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노릇한 지 십년이 좀 넘었다. 우여곡절도 많고 파란도 겪었고, 부침도 있었고, 천국 기쁨도 맛보고, 지옥 고통도 넘나들었다. 가끔, 아주 가끔, 목사 일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리고 주일 날 예배드리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도 한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놀고 싶어서도 아니다. 으레 하는 예배다. 그러다보니 주전자 속의 개구리마냥 매너리즘에 빠진 내가 싫어 그렇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예배와 설교가 식상하고 진부해지면 안 되지 않나. 그러니 한번만이라도, 더도 말고 딱 한번이면 족하다, 쉬고 싶다.

내 솔직한 속내는 다른 곳에 있다. 설교 때문이다. 설교의 내용이나 수사와 문장, 그리고 횟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설교와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 때문에 나는 시름한다. 교인들이 아는지 몰라도, 그리고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도 몰라도 -그분은 눈감아 주고 계신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안다. 설교하는 내내 나는 나와 싸운다. "그러는 너는? 그래서 뭐? 너나 잘 하지 그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벗어날 수 없는 설교인지라, 설교하는 동안 “넌 사랑 하냐? 사랑이 뭔지 알아? 말은 잘해"라는 조소와 냉소를 떨치지 못한다. 정말 하기 싫다. 그런 내가 싫다. 

손봉호 선생님 강연을 들으니, 당신은 신학 공부도 마쳤는데, 끝내 목회자가 되지 않은 것은 시골 교회 목사님 영향이 큰 듯하다고 하신다. 하도 엄격하게 신앙생활하셔서 목사란 저렇게 해야 하는데 당신은 그럴 자신 없어 포기했단다. 손봉호 선생님처럼 나도 처음부터 이 길로 들어서지 말아야 했던 것은 아닐까. 신학 공부가 원체 재미있으니 그걸로 만족하고 다른 일 알아봐야 하지 않았을까? 참 후회스럽다. 그 목사님처럼 교우들 앞에서 그런 엄격한 신앙을 유지하는 목사가 되든지, 아니면 선생님처럼 처음부터 그만 둘 일이지 목사 일을 하면서 왜 이리 갈대처럼 흔들린단 말인가. 답답하기 그지없다.

교우 한 분이 내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교회 다니기 싫다고. 교회가 싫은 것도 아니고, 목사인 내가 미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좋단다. 그러니 싫단다. 교회 오면 좋은데,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힘들단다. 자신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이 싫단다. 더 이상 그런 내면의 처참한 몰골을 숨기고 그럴 듯하게 예배하는 것도 지쳤다 한다. 작은 신앙 공동체 목사인지라 한두 명이 안 나오면 휑한 데, 이메일 받고 마음이 졸려 쿵쾅 뛴다. 한 사람 고민을 들으며 함께 아픔을 느끼기보다 교인 수부터 생각하는 내가 정말 밉다. 그러니 목사 노릇 하기 싫다는 게다. 기실 원인을 추적해보면, 목사직 자체가 아니라 제대로 된 목사가 아닌 내 탓인데도 나는 엉뚱하게 목사라는 직분에 화풀이하고, 탓하고 있다.

주일 날 예배드리고, 점식 먹고, 치우고, 단 둘이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내 그랬다. "너, 참 부럽다. 너는 네 모습이 싫어서 교회 안 나올 수 있지만, 나도 내가 역겨울 때가 많은데, 그런 나는 어떡하냐?" 참 감사한 것은 그로 인해 나는 얼마 간의 위로를 받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 나만 이중성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게 아니라는 게 위안이 된다. 욕하면서 닮고, 욕하면서 친해진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마음을 느꼈다는 게 무한 감동이다. 흔히 교우들이 "목사도 우리랑 다를 바 없네"라며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마땅한데, 목사가 교인들도 매일반이라는 것을 알고 고소해 하니 우습기도 하고 멋쩍기도 하다. 그건 교우들 몫이고, 나는 나대로 은혜 받는다.

나랑 똑같은 교인을 보면서 즐거운 나는 예수님도 매일반인 것을 보고 신난다. 오늘 말씀 묵상은 요한복음 12장 20-33절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영광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밀알처럼 죽어서 많은 열매 맺겠다 하신다. 참 희한한 세계관이다. 고난이 영광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 자체가 영광이란다. 더 없이 고상한 얘기하시던 예수님은 결국 속내를 드러내신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롭다. 벗어나고 싶다."(27절) 그럼에도 그분은 달게 십자가 길을 걸으셨다. 그분도 말씀은 십자가가 영광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마음은 피하고 싶으셨던 거다.

애써 태연한 척 하지 않고 고백하셨다. "나도 하기 싫다!" 내가 하나님 아들인데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지 억울하다는 뜻도 있겠지만, 하나님 아들인 나도 하기 싫다는 의미도 있다고 본다. 하나님 아들인 나도 하기 싫은데, 너희들은 오죽 힘들고 하기 싫겠냐, 그런 투다. 엄청 은혜다. 감추지 않으시고 발설하신 것이 눈물 나게 감사하고, 그러기에 우리를 넉넉히 이해해 주실 것이기에 감사하고, 그럼에도 고난을 영광으로 인식하고 가신 것에 감사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했을 거니까 말이다.

