 일본교회는 하나도 없었다. 700만 명의 한국인 선교사들은 주로 재일한국인을 대상으로 봉사하고 있다. 아무리 소수이며 미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재일한국인은 가장 큰 위로자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선거와 한국교회

이번 한국 대통령 선거로 10년간의 좌파정권이 끝이 났다. 이명박 당선자는 BBK 문제로 특검을 받아야 하는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득표로 당선됐다. 국민은 도덕적 문제보다는 경제・실리주의 이념에 보다 비중을 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당선자는「경제적 메시아」로써 등장한 것이다. 선거에서 약 70%의 기독교인들은 이명박 장로를 지지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몇 개의 대형교회의 목사들도 설교에서 노골적으로 이명박 장로에게 투표할 것을 성도들에게 전했고, 그로 인해 좌파 그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일부 선교단체까지도 이명박을 지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한국은 종교와 정치가 엄연히 분리되어 있는 사회이다. 지금까지 선거에서 교회는 기독교인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사표명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혹시 다시 좌파정권이 집권하면, 나라의 경제가 더욱 악회되고, 교회도 더 엄한 시련에 직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용을 한 것이다. 수 년전 시작된 뉴라이트라는 시민단체는 처음부터 이장로를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회원은 약 10만명 이상이다)

후보자들의 교회방문이 이러한 경향을 말하고 있다. 한국은 기독교인구가 많기 때문에 선거 때에는 후보자들이 대형교회를 방문, 예배에 참가한다. 후보자가 크리스챤이 아닐지라도 목사는 후보자에게 인사할 기회를 준다. 여당후보자인 정동영씨는 카톨릭 신자이지만,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방문했다. 물론 인사 후 박수를 받았지만, 이것은 의례적인 것 이였으며, 비교해서 이명박 당선자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것은 마치 4년전,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부시대통령을 지지했던 것과 닮아있다. 지금도 미국 기독교는 대통령후보자들의 이념과 가치관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수이념의 공화당 후보자인 하카비 전 아칸소 주지사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많은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미국복음주의교회의 이러한 정치화를 맹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미국복음주의를「형님의 교회」로 사랑하고 있다. 일본의 일부 자유주의신학자들은 미국 복음주의의 신학을 세계 정복 신학이라고 비판하지만, 이 비판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교회연」에 의해서 기독교적 이념이나 가치관의 통일을 이뤘던 적이 결코 없다. 역시 지연과 학연이, 교회연보다는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문제에서는 아직 신앙적 이념보다는 지역주의가 보다 중시되어진다. 따라서 모든 크리스챤이 이명박장로를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호남의 크리스챤들은 호남출인의 여당후보자를 지지했다. 그곳에서는 소수의 크리스챤만이 이명박을 지지했다고 추측된다.

이번 선거에서 10명의 후보 중 카톨릭 신자가 6명이나 있었지만, 불교신자는 없었다. 게다가 불교는 노골적으로 이명박에 대해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이병박후보는 먼저 불교본부를 방문해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불교를 위해서 8종의 정책을 반드시 시행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때 이명박의 부인도 동행을 했고, 불교본부로부터 불명이 적혀진 목판을 선물로 받았다. 그것은 불교에서 개종하는 자에게 주는 불교식 이름이다. 이것에 대해서 일부 목사들은 이명박 장로가 타협을 했다고 비난을 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노무현정부 출범 이후, 보수적 교회와 반공노선의 시민단체가 서로 협력을 했다는 점이다. 반공노선의 시민단체들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좌파정권의「햇볕정책」에 불안감을 느껴, 반노무형 운동을 전개했다. 한편으로 좌파 그룹과 진보적 기독교가 대체적으로 협력했다. 이것에 의해 현정부에는 진보적신학자와 교회지도자들이 많이 참가했다. 예를 들어 통일부장관은 목사이며 진보적 신학자이다. 그는 햇볕정책의 전도사로 발탁되었다. 한국민중신학의 바탕의 일부가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저서도 일본어로 대량 번역되었다. 그러나 지금, 사회적으로 진보적 신학이념은 대중으로부터 잊혀지고 있다. 호남에서도 김대중을 규탄하는 그룹이 등장해, 얼마 전 김前대통령의 자택 앞에서 데모사건이 발생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좌파정권의 연장을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실패로 끝이 났다. 노무현의 좌파정권은 민주, 개혁, 평화, 분배의 정의를 주장했지만, 국민은 신뢰하지 않는다. 특히 현정부의 외교정책은 반미, 반일노선이었다. 좌파그룹은 스스로를 민주적이며 개혁적이라며 자만하고 있지만, 보다 권위주의적이며, 부패해버렸다. 가난한자를 위한 분배의 정치를 약속했지만, 부자들에서부터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과중한 세금을 부과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해 수도권에서 패배했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강제적 분배로 인해서 실패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배우지 못했었다. 동시에 서구사회에서 분배는 기독교 정신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었다.

