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를 공부하면서 해결하기 어려운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한 때 부흥하고 왕성하던 교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왜 점차 쇠약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지고 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 제시했는데 가장 주목받는 사람들 중에 하나는 선교학자 허버트 케인이다.

케인 박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세계선교사(A History of the Christian World Mission)에서 한 때 터툴리안, 시프리안, 어거스틴과 같은 유명한 교부들을 탄생시켰던 북아프리가 교회들이 몰락하고 이슬람화한 원인을 정치사회학적인 원인과 선교학적인 원인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는 정치사회학적인 원인을 다음 여섯 가지로 나누어 제시했다. 첫째는 이슬람 세력이 확장해오자 기독교인들이 무슬림 치하에 살기 싫어서 기독교 지역인 유럽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주로 영향력이 큰 부자 크리스천으로 유럽으로 이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떠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남았다. 둘째는 현실적 타협론자들이 있어서 이슬람에 용감히 맞서기 보다는 신중히 순종하며 때를 기다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신앙적 타협론자들이 있어서 무슬림들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손이 인간사에 관여한다고 믿고 무슬림과 싸우는 것은 곧 하나님과 싸우는 것임으로 이를 피하여 이슬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슬람을 기독교보다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계시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기회주의자들이 이슬람 권력과 야합하여 보호와 특권을 누렸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교회가 그동안 정치와 연합하여 세력을 가지고 물리적인 힘으로 개종을 시도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의 이유 만으로서는 그토록 강력했던 교회가 그처럼 짧은 시간 안에 몰락한 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허버트 케인은 정치사회학적인 원인에 이어서 선교학적인 이유도 여섯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는 교회는 진정한 토착화된 교회가 아닌 외래 종교였으므로 더 이상 매력이 없을 때는 버릴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회는 로마 권력과 라틴 문화와 긴밀히 연결되었지 현지문화와는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신자들은 카르카고 중심으로 대부분 라틴어 사용민족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넷째는 현지인인 카르타고 인들은 거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베르베르 인들에게는 전도조차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현지어로 된 성경이 없어서 라틴어 사제들이 떠난 후에는 현지어로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을 지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비생산적인 신학 논쟁이 교회의 힘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등으로 설명했다. 다른 학자들의 견해도 케인 박사의 주장과 거의 일치한다.

이와 같이 선교학자들이나 교회사 학자들이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 분석했지만 모두가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는 못했고 또 교회의 쇠퇴와 소멸을 방지할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지금도 흥망성쇠를 되풀이하고 있다. 교회 역사는 복음이 한 지역에 들어가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자라서 마침내 왕성한 교회로 성장하여 여러 민족들에게 선교하는 교회가 되었다가 그 후 점차 쇠약해져서 마지막에는 사라지는 패턴이 반복하고 있음을 증거 한다. 이와 같은 복음의 발아.성장.왕성.쇠퇴.소멸까지의 한 주기는 대게 200-300년 정도에 걸쳐서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들이나 그 이후 유럽 교회들에서 관찰할 수 있으며 현대 미국 교회나 다른 지역의 교회들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한국교회에도 이미 이런 징조가 나타나 최근 교회 성장이 멈추었다거나 아니면 벌써 마이너스 성장단계에 들어갔다고 하는 보고이다. 이것은 아직 130년 역사도 채 안 된 한국교회가 벌써 쇠퇴기에 들어섰다는 뜻이 되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연구해야만 할 긴급한 과제이다.

쉐마교육연구원을 창립한 현용수 박사는 신약시대 교회들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원인을 구약에서 찾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백성들이 구원받도록 신약교회와 구약교회에 각각 지상명령을 주셨다. 신약교회에 주신 지상명령은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을 제자삼아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서 수평적 선교이다. 반면에 구약교회에 주신 지상명령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자녀들을 제자로 삼아 말씀을 자손대대로 전수하는 수직적 선교이다. 신약교회에 주신 지상명령인 수평선교에 대해서는 현대 대부분의 교회들이 알고 있지만 구약교회에 주신 수직선교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신약의 지상명령이 마 28:19에 근거한다면 구약의 지상명령은 창 18:19절에 기초를 둔다고 현 박사는 주장한다.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 이라고 번역했다. 달라스 신학교의 구약학 석좌교수인 Eugene Merrill 은 현 박사의 이 견해를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수하는 것의 중요성은 현대 교회가 되찾아야 할 긴급한 과제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한국의 유수한 신학자들 중에서도 현 박사의 이론을 받아드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쉐마교육연구원 홈페이지 http://www.shemaiqeq.com/index.htm 참조).

구약에 수평선교 사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구약의 주된 관심은 자손대대로 말씀을 전수하는 수직선교이다. 유대인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면 거의 늘 외침에 시달리고 포로로 잡혀가고 마지막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나라마저 사라져 온 세상에 흩어져 천덕꾸러기 떠돌이로 살아왔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맡기신 말씀의 수직적인 전수는 목숨을 걸고 시행해 왔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할아버지로부터 손자에 이르는 3대가 함께 살면서 신명기 6:7에서 제시한 방법대로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4,200여 년 동안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신앙을 이어오고 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와 같이 아브라함부터 오늘까지 세대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유대인들은 일점일획이라도 가감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형을 자손들에게 세상 끝날 까지 전수하는 것을 민족적인 사명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나님은 오늘 자기들의 하나님임으로 하나님이 자기들에 대하여 변하지 않으시는 이상 자기들도 하나님에 대하여 변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살고 있다.