교인에게서 동병상련의 위안을 받고, 고귀한 주님의 인간적 모습에 감동을 받지만, 아직도 그대로인 내 모습을 쉽게 용서가 안 된다. 설교할 때 속으로 그런 생각을 왕왕 하곤 한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설교할 자격이나 자신이 없습니다. 설교를 잘 준비하지 못했고, 오늘 설교한 대로 저는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설교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선언하고 내려오면 교인들 반응은 어떨까? "와! 우리 목사님 정말 정직하고 솔직하시다." 아니면 "목사님, 미안하지만 우리는 목사님이 원래 그런 줄 다 알아요. 그러니 오늘따라 유난 떨지 마세요." 그것도 아니면 예배하러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 할 거다. 격려가 나올지, 냉소가 흐를지, 혼란스러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지 모르겠다.

그런 말을 하고플 때마다 꾹꾹 참는다. 왜? 내 자신을 훑어내는 것이 창피해서? 아니다. 나는 참 나쁜 놈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가망없는 죄인이다. 그러니 그런 것 밝힌다고 부끄러울 게 뭐가 있나. 예수님도 그러셨는데 예수님 제자답지 않겠나. 다만, 내가 끝내 그런 고백을 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만약 내가 성도들 앞에서 그런 고백을 했다면, 아마 나는 일 년 52주 내내 그렇게 말해야 한다. "오늘도 못하겠습니다." 그럴 바에는 목사 노릇 그만 두어야 마땅하다. 게다가 양치기 소년이 한두 번의 거짓말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니 즐거웠던 것처럼 나도 어쩌면 그걸 즐길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면 어쩌자는 건가. 첫째, 한 번은 말할 필요가 있다. 그 교인처럼 나도 이런 내 자신이 밉다고. 외면하고 싶다고. 나도 위태위태하다고. 차라리 그만두고 싶다고. 그런데도 오늘도 설교한다고. 그래서 참 미안하다고. 그걸 말보다 더 확실하고, 더 오래 기억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남을 글을 통해 고백한다. 이 지면을 빌어 교우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를 청한다. 부디 나같이 형편없는 목사 때문에 위로를 팍팍 받았으면 좋겠다. 나는 부족한 사람을 목사로 알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섬겨주는 교인들에게 감사하고, 성도들은 모자라는 목사를 위해 기도로 조금 보충하면 좋겠다.

둘째는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것이다. 존 뉴턴의 찬송시를 바꿔 말하면 이렇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시고 목사로 세우신 주 은혜 놀라워!" 나도 내가 덜 떨어진 존재라는 걸 잘 아는데, 하늘 아빠가 보시기에 나는 얼마나 한심하고 추한 존재이겠는가. 그분 심정을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도 그분은 날 기다려 주신다. 우스갯소리 있지 않나. 노래방에서 노래 못하면 잘 할 때까지 계속하라고. 천국에도 노래방이 있는가 보다. 아니면 천국에 있어서 노래방이 있던지. 나보고 잘할 때까지 계속 하란다. 아무튼 쓸모없는 사람을 쓸모 있게 하시려고 그분도 참 고생 많다. 덤으로 그분은 아내나 가족, 좋은 교우들을 붙여 주셔서 잘 한다고, 좋다고 칭찬과 격려를 듣게 하신다. 기대 저버리는 것이 더 나쁜 짓이니 '못 먹어도 계속 GO'다.

마지막으로 이중적 모습을 위선으로 인식하지 말고 긴장으로 받아들이는 길이다. 우리 교회에는 김기현이라는 이름 인물이 둘 있다. 한 사람은 설교하는 목사 김기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설교를 듣는 교인 김기현이다. 그러니까 나는 설교하는 자이면서도 설교를 듣는 자다. 설교하는 시간 나는 하늘 아빠를 대신하고 대리하여 그분을 뜻을 전달하는 목사다. 동시에 나는 하늘 아빠의 뜻을 구하기 위해 예배당에 나온 교인이다.

칼 바르트가 하나님 계시의 3중 형태에 예수와 성서와 더불어 설교를 포함시킨 것에 힘입어 신성모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히 말하자면, 설교하는 중 나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다. 설교하는 나는 마치 내가 하나님인 양 설교한다. 그러면서도 다름 아닌 내가 설교의 일차 청중이자 최초 청중이다. 설교는 나한테 한다. 남 들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나 들으라고 하는 게 설교다. 내가 설교자만 되면 교만해 진다. 내가 청중만 되면 비굴해 진다.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거고, 겸손하게 하나님 말씀을 들을 거다. 영적 건강은 예서 나온다.

목사이자 교인이라는 이중적 정체성 사이의 자장을 견뎌내면서 그 사이에 서 있을란다. 시계추마냥 양 극단을 오가는 것을 감수하련다. 조금씩 성숙할 것이고, 그래왔지만 근본적인 변화와 완성은 미루어져 있으니까. 본래 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하나님은 나를 목사로 세우신 거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살갗 안과 밖의 압력이 동일하기에 우리 몸이 건재하단다. 만약 어느 하나가 세지면, 그 순간 살이 움푹 들어가거나 피가 콸콸 솟구치게 된다. 그 시로 운명이 다하게 될 것이다.

그래, 맞다. 하늘 아빠가 나 더러 이 일을 하라고 하셨기에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목사 하기 싫다며 가슴을 치면서도 이 외에 다른 무엇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칠 도리가 없기에 이 길을 벗어나지 않으련다. 내 속의 죄인 된 모습과 내 안의 예수님의 모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도, 그렇게 흔들리면서 예수님 쪽으로 조금씩 더 나아갈 것이다. 그게 내 모습이고, 그게 은혜의 본질이다. 다른 데서 은혜 구하지 않으련다. 그런 내 모습에서, 그런 나를 격려하는 교우들에게서,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늘 아빠에게서 은혜와 사명이 있다. "나, 목사 하기 싫어!"와 "나, 목사 하고 싶어!" 사이에 서 있다. 나는 그런 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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