통일과 선교의 갈등

작년의 아프간 피랍사태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이슬람과의 갈등과 충돌보다 좌파세력과의 갈등의 표면화라는 문제에 봉착했다. 한국은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와 충돌했다. 한국전쟁 이전에도 다수의 교회지도자들이 공산주의 통치하에서 순교했다. 손양원목사의 두 아들의 죽음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이로 인해 북한의 많은 기독교신자들이 남쪽으로 피난해 왔다. 그들은 현재 한국교회의 성장과 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60년대 후반까지만을 보더라도 한국의 활력적인 교회는 전부 북에서 남으로 건너온 크리스챤이 많았다. 영락교회를 시작으로 해서 많은 장로교회는 북으로부터 온 피난민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들은 한국에서 빠른 속도로 경제적인 부를 축척했으며, 교회도 부흥시켰으며, 한국사회를 지지하는 중산층을 형성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이념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교회는 사회에 강한 반공(反共)신학을 제공한 것이다.

70년대는 군사문화 절정기였다. 이것은 김대중을 시작으로 많은, 이른바 민주화 세력들이 강하게 독제 타도를 외쳤다. 유감스러운 일로 이 속에 상당수의 좌파이념으로 반독재운동을 전개해 그들은 지금도 현 정치 권력의 핵심이 되어 있다. 현정권을 움직이는 7명의 핵심인물은「기독교운동권」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독교는 성경적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다. 좌익적 기독교는 노골적으로 북한과의 평화적 통일을 외친다. 그에 따라 90년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좌익이념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80년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평화신학은 햇볕정책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적 좌익그룹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보다 남과 북의 화해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보수적 기독교는 통일의 목적이 북한 주민의 해방과 선교에 있다. 반면 진보적 기독교는 선교보다는 무조건적 평화통일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월남(북쪽에서 삼팔선이나 휴전선의 남쪽으로 넘어옴)식 공산통일도 거부하고 있지 않다.

왜 좌파는 무너진 것인가?

첫째, 이번 선거에서 좌파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실패에 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이념이나 종교보다는 먼저 먹는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군사독재 시기에 부흥했던 경제를「민주정권」이 반대로 후퇴시켰다고 생각한다. 좌파정치가들은 경제보다는 이념지향적으로 경제도 정치도 모르고 있다. 그들은 계란을 낳기도 전에 분배하는 방법에 더 관심을 두었다. 생산이 없는 분배는 실패를 부른다.

둘째, 김대중 정권 때부터 기업가들은 투자를 우선시했으며, 노무현정권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더 심해졌다. 좌파정권은 처음부터 공산국가에서 실패했던 이념을 늦게 유입한 것이다. 한국의 청년실업자는 OECD국가 중 최하위다. 따라서 20대와 30대의 청년들까지 좌파에 등을 돌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좌익이념의 실패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선거 기간 중, 그들은 교조주의적 열정을 보여주었다. 즉 자신들은 건전한 이념에 의해 정치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했다. 여당의 한 리더는 국민이 늙어버렸다고 실언을 해버렸다.

셋째, 그들은 가치관과 논리의 모순을 도출시켰다. 그들은 한국의 인권탄압과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북한의 인권탄압과 독재는 전혀 주제로 삼지 않았다. 반대로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할 정도였다. 이들은 인권과 자유를 절대로 보편적 가치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 상대주의적 논리관을 가지고 있다.

넷째, 현정부에 있어서 권력형부정과 스캔들이 너무 발생했다. 많은 택시운전사들은 한국에서 가장 부자는 좌파리더의 한 사람이라고 빈번하게 말한다.

다섯째, 그들은 북한과 화해와 평화를 강조하지만, 사회운영을 항상 갈등과 불신과 분열을 조장했다. 특히 강한 노조운동은 기업가들의 투자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불행히도 세금징수를 위해 고발문화를 발생시켰으며, 고발문화는 교회에까지 파급되었다.

마지막으로 현정권의 실패는 교회도 개혁의 대상으로 간섭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언론은 특히 대형교회의 부정과 비리, 안에서도 세습제도를 부상시켜서 사회적으로 기독교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슬람과 친한 한국정부

사무엘 헌팅턴의「문명의 충돌」에 의하면, 유교와 이슬람은 적대관계가 아닌 친한 관계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아시아에서는 유교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헌팅턴은 유교와 이슬람은 함께 권위주의문화이기 때문에 친해질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유교와 이슬람이 사이가 좋은 대표적인 사례로 북한과 중동의 관계를 들 수 있다. 공교롭게도 북한은 벌써 오랫동안 미사일과 핵무기 분야에서 중동과 협력관계를 이루고 있다. 북한과 시리아의 핵협력에 불안을 느낀 이스라엘은 작년 시리아의 핵시설을 폭격했다. 나는 2007년 시리아를 방문했고, 시리아의 복음주의 리더들에게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한 목사가 나에게 북한에 대해 물었다. 북한과 시리아의 관계는 이전부터 가까웠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은 한국보다는 북한에 있었다. 중동 전쟁기인 1967년, 북한은 시리아에 공군조종사를 파견했다고 한다. 중동의 많은 사람들은 한국보다 북한에 보다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중국의 지하교회의 목사나 신자들이 21세기의 이슬람 선교는 중국교회가 하지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중국과 이슬람은 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중국지하교회(비공인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이 경제적 지원이나 이슬람 선교에 대한 훈련도 받지 않고 중동국가와 중앙 아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제2차대전 이후 많은 이슬람 국가는 친소, 반미정권을 선택했다. 이란이나 이집트 등 친미정권을 선택했던 국가들은 내부로부터 많은 반발이 있었다. 그 대표적 예로 이라크는 60년대에 군사정권이 탄생해서 친영, 친미에서부터 친소로 방향을 바꿨다. 이슬람 제국의 친소, 친중 정권은 단순히 서양식 민주주의에 대해서 반발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공산주의는 무신론이라는 점에서 이슬람과의 일치가 어려워 보이지만, 이념적으로는 반자본주의, 반민주주의, 반기독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공산주의와 이슬람은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 또는 전체주의다. 그리고 개인의 존중보다는 집단의 일체감과 단결을 강조한다.

