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과 코람데오

기독교윤리에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정직이다. 정직함이 신앙과 인격의 기초이고,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를 이루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말의 헬라어는 피스티스(fistis)인데 이 말은 정직, 혹은 진실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따라서 진실하지 않고서는 개인의 신앙도 인격도 바로 설 수 없을 뿐 아니라 결코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우리가 가장 많이 들은 교훈이 정직하라는 것이었다.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라는 표어도 한마디로 정직하자는 말이다.

오늘날 한국경제는 세계 10대 순위에 들어가지만 정직성에 있어서는 47위라고 한다. IMF 이후 크게 맑아졌다고 하나 여전히 거짓과 허위가 많은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그러나 전과 비교하면 현저히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정직성을 제고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조처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거짓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라도 정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조처들 가운데 금융실명제가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게 만든 조처였다고 본다. 일반사회에서는 돈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돈의 관리나 거래를 실명으로 하도록 한 것은 정직한 사회로 가는 신작로(新作路)를 닦은 일이다.

기독인들은 어떨까? 한국사회는 기독인들이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만약 기독인들이 정직함에 모범이 되었다면 금융실명제 이상으로 효과 있게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때로는 오히려 은혜와 용서라는 막연한 기대 가운데서 거짓이 쉽게 용납되는 풍토가 조성되기도 했다.

정직한 사람이 되고 어디서나 진실하게 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정말 진실하게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였으리라. 우리에게 얼마나 위선과 거짓이 많은지 모른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위선이란 누더기를 입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의를 입고 나타난다”고 하였다. 위선의 죄는 누더기를 입은 세속인들보다 성직자의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더 많다는 말이다.

기독인들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거짓의 유형이 있다.
첫째는 반(半) 거짓이다. 진실에다가 거짓을 섞은 경우이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이나 타인의 정죄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이다. 이 경우 거짓이 드러나면 변명이 많고, 심하면 거짓을 지적하는 사람을 도리어 정죄하고 고발한다.

둘째는 상황을 핑계하는 거짓이다. 자기 말이나 행동이 거짓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거짓은 주로 상황이나 어떤 사건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데서 나타난다. 이런 자들은 때로 성문법까지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며 자신의 거짓을 정당화한다.

셋째는 물증 없는 거짓이다. 흔히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는 말을 하는데, 물증을 남기지 않고 거짓을 행하거나, 거짓을 행하고도 물증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자기를 정당화하는 거짓이다. 아마 가장 악랄한 거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인들에게는 물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심증이다. 교회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의 분별력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말씀과 성령으로 경건의 훈련을 받은 자들은 영분별의 은사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인적인 요소를 물적 요소보다 더 중시한다. 사람들의 말이나 행위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의 평소의 삶과 삶의 열매를 주시하는 것이다.

하여간 거짓은 감시를 당할수록 더 교묘해진다. 기독인들의 거짓이 간교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코람데오의 믿음을 가진 자라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그를 지켜 줄 것이다. 결국 진실은 믿음의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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