유대인들이라 하여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잘못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아니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원줄기로부터 찍혀서 내버림을 당했다. 정통파 유대인들과 오늘 기독교인들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에 관한 관점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다는 것이 서로 다를 뿐이다. 만약 유대인들이 예수님만 메시아로 영접한다면 그들이야말로 구약과 신약을 계승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이다.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요즘 들어서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새롭게 인식하고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이다. 사실로 한국인 신자들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유대인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방인들이다. 돌 감람나무로서 참 감람나무인 유대인들이 꺾어져 나간 자리에 접붙임을 받아서 참 감람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진액을 공급받아 사는 것이다(롬 11:17). 바울의 설명과 같이 가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고 뿌리가 가지를 지탱하는 것이므로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구약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유대인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또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유대인들의 구약적인 수직선교를 이해하면 왜 신약교회들의 생명이 200-300년 밖에 지탱하지 못했던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 해답은 신약 교회들은 구약의 지상명령인 수직선교를 유대교적 유산이라고 등한히 하거나 아니면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에 대한 거부감에서 나온 반유대주의 정서는 기독교의 뿌리인 구약의 많은 부분을 율법주의를 배격하는 와중에 잃어버렸다. 이것은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도 함께 버린 것과 비슷하다. 신약교회는 지상명령을 수평선교에 치중하여 이해하고 수행한 결과 구약의 지상명령인 수직선교를 상실했다. 그래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정작 자기 가정의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수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한 때 왕성하던 교회들이 그들의 젊은이들을 모두 세속에 뺏겨 버렸다. 자녀들을 세상에 뺏긴 교회는 자연적으로 쇠퇴하고 마지막에는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소아시아에 세워졌던 교회들이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돌 몇 개만 남아서 현재는 관광지가 되고만 이유이다. 로마의 교회들이 그러하고 유럽의 교회들도 이런 과정을 밟아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덩그런 건물만 을씨년스럽게 남겨놓고 말았다. 그래서 소아시아와 유럽은 오늘날 다시 선교지로 바뀌게 된 것이다.지금은 미국 교회가 그런 과정을 따라가고 있고 한국교회도 이제 내리막길에 들어섰다고 하는 보도는 우리의 마음을 바쁘게 만든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여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대안으로서 가장 좋은 한 방법은 잃어버린 구약교회의 지상명령인 수직선교를 회복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영접한다면 그들도 자기 자녀들을 포기하고 수평선교에만 매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과 땅 끝까지 복음 전하는 것을 동시에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의 지상명령이 자녀를 버리라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 하실 때 자기 땅은 포기하고 이웃 땅으로만 가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자기 땅을 포기하면 거기가 또 땅 끝이 되기 때문에 모순이 된다. 자기 땅에 복음을 왕성하게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서 복음이 닿지 않은 다른 땅으로 가서 전하라는 뜻이었는데 신약의 교회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오해했다. 바울은 자기 자녀가 없어서 수직적인 자녀선교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가 자녀선교를 등한히 해도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디모데나 디도를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부지런히 가르치고 얼굴을 마주대하여 직접 가르칠 수 없을 경우에는 편지를 써서라도 가르쳤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침체를 회복하고 계속 성장하며 예수님 재림시까지 온 세상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방법은 수직선교와 수평선교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으로서는 시급히 수직선교를 더 강조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수직선교가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부모들은 자녀를 제자삼아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기는커녕 자녀들에게 너무 세상공부를 강조하여 심지어는 주일에도 예배대신에 학원으로 입시공부로 자녀들을 빼돌리는 예가 허다하다. 한국교회의 자녀들은 도대체 말씀으로 양육 받을 기회가 없다. 자녀를 제자삼아 말씀으로 키우는 것은 부모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인데도 한국교회 부모들은 이 명령을 준수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주일학교에 이 책임을 넘겨버린다. 주일학교가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해 주기를 바라지만 주일학교 만으로서는 수직선교를 감당하지 못한다. 엿새 동안 세속문화에 방치되었던 아이들을 주일아침 한 시간 교육으로 바로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은 자녀들을 세속에 빼앗겨 버리고 만다. 이렇게 되면 다음세대에는 수평선교를 하려고 해도 선교사로 나갈 사람이 없어진다. 그리고 교회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신약교회가 발전시킨 선교학은 수평선교를 위한 학문으로서 타문화권 연구에 치중하여 타민족의 언어, 문화, 의식주, 사회체제, 민속, 세계관, 가치관, 종교 등의 연구에 초점을 두었다.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내 집안의 자녀들을 연구하고 이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구약의 지상명령으로 돌아가 자녀를 제자삼아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이방인 신자들이 구약을 다시 연구하여 수직선교 방법론을 개발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또 가능성도 많지 않아 보인다. 그러므로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이 방법으로 자녀를 키워오는 유대인들의 교육을 배우는 것이 빠르고도 바른 길이라고 여겨진다.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에서 우리 기독교회의 수직선교 방법론을 개발하여 기존 신약교회의 수평 선교와 균형을 이루게 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발전시켜야할 한국형 선교이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수직선교를 회복해야 한다. 이길 만이 한국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소아시아나 북아프리카나 유럽 교회들처럼 한때 왕성하다가 사라지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 끝날 까지 왕성하게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수직선교와 수평선교의 균형을 이루는 한국형 선교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이것을 먼저 우리 한국 교회에 적용하고 또 온 세계 교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모든 교회들이 그들의 자손들에게 대대로 복음을 전수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왕성한 교회로 남아있게 하는 것이다. 21세기부터 재림까지는 한국형 선교로 선교하기를 제안한다.

미드웨스트 대학교
문화인류학 대학 교수
남후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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