무슬림들은 석유를 알라가 주신「검은 황금」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이슬람 제국은 엄청난 양의 석유생산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생활이 곤궁하다. 이란은 군인들의 군복도 개인이 사지 않으면 안된다. 국제정치학자들은 이것을 석유의 저주라고 말한다. 원인은 부정부패와 사회주의 경제정책에 있다. 그로 인해서 요즘 이슬람 제국들은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정치가 親이슬람인 증거

노무현 정권은 교육, 경제 등에서 이념지향적이었다. 특히 학교 교육을 철저히 정부 통제 아래에 두었다. 공산주의는 교육을 중시해서 정부가 직접 통제한다. 그로 인해 신정부는 교육개혁부터 시작해서 대학입시제도를 대학의 자율에 맡기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고 있다. 현정부는 반미, 반일, 친이슬람 정책을 가지고 있다. 현재 외무부는 중동의 석유수입을 이유로 이슬람과 협력할 기회를 점점 늘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나라이다. 이슬람 국가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수 없지만, 그것은 경제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외국과의 경제교류에 있어서도 항상 이슬람 선교를 우선시한다. 70년대 석유위기 때, 한국은 중동에서 석유를 수입해서 위험을 피했다. 당시 한국에 있던 소수의 무슬림들이 사우디 정부를 설득했다. 사우디는 한국에 석유를 팔면서 노골적으로 모스크 건축을 요구했다. 그로 인해 한남동에 모스크가 세워질 수 있었다. 현 한국 정부가 이슬람과 가까운 것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사건을 몇 가지 소개하자.

3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이슬람학회, 중동학회, 아랍학회, 지중해학회 등의 이슬람 단체가 자주 세미나나 학회, 전시회 등을 열고 있다. 이슬람 관련 세미나나 회의들이 외무부가 공동주최로 하고 있는 것들이 많고,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세미나는 대게 비공개로 열리며 출석한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은 이름, 직업, 전화번호, 전자메일 등의 개인정보를 써야 하지만, 중동에서 온 참가자들은 이름만을 쓸 뿐이다.

2001년 911사태가 발생했을 때 한국의 여론은 이슬람의 테러행위를 규탄하는 것 보다, 테러의 원인을 미국의 교만과 서양식 민주의의 탓이라고 하면서 국민의 반미 감정을 부추겼다. 흥미 깊은 것은 911 이후 미국에서는 이슬람 인구와 모스크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에는 약 600만의 이슬람 인구와 3000개의 모스크가 있다. 한국에는 14만명의 이슬람 인구와 30개의 모스크가 있다.

작년 9월 7일, 빈라덴의 육성 녹음 테잎이 공개되어 한국의 신문에 짧게 보도되었는데, 신문사들이 보도한 내용은 빈라덴이 이후 이라크에서의 전쟁은 더욱더 치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내용뿐이었다. 그러나 이 테잎의 핵심은 만약 미국이 이슬람교로 개종해서 민주주의적 정치형태를 포기한다면 이라크와의 전쟁은 중지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언론은 이것을 보도했지만, 한국의 언론은 일관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프간 사건 이후, 서울시 강남구청은 9월 29일, 한국에서 이슬람 전도사로 알려져 있는 한 교수를 초대해서「탈레반과 이슬람 정계의 이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개최한다는 공문을 시민들에게 발송했다. 그것은 정교분리(국가가 종교적 중립성을 유지하여 정치권력과 종교를 결부시키지 아니함) 원칙에 위반하는 것이다.

한국 교육부는 이슬람 연구와 중동관련 학술 활동에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있다. 교육부에는 또한 학술진흥재단이라는 학술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 있다. 이 기관은 신학 분야의 연구논문의 지원은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슬람 관련 학술연구는 대폭 지원해주고 있다. 이 지원금을 받은 연구논문과 서적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올해 안으로 인천에 거대한 이슬람 문화원이 건축될 것이다. 인천시는 2010년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며 모스크, 이슬람 전시관, 박물관 등을 유치하는 거대한 이슬람 문화 시설을 위해서 10억원 상당의 부지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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