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군 북면. 연덕리 마을회관엔 ‘Young World 영월’이라 쓰인 푯말이 서 있고, 그 맞은편엔 전교생이 10명인 연덕분교가 있다. 분교에 가장 많은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 윤익상(48)·이명자(49)씨 부부는 이 마을 배제비골에 산다. 영월 절개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엔 저마다 이름이 있다. 사람이 살기 힘들어선지 짐승과 새가 주로 골짜기의 이름이 됐다. 부부는 갈 곳 없는 7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 2003년 겨울

수양부모협회에서 첫 전화가 걸려 왔다. 맡을 아이가 생겼다는 것인데, 10개월 된 남아였다. 부부는 손이 덜 타는 다섯 살 넘은 여아를 원했다. 갈 데 없는 아이를 키우자고 마음은 먹었는데 도시는 비싸니까, 귀농을 선택했었다. 자립할 토대는 만들어야겠다 싶어 손톱이 나가도록 일했다. 그러다 4년이 갔다.

젖먹이라고 내치면 언제….

말을 하다, 남편은 손에 박인 굳은살을 뜯어냈다.

그럼 데려다 키운다고 합시다.

명자씨는 말라서 더 구부정한 남편의 등을 향해 호기롭게 말했다.

10월 26일 사회복지사가 영월역으로 영수(가명)를 데려왔다. 아기는 더벅머리였다. 이발을 한 번도 안 한 게 분명했다. 흘러내린 콧물이 양 갈래로 굳어 있었다. 중이염과 비염을 앓고 있다고 했다. 복지사가 건넨 가방에는 기저귀 3개와 분유 반 통이 들어 있었다. 아기 엄마는 미혼모라고 했다. 살 만해지면 찾아갈 거라고 했다.

아기는 단 세 시간을 같이 있었던 복지사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쓸쓸했구나, 아기를 안았더니 뒤로 쓰러지며 울었다.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여도 그치지 않았다. 명자씨의 마른 가슴이라도 내주고 싶었다. 아기가 온 지 열흘도 안 된 11월 초, 또 전화가 왔다. 삼형제인데 학교도 못 가고 있다고, 부모가 이혼했는데 아빠가 신용불량자라고 했다. 그렇게 현수(당시 2학년·가명), 창수(1학년), 철수(6) 삼형제가 왔다. 사내 녀석들은 정신없이 뛰었다. 아기는 울고 삼형제는 뛰었다.

강인식 기자

명자씨는 평범한 주부였다. 남편은 목사다.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목회를 했다. 부부는 결혼하면서 삶의 목표를 ‘소외된 사람을 위해 사는 것’으로 정했었다. 하지만 ‘사정이 괜찮아지면’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계획은 유예됐다.

1998년 어느 날, 교인 한 명이 기도를 하다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간질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교인 몇이 교회를 떠났다. 누구는 “무섭다”고 했고, 누구는 “꺼림칙하다”고 했다.

결국 방법은 소외된 이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부부는 결론 냈다. 한국의 시골은 늙어 갔다.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아이들을 남겨놨지만 거두어 주는 이는 없었다. 시골에선 그렇게 결손가정과 조손가정이 늘어 왔다. 부부는 모아놓은 돈으로 배제비골에 땅 2650평을 샀다.

# 1999년 여름

외동딸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할 것 같아 명자씨는 귀농이 내키지 않았다. 중2였던 딸에게 “고추장에 밥만 비벼 먹어도 괜찮겠느냐”고 했는데, 군말이 없었다. 그래서 명자씨도 싫다고 하지 못했다.

7월 19일. 배제비골에 내려오니 아무것도 없었다. 8평짜리 비닐하우스를 치고 잤다. 맑고 컴컴한 그곳의 밤엔 별뿐이었다. 하우스 앞 개천에서 빨래를 하는데 뱀이 나와서 명자씨는 울어버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고 숙제하는 딸을 보며 또 울었다.

어느 날인가 비가 많이 내려 개천이 불었다. 개천을 건너야 딸애가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발목까지 오던 물이 허리까지 찼다. 명자씨는 딸의 속옷과 교복을 비닐에 싸 머리에 이었다. 모녀는 그렇게 개천을 건넜다. 수건으로 딸을 닦아 주고 옷을 갈아입혔다. 딸은 군소리 없이 학교로 갔다. 딸의 뒷모습을 보며 명자씨는 다시 울었다.

전기는 10월에나 들어왔다. 방 네 개짜리 집이 세워진 것은 겨울이었다. 밤엔 영농기술책으로 공부하고 낮엔 밭에서 일했다. 여름엔 농사를 지었다. 일감이 없는 겨울이면 뻥튀기 장사를 했다. 강릉 도매시장에서 떼다 팔았다. 부부는 진부·대화·제천·단양·평창의 5일장을 돌아다녔다. 허생원(소설 ‘메밀꽃 필 무렵’) 같지 않아? 똑같은 데 돌아다니네. 명자씨는 소녀처럼 말하곤 했다.

# 2008년 가을

지난해 가을, 삼 형제의 아빠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직업도 얻고 재혼을 해 이젠 형제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맏아들 현수는 착했다. 엄마의 무거운 짐을 뺏어 들었고, 밭에도 나갔다. 둘째 창수는 똑똑했다. 고무동력기 날리기 도대표였고, 원주의 방과후학교에서 ‘맞춤법 1등’을 했다. 셋째 철수는 엄마에게 릴레이 달리기를 시켰다. 엄마는 가을 운동회에서 철수와 함께 릴레이를 했다. 명자씨는 분교의 최고령 엄마였다. 형제는 엄마 생일엔 에이스크래커를, 아빠 때는 빠다코코넛을 선물했다. 그런 형제가 떠났다. 9월 27일이었다.

그날 저녁 세 자매가 왔다. 11살, 9살, 6살이었다. 친아빠는 명자씨에게 "10년만 키워 주십시오”라고 했다. 첫째와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혀가 입안에 붙는 질병이 있었다. 정선의 자선단체 도움으로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지체장애의 아빠는 애들을 수시로 때렸고, 알코올중독이던 엄마는 2007년 집을 나갔다. 자매는 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허리를 허이로, 사과를 하과로 발음했다.

자매에겐 머릿니가 있었다. 부부는 무릎에 애들 머리를 누이고 서캐와 이를 발라내 짓이겼다. 자매는 어금니까지 썩어 있었다. 겨우내 치과를 다녔다. 명자씨는 부엌에 화이트보드를 달고 사물의 이름을 가르쳤다. 자매는 이곳에서 창문이 창문임을 알았고, 사과를 사과라고 발음했다.

# 2009년 봄

10개월 된 아기였던 영수가 입학했다. 한 손으로 영수를 업고, 한 손으로 고추 모종을 키웠었다.

딸 희진이는 경기도 안산에 취직했다. 사회복지사가 됐다(실은 명자씨도 지난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키우던 고양이를 영월 집에 맡기러 온 딸에게 명자씨는 물었다.

“너도 어려운 사람들이랑 살라구?”

“아니, 난 엄마처럼 못 살아. 출퇴근하면서 도우면 되지.”

그렇게 말하는 딸의 머리를 명자씨가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남편이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의 무릎엔 영수가 잠들어 있었다. 그 앞에서 세 자매가 요즘 꼬마들에게 인기 최고라는 ‘유희왕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출처:중앙닷컴 글=강인식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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